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난
내전, 종교 전쟁, 반란, 사회 변동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07:49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중국 대륙을 뒤흔든 대규모 내전입니다. 기독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태평천국이 청나라에 대항하여 발생했으며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내전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최대 7천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발생시키며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결국 청나라가 승리했으나 이후 중국 근대사의 흐름을 바꾼 중대한 사건입니다.
1847
[배상제회 창설]
홍수전의 측근 풍운산이 광서성 계평현 금전촌에 태평천국의 전신인 배상제회를 설립했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등 현세 이익을 강조하며 숯구이, 빈농, 광부 등 사회 하층민 약 3천 명의 신자를 모았습니다.
조직 확대 과정에서 공권력과 마찰을 겪으며 홍수전은 종교 활동에서 정치 혁명으로 나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1850
[금전촌 단영 조직]
배상제회는 금전촌에 집결하여 '단영'이라는 사조직을 결성했습니다.
남녀를 엄격히 분리하여 남영과 여영에 입영시켰으며, 총과 대포 등 무기를 은밀히 제조하며 혁명을 준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 군대 및 자경단과의 몸싸움이 발생하며 긴장이 고조됩니다.
1851
[금전봉기 발발]
청나라 정규군인 녹영군이 기독교계 신흥종교인 배상제회를 공격했습니다.
교주 홍수전은 자신이 야훼의 둘째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라 주장하며, 금전촌에 집결한 1~2만 명의 신자들이 몇 배나 많은 청군을 물리치며 태평천국 난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태평천국 건국 선포]
배상제회는 금전촌에서 '태평천국'으로 국호를 정식 선포하고 홍수전이 천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영안에 머무르며 관제와 관작 등을 결정하며 국가의 체계를 갖추었고, 천왕 아래 동왕 양수청, 서왕 소조귀, 남왕 풍운산,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 등 5명의 핵심 간부를 임명했습니다.
1852
[핵심 지도부 전사]
북상을 계속하던 태평천국군은 1852년 6월 남왕 풍운산이 상강에서 전사하고, 9월에는 장사를 공략하던 서왕 소조귀마저 전사하며 핵심 지도부를 잃었습니다.
이 두 왕의 전사는 태평천국 내부의 권력 관계를 뒤흔들었으며, 이후 '천경사변'의 주요 원인이 됩니다.
1853
[난징 함락 및 천경 수립]
태평천국군은 오랜 원정 끝에 청나라의 중요 도시 강녕(남경)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곳을 천경(天京)으로 개명하고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아, 공식적인 왕조를 수립함으로써 본격적인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1855
[북벌군 전멸]
1853년 5월 북경 함락을 목표로 출발했던 태평천국의 북벌군은 1855년 3월, 청나라 몽골계 맹장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의 맹공 앞에 전멸했습니다.
이는 태평천국이 북경을 신속히 공략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1856
[청군 대영 괴멸 및 세력 확장]
서정군은 1856년 4월부터 6월까지 청나라의 강북대영과 강남대영을 괴멸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태평천국은 안휘성 중남부, 강서성, 호남성 동부 등을 지배하며 세력을 공고히 하고 한동안 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천경사변 발생]
1856년 9월 새벽, 양수청의 독재에 반발한 천왕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를 선동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변으로 동왕 양수청 일족과 부하 약 4만 명이 학살되었고, 이에 분노한 익왕 석달개의 요구로 위창휘마저 숙청됩니다.
이 사건으로 태평천국의 초기 핵심 지도부가 붕괴되며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습니다.
천경사변은 태평천국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기준점이 될 만큼 중대한 사건입니다. 홍수전과 양수청 두 사람에 의해 운영되던 전기 태평천국은 양수청의 '천부하범' 주장으로 홍수전의 발언력이 약화되자, 홍수전이 양수청을 제거하기로 결심하면서 발생했습니다. 이후 석달개가 홍수전의 측근 중용 방침에 실망하여 천경을 이탈하면서, 금전촌 궐기 당시의 주요 인물은 홍수전 혼자만 남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태평천국은 지배 영역이 안정되자마자 내분으로 약화되는 길을 걷게 됩니다.
1858
[삼하 전투 승리]
천경사변으로 약화된 태평천국은 1858년 5월 이후 증국번의 상군에 의해 천경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젊은 장군 이수성, 진옥성 등의 활약으로 안휘성 삼하 전투에서 상군을 대패시키고 전세를 역전시키며 다시 한번 태평천국의 세력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홍수전은 이들을 새로운 핵심 지도부로 임명합니다.
1859
[간왕 홍인간의 개혁]
홍콩에서 서구 문물을 경험한 홍인간이 천경에 합류하여 간왕에 봉해지고 내정을 맡았습니다.
그는 《자정신편》을 통해 철도, 기선 건설, 광산 개발, 신문 발행 등 서구식 개혁을 제안했지만, 경험이 부족한 다른 지도부들의 이해 부족으로 결국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개혁안은 훗날 청나라 양무운동의 밑거름이 됩니다.
1860
[강남대영 격파]
1860년 2월부터 5월까지, 간왕 홍인간, 충왕 이수성, 영왕 진옥성 등으로 구성된 태평천국 군대가 서로 호응하여 청나라의 제2차 강남대영을 격파했습니다.
이 승리로 태평천국은 강남 지역을 다시 제패하며 전력을 과시했습니다.
[외국 용병부대 출현 및 서구 열강 개입]
청나라와 상해 상인들이 자금을 모아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외국인 용병 부대 '양창대'를 창설했습니다.
이후 '상승군'으로 개명하며 중국 최초의 서양식 군대로 발전했습니다.
1860년 10월 베이징 조약 이후 서구 열강은 명확하게 태평천국을 적대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이는 태평천국에 큰 위협이 됩니다.
상승군은 미국인 프레드릭 워드 지휘 아래 창설되었고, 그의 전사 후 영국인 찰스 고든이 지휘를 맡아 파죽지세로 활약했습니다. 이들의 성공은 청나라 군대 현대화의 중요성을 증명하며 양무운동의 원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1862
[영왕 진옥성 섬멸]
강남 제패를 우선한 이수성 군의 불참으로, 장강 중류에서 상군과 사투를 벌이던 영왕 진옥성 군은 고립되어 섬멸당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이는 태평천국 내부의 파벌 갈등과 전략적 불일치가 심각한 패배로 이어진 사례로, 태평천국 말기 증상을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1864
[천왕 홍수전 병사]
1863년 이후 태평천국의 주요 거점들이 연이어 함락되며 수도 천경은 고립되었습니다.
충왕 이수성이 천경 방어를 맡았으나, 극심한 식량난 속에서 천왕 홍수전은 1864년 6월 1일 영양실조로 병사했습니다.
이는 태평천국의 최종 몰락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천경 함락 및 난 종결]
1864년 7월 19일, 증국전이 이끄는 상군의 맹공에 의해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이 함락되면서 14년간 중국 대륙을 뒤흔들었던 태평천국의 난이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점령 후 성내 20만 명이 학살당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으며, 충왕 이수성마저 사로잡혀 처형되면서 태평천국의 명맥은 완전히 끊겼습니다.
이수성은 홍수전의 어린 아들 홍천귀복을 데리고 천경을 탈출했으나, 홍천귀복은 1864년 10월 25일 사로잡혔습니다. 이후 태평천국 잔당들은 산발적인 저항을 이어갔지만, 1866년 마지막 지도자 왕해양이 토벌되면서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장수들이 중국 정치계의 거물로 성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