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해양 사고, 선박 침몰, 대형 재난, 역사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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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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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년 사우샘프턴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세계 최대 규모 여객선 타이타닉호 침몰. - 빙산 충돌로 2 224명 중 1 500명 이상 사망 역사상 최악의 평시 해양 참사. - 구명정 부족 통신 부실 대피 미흡 등 복합적인 원인이 비극을 초래. - 국제해상인명안전조약(SOLAS) 채택 등 해양 안전 규제 강화의 중요한 계기 마련. - 문명 진보에 대한 낙관적 신뢰에 큰 충격을 주며 전 세계에 경종을 울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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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비극의 수습과 장례]

며칠 후 시신 인수를 위해 배들이 파견되어 총 328구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이 중 119구는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또는 선원 시신으로 영국 해양 전통에 따라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나머지 시신은 캐나다 핼리팩스에 매장되었으며, 악단장 월리스 하틀리, 존 하퍼 목사 등 유명 인사들의 시신은 각자의 고향이나 연고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스미스 선장, 설계자 토마스 앤드류스, 기관장 조지프 G. 벨을 포함한 많은 기관사, 화부, 전기 수리 노동자들은 배의 전기를 작동시키며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또한, 구명보트를 거부하고 신사답게 죽음을 택한 노부부 스트라우스,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 그리고 혼란 속에서 승객들을 위로한 토머스 바일스 신부 등 수많은 의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첫 항해 시작]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E·J·스미스 선장과 승무원·승객을 합쳐 2,200명 이상의 인원을 태우고 뉴욕으로 향하는 첫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첫 출항부터 승무원들에게 쌍안경 보관함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는 등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프랑스 셰르부르와 아일랜드 퀸즈 타운에 기항한 다음,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대장정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당시 쌍안경 부재가 빙산 발견을 늦춘 주요 원인으로 의심되었으나, 사고 당시 악천후로 육안 식별이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분석됩니다.

[잇따른 빙산 경고]

오전 9시부터 캐로니아호의 경고를 시작으로 하루에만 여섯 차례 빙산 경고를 받았습니다.

스미스 선장은 일부 경고를 받고 항로를 변경했으나, 타이타닉호 통신기사는 승객의 사적인 전보를 우선 처리하느라 중요한 빙산 경고들을 무전실 밖으로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통신기사는 선원 소속이 아닌 전신기술 회사 소속으로, 승객 전보가 최우선 업무였습니다. 오후 1시 42분에 발틱호가 중계한 아테니아호의 경고는 스미스 선장에게 전달되어 항로 변경 지시로 이어졌으나, 이후 오후 1시 45분, 7시 30분, 9시 40분에 받은 경고들은 무전실 밖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닥쳐!" 마지막 경고 차단]

밤 10시 30분, 인근 캘리포니안호가 빙산으로 운항을 멈추고 경고를 보냈으나, 타이타닉호 통신기사 잭 필립스는 바쁜 개인 전보 업무 중이라며 "닥쳐! 지금 케이프 레이스와 일하는 중이다"라고 응답하며 통신을 차단했습니다.

인근에 얼음이 존재함을 인지했음에도 배는 시속 22노트(41km/h)의 빠른 속도를 유지했습니다.

선원들이 빙산 위험을 인지했음에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운항한 것이 침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빠른 항속이 일반적이었던 시대였습니다.

[운명의 빙산 충돌]

밤 11시 40분, 견시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미터에서 높이 20미터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습니다.

급히 조타실에 보고하자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은 즉시 좌현전타와 전속 후진을 명령했지만, 배의 거대한 회전반경과 가까운 거리 탓에 충분히 피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타이타닉호 우현 측면이 빙산과 충돌, 수면 아래 약 90미터가 손상되며 뱃머리로부터 5개 구획에 대량의 해수가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뱃머리로부터 4개 구획까지 물이 차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나, 5개 구획 이상에 물이 차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또한, 격벽이 위쪽 E갑판과 연결된 구조여서 배가 기울자 해수가 격벽을 넘어 다른 구획으로 흘러들어가 침몰을 가속화했습니다. 충돌 당시 아랫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꼈으나, 윗쪽 승객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일부는 얼음 조각으로 축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첫 조난 신호 발신]

스미스 선장은 배수 펌프로 침몰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임을 깨닫고, 오전 12시 05분 조난 신호를 발신하며 인근 선박에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사고 지점으로부터 약 48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RMS 카르파티아가 조난 신호에 응답해 전속력으로 타이타닉호가 있는 사고 해역으로 향했습니다.

더욱 가까이 위치했던 SS 캘리포니안호는 무전사가 잠들었던 탓에 타이타닉호의 조난 신호를 수신하지 못했습니다. 캘리포니안호 선장은 몇 시간 전 빙산 위험을 인지하고 배를 정박한 상태였습니다.

[구명보트 대피 시작]

오전 12시 45분, 구명보트 7호가 정원 65명 중 28명만을 태우고 처음으로 하선했습니다.

승객 대부분은 세계 최대 규모의 강철선인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고, 조그만 보트보다 배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 승선을 주저했습니다.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는 "여자와 아이들만"을 태울 것을 고수하며 남성 승객의 탑승을 엄격히 제한했습니다.

당시 영국 상무성 규정은 여객선이 정원만큼 구명보트를 갖출 필요가 없었으며, 타이타닉호는 탑승객의 절반만 수용 가능한 구명보트 1,178명분을 준비했습니다. 게다가 급작스러운 사고로 많은 구명보트가 정원을 채우지 못한 채 하선되었습니다. 배에서 가장 부자였던 존 제이콥 애스터도 아내를 태운 후 자신도 타려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아비규환, 침몰 가속화]

오전 1시 30분경 배의 앞머리가 잠기기 시작하면서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구명보트 14호 하선 시에는 공황에 빠진 승객들이 필사적으로 타려 몰려들자 5등 항해사 로우가 혼란을 저지하기 위해 허공에 권총 경고 사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화이트 스타 라인 사장이자 선주였던 브루스 이스메이는 접이식 보트 C에 몰래 탑승하여 훗날 대중의 비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기관부 선원들은 침몰 직전까지 전력 공급과 배수 펌프 가동을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우편 직원들은 침수하는 우편물 저장고에서 우편물을 건지려 노력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습니다. 구명보트 13호는 하선 중 밧줄 문제로 15호 위에 깔릴 뻔했으나, 프레드릭 바렛을 포함한 선원들이 아슬아슬하게 밧줄을 잘라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마지막 구명보트]

오전 2시 5분, 접이식 보트 D가 떠나며 2개의 비상용 접이식 보트를 제외한 마지막 구명보트가 하선했습니다.

스미스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제 살길을 찾으라"고 선포했으며, 배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선미로 달려가거나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메이시 백화점 소유주 스트라우스 부부,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 등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습니다.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 좋게 배와 운명을 함께 했으며, 구겐하임은 현지처와 하인을 보트에 태운 뒤 자신은 턱시도로 갈아입고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신사답게 갈 것"이라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의 마지막 선택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악단의 마지막 연주]

오전 2시 10분,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랐을 때,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하는 악단이 구슬픈 찬송가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배가 침몰하기 고작 10분 전까지 혼란에 빠진 승객들을 위로하기 위해 연주를 계속하다가 비극적으로 모두 사망했습니다.

선장 스미스는 확성기를 쥔 채 선교에 남아 배와 함께 가라앉았고, 배의 설계자 토마스 앤드류스는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응시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습니다.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리드는 침수되는 통신실에서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탈출했습니다.

[정전과 선체 절단]

오전 2시 18분, 보일러실이 침수하면서 잠깐 깜빡이던 불빛이 완전히 정전되었습니다.

바닷물의 엄청난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는 2번째와 3번째 굴뚝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 굉음과 함께 두 동강으로 쪼개졌습니다.

동시에 굴뚝 3과 4가 부러졌습니다.

굴뚝 1이 선교루 쪽으로 쓰러지며 존 제이콥 애스터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을 덮쳤고, 그 여파로 생긴 파도가 접이식 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덮치기도 했습니다. 이후 침수되면서 굴뚝 2도 쓰러지는 등 배는 급속도로 파괴되었습니다.

[타이타닉, 대서양에 잠들다]

운명의 시각 오전 2시 20분, 타이타닉호의 선미 부분이 그대로 사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북대서양 한복판으로 완전히 침몰했습니다.

이로써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평시 해양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될 비극적인 순간이 막을 내렸습니다.

배에 남아 있던 1,500여명의 승객들은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버려졌습니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 직각에 가깝게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23도 정도의 각도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명보트에 탄 생존자들은 차가운 바다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과 아우성을 들었지만, 대부분의 보트는 침몰 현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만이 유일하게 지원자들과 함께 돌아가 4명의 생존자를 추가로 구조했습니다.

[RMS 카르파티아호, 생존자 구조]

타이타닉호 침몰 약 1시간 30분 후인 새벽 3시 55분, RMS 카르파티아호가 사고 해역에 도착하여 구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충돌 약 9시간 30분 후인 오전 9시 15분까지 710명의 생존자 모두를 구조했으며, 이들에게 따뜻한 커피, 담요,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구조된 생존자 중 5명은 보트 안에서 사망했습니다.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저체온증이나 심장마비로 30분 안에 사망했습니다. 카르파티아호는 추가 생존자 수색을 시도했으나 대부분의 시신은 해류에 쓸려갔고, 결국 캘리포니안호에 수색을 인계한 뒤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1914

[해양 안전 규제 대폭 강화]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는 당시 문명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 신뢰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고를 계기로 1914년 1월,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회의'가 열려 국제해상인명안전조약(SOLAS)이 채택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구명보트 구비 기준을 배의 총 정원으로 변경하고 선박의 무선 장치 배치를 의무화하는 등 해양 안전 규제를 대폭 강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 상무성은 구명보트 구비 기준을 배의 총 정원으로 변경했으며, 이후 타이타닉의 자매선 올림픽호와 브리타닉호도 구명보트를 늘렸습니다. 미국에서는 선박의 무선 장치 배치가 의무화되어 무선 통신 기계 보급이 가속화되었습니다.

1985

[침몰 73년 만의 잔해 발견]

미국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가 뉴펀들랜드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최초로 타이타닉호 잔해를 심해카메라로 촬영했습니다.

수심 약 4,000미터에서 발견된 선체는 두 동강 난 채 약 600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선수 부분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했으나 선미는 심하게 훼손되어 잔해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발라드는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배의 모든 연돌은 침몰 과정에서 유실되었고, 망루는 선교를 뭉개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옷은 발견되었으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조류에 흩어졌거나 바닷물의 유기물에 녹아 없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93

[침몰 원인에 대한 새 연구]

미국 조선 전문가 윌리엄 가츠케가 타이타닉호 침몰 참사를 '인재(人災)'로 해석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건져 올린 선체 파편을 연구한 결과, 충돌 시 휘지 않고 부서지는 질 낮은 강철판을 사용한 것이 침몰을 가속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사용된 강철은 최고급이었으나, 제철 기술의 한계로 황 함유량이 높아 낮은 온도에서 취약했습니다. 현재 타이타닉호의 잔해는 '할로모나스 타이타닉'이라는 박테리아균에 의해 부식되고 있으며, 2030년 이후에는 잔해를 보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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