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내전
내전, 전쟁, 분쟁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05:03
1967년부터 1991년까지 20여 년간 이어진 캄보디아의 비극적인 내전입니다. 크메르 공화국 크메르 루주 베트남 등 국내외 세력이 복잡하게 얽혀 참혹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냉전과 베트남 전쟁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특히 크메르 루주의 학살과 강제 이주는 킬링필드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남겼습니다. 파리 평화 협정을 통해 마침내 종식되고 평화를 되찾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1949
[프랑스로부터 독립 인정]
캄보디아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으며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통치 아래 들어섰으나, 왕제에 대항하는 국내 파벌 다툼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맞았다.
이는 이후 내전의 배경이 되었다.
1965
[시아누크, 대미 단교 선언]
미국이 북 베트남을 공습(베트남 전쟁 확대)하자,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정부는 미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이로써 캄보디아는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베트콩)의 거점을 제공하며 미국의 친미 정권 수립 필요성을 키웠다.
1967
[캄보디아 내전 발발]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공산군(크메르 루주 등)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론 놀의 크메르 공화국 정부군 간의 충돌로 캄보디아 내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20세기 후반 캄보디아의 비극적인 역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0
[론 놀의 친미 쿠데타]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해외 순방 중이던 아침, 론 놀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로 하원에서 시아누크의 하야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론 놀은 수상으로 취임 후 캄보디아를 크메르 공화국으로 선포하며 친미 정권을 수립했다.
[농민 시위, 군대와 충돌]
론 놀의 쿠데타 직후, 약 4만 명의 농민들이 시아누크 국왕의 복권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나, 군대와 충돌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국내 저항 세력의 등장을 알렸다.
[론 놀, 미군 침공 허용]
론 놀은 미군에 자국 침공을 허용하여, 베트남 전쟁의 호치민 루트를 파괴하기 위한 공습이 농촌 지역에 무차별적으로 실행되었다.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농민이 희생되었고, 공산주의 세력인 크메르 루주의 급격한 성장을 초래했다.
또한, 론 놀은 격렬한 반베트남 캠페인을 벌여 캄보디아 내 베트남계 주민을 박해하고 학살하여 20만 명이 베트남으로 집단 귀환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내전 격화, 폴 포트 등장]
중국에 머물던 시아누크 국왕을 모택동주의에 심취한 폴 포트가 지휘하는 크메르 루주가 도와 옹립하며, 론 놀 정권과의 본격적인 내전이 발발했다.
이는 캄보디아 내전의 주요 세력들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2
[미국, 캄보디아 직접 개입]
미국이 론 놀 정권 지원을 위해 남베트남 파견군 일부를 캄보디아에 침공시키며 내전에 직접 개입했다.
이로 인해 베트남 전쟁은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번지는 결과를 낳았다.
[론 놀, 군사 독재 선언]
론 놀은 군사 독재체제를 선언하며 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중국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 루주의 공세는 계속되었고, 그의 독재는 정부의 불안정을 감추지 못했다.
1973
[론 놀, 독재 헌법 공포]
론 놀은 독재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제 신헌법을 공포하며 정권 기반을 더욱 굳건히 하려 했다.
하지만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론 놀 정권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1975
[론 놀 망명, 프놈펜 함락]
크메르 루주의 맹공에 밀린 론 놀은 결국 하와이로 망명했다.
같은 달 사이공이 함락되며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크메르 루주가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여 캄보디아 내전의 첫 번째 단계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
[크메르 루주, 프놈펜 입성]
캄보디아 내전의 공식적인 종전일로 기록된 이날,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가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며 론 놀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는 민주 캄푸챠 정권 수립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학살 중 하나인 '킬링필드'라는 비극적 시대를 여는 서막이 되었다.
1976
[민주 캄푸챠 수립, 킬링필드 시작]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 민주헌법'을 공포하고 국명을 '민주 캄푸챠'로 개칭했다.
이들은 도시 주민의 강제 집단이주를 단행하며 자본가, 기술자, 지식인 등을 박해하고 처형하는 킬링필드를 시작하여 최소 70만 명에서 최대 3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1978
[폴 포트, 베트남과 단교]
폴 포트 정권이 베트남 영내 농촌을 공격하며 베트남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당시 베트남은 소련과, 폴 포트 정권은 중국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어 중소 갈등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양국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크메르 루주 내부 학살]
베트남 접경 동부군 관할구역의 크메르 루주 간부와 병사들이 반란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폴 포트파로부터 공격을 받아 대량 처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부지구 난민들이 베트남으로 대량 유입되었다.
1979
[베트남군, 프놈펜 공략]
베트남군이 캄프챠 구국민족통일전선(KNUFNS)을 앞세워 프놈펜을 공략하며 크메르 루주 체제를 붕괴시켰다.
폴 포트 일파는 태국 국경 산악 지대로 쫓겨났고, 친베트남계 헹 삼린 정권이 수립되었다.
[중월전쟁 발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군이 베트남을 공격했다(중월전쟁).
베트남군은 소련의 지원과 풍부한 전쟁 경험으로 중국군을 격파하고 한 달 만에 국경 밖으로 물리치며 승리했다.
1982
[민주 캄보디아 성립]
반격을 모색하던 크메르 루주, 시아누크 국왕파, 론 놀파 등 반베트남 3계파가 연합정부를 구성하고 '민주 캄보디아'를 성립시키며 캄보디아가 완전히 양분되었다.
이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헹 삼린 정권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1983
[베트남, 철수 결의 불이행]
인도차이나 3국 정상회담에서 베트남군의 부분적 철수가 결의되었으나, 베트남은 이를 따르지 않고 이듬 달 폴 포트파의 거점을 공격하는 등 내전 개입을 지속했다.
1984
[ASEAN, 베트남 비판]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 외상 회담에서 베트남의 캄보디아 주둔군을 비판하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국제사회는 베트남의 지속적인 개입에 우려를 표명하며 평화적인 해결을 촉구했다.
1985
[베트남, 반군 거점 제압]
베트남군이 대규모 공세를 펼쳐 반베트남 3파의 민주 캄보디아 거점인 말레이 산과 시아누크 국왕파의 거점을 제압하면서 민주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력이 거의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내전의 양상은 베트남의 우위로 기울었다.
1986
[베트남, 도이모이 노선 채택]
베트남의 레 두안 서기장 사망 후 후계자 츄 온 틴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모방한 '도이모이 노선'을 채택했다.
이는 경제 개방과 국제 협력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캄보디아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
1988
[베트남군, 캄보디아 철수 시작]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캄보디아 주둔군 철수를 시작했다.
이는 베트남의 국제 관계 개선 노력의 일환이었으며, 캄보디아 평화로 가는 중요한 단계였다.
1989
[베트남군, 캄보디아 철수 완료]
베트남군이 캄보디아 주둔군 철수를 완료했다.
베트남이라는 배경을 잃은 훈센 정권의 세력이 약화되고, 캄보디아는 국제사회의 중재로 평화 공존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1991
[파리 평화 협정 체결]
프랑스 파리에서 '캄보디아 평화 파리 국제 회의'가 개최되어 국내 4파 간의 최종 합의문이 도출되었다.
이로써 20년에 걸친 캄보디아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고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
1992
[UNTAC 평화유지 활동 시작]
유엔 캄보디아 잠정 통치기구(UNTAC)가 캄보디아에서 평화유지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내전 종식 후 캄보디아의 안정과 민주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1993
[시아누크 국왕 재즉위]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거 이후, 제헌의회가 신헌법을 공포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노로돔 시아누크가 국왕에 다시 즉위하며 캄보디아는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1994
[마지막 쿠데타 미수 사건]
캄보디아에서 쿠데타 미수 사건이 발생했지만, 이를 마지막으로 캄보디아 국내는 대체로 안정을 되찾으며 긴 내전의 여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98
[폴 포트 사망]
캄보디아 내전과 킬링필드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던 폴 포트가 변경 지역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크메르 루주 세력의 잔존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캄보디아의 완전한 안정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