태조 (고려)
고려 국왕, 창업군주, 후삼국 통일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07:59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시대를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한 초대 국왕이다. 궁예 휘하에서 무공을 세우고 918년 고려를 세워 송악으로 천도하며 국가 기틀을 다졌다. 발해 유민을 흡수하고 신라와 연대하여 후백제 견훤과 맞서 싸워 대패를 극복하고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호족 포섭 북진 정책 숭불 정책으로 민심을 수습했으며 거란의 수교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임종 직전 훈요 10조를 남겨 후대 왕들의 통치 지침을 제시했다.
877
[태조 왕건 탄생]
신라 한산주 송악의 호족 왕륭과 위숙왕후 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남달랐으며, 도선대사의 예언과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주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 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건'이라 지었다.
896
[궁예 휘하로 합류]
아버지 왕륭과 함께 중부 지방의 강자로 떠오르던 궁예를 찾아가 송악을 바치고 그의 휘하에 들어가 장수가 되었다.
이는 후고구려 세력 확장에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왕륭과 왕건 부자는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후고구려의 장군으로서 전장에서 무공을 세우고 세력 확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898
[정기대감 임명]
궁예로부터 정기대감에 임명되어 양주와 견주를 공격했다.
이후 광주, 충주, 당성, 청주, 괴양 등 충청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평정하며 태봉국의 세력권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초기 양주와 견주 공격은 큰 성과가 없었으나, 이후 광주, 충주 등을 평정하며 아찬 위계를 받고 뛰어난 지략과 통솔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903
[나주 지역 최초 점령]
전라남도 지역으로 진격하여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해상 뱃길을 차단하여 태봉의 국력 확장에 기여했다.
나주 호족 오다련의 딸 오씨(장화왕후)와 결혼하여 후일 혜종을 낳았다.
이 시기 왕건은 해양 세력을 이끌며 견훤과의 대결에서 중요한 거점을 확보했다. 이 공로들로 알찬으로 승진하며 궁예의 총애를 받았다. 909년에 나주를 재점령했다는 설도 있다.
906
[상주 사화진 전투 승리]
궁예의 명을 받아 정기장군 금식 등을 거느리고 상주의 사화진에서 견훤과 여러 번 싸운 끝에 그의 군대를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통해 왕건은 후백제군과의 육전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입증하며 태봉의 세력을 더욱 확장시켰다.
909
[진도와 나주 재점령]
진도 부근의 도서를 공격하고 나주 금성을 정복했다.
덕진포에서 소수의 전함으로 견훤의 대함대를 화공으로 대파하며 나주 민심을 안정시켰고, 서남해안의 해적 '수달'을 체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나주와 주변 지역을 점령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후백제와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태봉은 후백제와 신라에 의해 사방이 가로막히는 형세를 만들었다. 이러한 공로로 왕건은 궁예에 이은 태봉국의 제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913
[시중에 오르다]
변방에서의 거듭된 공로를 인정받아 문무백관의 최고 우두머리인 시중의 지위에 올랐다.
공정한 정사를 펼치고 억울한 사람들을 구제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나, 궁예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시중이 된 왕건은 청주 사람 아지태의 간특한 행위를 밝혀내 처벌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로 인해 군부 장교들과 호족, 공신들이 그를 따르자 궁예가 자신에게 철퇴를 겨눌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918
[이흔암 숙청]
궁예에게 충성심이 깊었던 공주 출신 이흔암을 숙청했다.
염장의 고변과 염탐꾼의 보고를 빌미로 이흔암을 잡아 심문, 자백을 받아낸 후 시장에서 목을 베어 처형했다.
이흔암은 궁예 집권 말기에 웅주를 점령했던 인물로, 왕건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에 이흔암의 처형이 6월에 일어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왕건이 즉위한 후 발생한 일련의 정적 숙청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고려 건국]
궁예의 독단과 폭정에 반발한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 무장들과 호족들의 지지로 거병, 궁예를 축출하고 철원의 포정전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국호를 '고려'로, 연호를 '천수'로 정하며 새 나라를 건국했다.
왕건은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즉위 교서를 통해 궁예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고 새로운 규율을 세울 것을 천명했다.
[임춘길 등 반란 진압]
환선길의 난 직후, 청주 출신 순군리 임춘길 등이 반란을 도모했으나 복지겸의 정보망에 의해 발각되었다.
왕건은 처음에는 회유하려 했으나, 마군대장군 염상의 주장을 받아들여 경종을 비롯한 역모 혐의자들을 처형했다.
염상은 경종이 조카를 도성에서 데려가려 한 것이 볼모를 통한 호족 견제 정책에 대한 반역이라 주장했고, 왕건은 이를 수용했다.
[환선길의 난 진압]
고려 건국 4일 만에 마군장군 환선길이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노렸으나, 복지겸의 보고와 왕건의 태연한 대처로 실패했다.
환선길은 추격 끝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왕건은 환선길의 역모를 알았음에도 증거 부족으로 무마했으나, 환선길이 직접 칼을 겨누자 꾸짖어 복병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는 왕건의 뛰어난 위기 대처 능력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환선길 형제의 반란이 건국 후 논공행상 불만 때문으로 추정한다.
919
[수도 송악으로 이전]
자신의 고향이자 정치적, 군사적 기반인 송악(개성)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이는 궁예의 터전이었던 철원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을 해소하고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왕건은 빈민 구제 기구인 흑창 설치, 세금 인하로 민심을 안정시키고, 호족 세력과의 정략 결혼, 자제들을 도성으로 유학시켜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불교를 건국 이념으로 삼았다.
920
[견훤의 신라 침략]
견훤이 신라의 합천(대야성)을 점령하자, 고려와 후백제 간의 평화가 깨졌다.
신라가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고, 왕건이 군대를 보내 견훤이 퇴각하면서 신라와 고려의 우호 관계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견훤은 왕건의 즉위 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신라 침략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고려의 박수경 장군이 견훤군을 패배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견훤은 웅진(공주)까지 진출하며 고려의 혼란을 이용하기도 했다.
924
[견훤, 조물성 1차 공격]
견훤이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 군사로 조물성을 공격했다.
고려에서 구원군으로 보낸 장수들이 전사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조물성 사람들의 강한 저항으로 후백제는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925
[발해 유민 유입 시작]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자, 대규모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해 오기 시작했다.
이는 고려의 인구 증가와 병력 확보에 기여하며, 고구려 계승을 자처하는 왕건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발해 멸망 후 후발해, 정안국 등이 세워졌으나 불안감을 느낀 발해 유민들은 계속 고려로 유입되었다.
[견훤, 조물성 2차 공격]
견훤이 다시 3천 기를 이끌고 조물성을 내습했다.
고려군이 상군과 중군이 패하며 수세에 몰렸으나, 유금필이 구원군으로 달려오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고려는 간신히 승리했다.
이후 견훤과 왕건은 화친을 결정하고 왕신과 진호를 인질로 교환했으나, 진호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한 견훤이 왕신을 죽이고 공주성을 기습하며 평화는 깨졌다.
926
[대광현 등 발해 유민 흡수]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무너져 망명해 온 발해의 왕자 대광현을 포함한 발해 유민들을 대거 흡수했다.
이는 고려의 국력 증강과 고구려 계승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발해 유민의 유입은 왕건이 병사들의 수를 늘리고 견훤과의 싸움에도 동원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또한 왕건이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데 큰 명분을 얻었다.
927
[견훤, 경주 기습 및 경애왕 살해]
견훤이 경상북도 북부를 공략하다 갑자기 경주로 기습하여 경애왕을 비롯한 신라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새 왕으로 앉혔다.
신라의 원병 요청에 왕건이 출병했으나 경주 함락을 막지 못했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해 대구 공산(팔공산)에서 왕건의 군사와 마주쳤다. 이로 인해 공산 동수 전투가 발발하게 된다.
[공산 동수 전투 대패]
공산(팔공산)에서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다.
신숭겸이 왕건으로 변장하여 전사하고, 김락 등 개국공신들을 잃는 등 5천여 명의 병력을 잃으며 왕건은 겨우 목숨만 건져 개경으로 후퇴했다.
공산 전투는 고려군이 겪은 가장 큰 패배 중 하나로, 왕건은 크게 슬퍼하여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 패배로 고려의 힘은 한동안 열세에 놓이게 된다.
929
[의성부 함락, 홍술 전사]
공산 전투 이후 기세가 오른 후백제군이 의성부를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왕건의 부장인 성주 홍술이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나는 양손을 모두 잃었다"며 비통해하며 직접 출정을 결심하게 된다.
후백제군은 경상도 지역에서 승승장구했으나,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한을 사 왕건에게 귀순하는 호족들이 늘어나는 결과를 빚었다.
930
[고창 전투 대승]
후백제군이 교통 요충지 고창(안동)을 포위하자, 왕건은 유금필의 강력한 주장으로 출정하여 저수봉 전투와 고창병산 전투에서 견훤군을 대파했다.
견훤은 8천여 명의 사상자와 참모 김악을 잃으며 삼한 패권을 급속히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경상도 일대의 친고려 호족들의 막판 참전도 영향을 미쳤으나, 유금필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이 승리로 경상도 일대 호족들이 고려로 대거 귀순하고 신라 또한 왕건을 서라벌로 초대하는 등 고려가 한반도 패권을 장악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932
[일모산성 공격 개시]
왕건의 친정으로 단행된 일모산성 공격이 시작되어 11월에 함락되었다.
이 시기 후백제 해군이 고려 내해와 섬들을 침략하기도 했으나, 이들은 결국 유금필에게 격파당했다.
일모산성 함락은 후백제 해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본토 내지를 잃지 않고 오히려 확보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933
[유금필, 신검군 격퇴]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경주 근처까지 진군해 신라가 멸망 위기에 처하자, 왕건은 유금필을 긴급히 출동시켰다.
유금필은 결사대 80명으로 신검의 군대를 격퇴하고 경주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유금필은 사탄과 자도에서 신검의 군대를 연달아 대파하며 후백제 장군들을 사로잡는 전설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왕건은 "우리 장군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크게 감탄했다.
934
[운주 전투 대승]
왕건이 운주 일대 진공 소식을 들은 견훤이 화의를 청했으나, 유금필의 주장으로 고려군은 공격을 감행했다.
유금필이 강력한 기병 수천 명을 이끌고 후백제군을 대파하여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후백제는 웅진 이북의 30여 개 성을 고려에 항복시켰다. 견훤의 약해진 모습을 간파하고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한 유금필의 역할이 컸다.
935
[신라 경순왕 항복]
견훤의 고려 귀부 이후, 신라 경순왕이 마의태자 등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건에게 투항할 의사를 피력하고 귀순했다.
왕건은 경순왕을 극진히 대우하며 사위로 맞아들여 신라를 평화적으로 합병했다.
경순왕의 귀순은 왕건에게 통일 전쟁의 정통성을 부여했다. 왕건은 자신을 고구려와 신라의 계승자로 천명하고 견훤을 반란자로 지목하여 통일의 명분을 확고히 했다.
[나주 지역 재수복]
유금필에게 명하여 929년에 후백제군에게 빼앗겼던 나주 지역을 다시 수복했다.
이는 신검 형제의 반란 직후 이루어진 기습적인 작전으로, 견훤을 고려로 데려오기 위한 포석으로 짐작된다.
나주 지역은 후백제의 해상 교통로를 차단하고 배후를 위협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견훤, 고려에 귀부]
후백제 왕실 내분으로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이 막내 아들 능예 등과 함께 탈출하여 나주를 통해 고려에 귀부했다.
왕건은 그를 상부의 예로 극진히 대우했다.
견훤의 귀부는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왕건은 이를 통해 후백제를 반역 집단으로 규정할 명분을 얻었다. 견훤은 이후 왕건의 신검 정벌에 동참했다.
936
[후삼국 통일]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를 반역 집단으로 규정하고, 10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거느리고 출병하여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의 군대를 대파했다.
이후 신검이 항복하며 후삼국을 통일하고 발해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했다.
일리천 전투에서는 고려 2대 황제가 되는 혜종 왕무와 강공훤, 그리고 명주의 김순식이 결정적으로 활약했다.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유민까지 포용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이루었다.
940
[개태사 완공]
불교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충청도에 개태사를 완성시켰다.
이외에도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탑을 설치했으며, 무차대회를 개최하여 신분, 귀천, 지역에 상관없이 불법을 듣게 했다.
왕건은 불교를 공식 국교로 삼고 숭불정책을 적극 실시하여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꾀했다. 이는 국민들의 사상적 단결을 이끌어내는 데 효과를 발휘했다.
942
[거란과의 수교 거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화친을 요청하며 낙타를 선물했으나, 왕건은 거란을 형제국인 발해와의 맹약을 어긴 신의 없는 나라로 규정하고 사신을 귀양 보내고 낙타를 굶겨 죽이는 강경한 태도로 수교를 거부했다.
왕건은 유언을 통해서도 거란의 풍습을 따르지 말고 경계할 것을 명했다. 또한 중국의 오대 십국에 꾸준히 사절을 파견하며 거란과 여진족을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943
[태조 왕건 승하]
임종을 눈앞에 두고 고명대신 박술희에게 후세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을 '훈요 10조'를 유훈으로 남겼다.
향년 67세로 붕어하며 고려의 기틀을 다진 생애를 마감했다.
훈요 10조는 불교 진흥, 서경 중시, 연등회와 팔관회 유지, 상벌 공정, 백성 신망 유지 등 고려 왕조의 통치 원칙을 담고 있다. 왕건은 혜종의 외가 세력이 미약한 점을 우려해 박술희에게 혜종의 앞날을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