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롤루스 대제

왕족, 황제, 군주, 정복자, 문화 부흥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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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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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황제, 군주, 정복자, 문화 부흥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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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럽 대부분을 통일하고 프랑크 왕국을 대제국으로 확장한 위대한 군주. -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최초로 서로마 황제로 즉위하여 유럽의 아버지로 불림. -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일으켜 유럽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 -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국가 형성의 기원이 되었으며 기록적인 업적으로 후대에 영원히 기억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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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

[카롤루스 대제 탄생]

프랑크 왕국의 왈롱나 주 에르스탈에서 피핀 3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정확한 연도는 740년, 742년, 747년 등 여러 설이 존재한다.

어린 시절부터 부왕의 권력 쟁취 과정을 목격하며 강한 의지를 키웠다.

751

[아버지 피핀 3세 즉위]

카롤루스의 아버지 피핀 3세가 교황 자카리아의 승인을 받아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군주를 폐위하고 프랑크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은 카롤루스에게 강력한 왕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754

[교황 스테파노 2세 영접]

롬바르드족의 공격으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프랑크 왕국을 방문한 교황 스테파노 2세를 국왕의 장자 자격으로 영접했다.

교황은 피핀 3세와 카롤루스 부자에게 왕호를 수여하며, 롬바르드족 축출 약속을 받아냈다.

768

[프랑크 왕국 공동 통치]

아버지 피핀 3세가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동생 카를로만 2세와 왕국을 분할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즉위 첫해 아키텐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강력한 통치력을 선보였다.

771

[동생 사망, 단독 통치]

동생 카를로만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카롤루스는 프랑크 왕국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이로써 왕국 내 분쟁 위험을 해소하고,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교황에게 영토 일부를 기증하는 등 영향력을 확대했다.

772

[작센 정벌 시작]

니더작센과 베스트팔렌 지방에 거주하던 작센족을 공격하며 정복 전쟁을 시작했다.

804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작센족을 프랑크 왕국에 완전히 복속시키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중요한 과정이 되었다.

774

[랑고바르드 왕국 정복]

자신을 배신하고 동생 카를로만의 편을 들었던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 데시데리우스를 폐위시키고 북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켰다.

이탈리아 정복은 그의 영토 확장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778

[론세스바예스 전투 참패]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가 통치하던 히스파니아 원정 중 피레네산맥을 넘어 퇴각하던 프랑크 군대가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참패했다.

외조카 롤랑이 전사한 이 사건은 후에 무훈시 《롤랑의 노래》의 소재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카롤루스는 전투 자체를 함구하게 하여 오랫동안 은폐하였으며, 802년까지 히스파니아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781

[아들 왕위 수여 및 인정]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에게 두 아들 피피노와 루트비히에게 각각 롬바르드와 아키텐의 왕위를 수여하도록 축성케 했다.

동로마 제국의 황태후 이레네로부터 이탈리아 지배를 사실상 승인받으며 권위를 높였다.

788

[바이에른 정복 및 병합]

튀링겐과 바이에른을 정벌하고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를 폐위시킴으로써 라인강 동부에 남아있던 게르만족 영토를 손에 넣었다.

이로써 서유럽의 정치적 통일을 더욱 공고히 했다.

794

[아헨 수도 지정 및 문화 부흥]

독일 북서부 아헨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짓고 이곳을 사실상의 수도로 정했다.

고대 로마 제국의 학예 부흥을 선언하며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시작, 왕실 도서관과 궁정 학교를 설립하고 학자들을 초빙했다.

799

[교황 레오 3세 피신 지원]

반대파의 습격을 받은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의 궁정으로 피신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카롤루스는 교황을 보호하고 호위 병력을 붙여 로마로 되돌려보내며 교황과의 유대를 강화했다.

800

[교황과 로마 방문]

교황 레오 3세와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의 반대파를 제거하고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이는 로마 제국 황제 즉위를 위한 사전 단계이자 프랑크 왕국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서로마 황제 즉위 (세계 최초)]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로 대관되었다.

이는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최초'''의 서로마 황제 즉위로, 서유럽의 정치적·종교적 이상을 제시하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동로마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를 적임자로 선택하여 이루어진 일이다. 동로마 제국은 즉위를 거부했으나, 812년 동로마 황제 미카엘 1세가 그를 황제로 승인했다.

801

[바르셀로나 함락]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가 군사를 이끌고 무어인과 대치한 끝에 바르셀로나를 함락시켰다.

이는 히스파니아 변경의 무어인 약탈과 소란에 대한 프랑크 왕국의 강력한 대응이었다.

803

[아바르족 및 크로아티아 복속]

오랫동안 공략해온 아바르족의 칸 조던이 항복하고 카롤루스의 신하임을 맹세했다.

크로아티아의 부족장들도 자발적으로 귀순해오자, 비체슬라프를 크로아티아 공작으로 임명하여 자치권을 인정했다.

812

[동로마 제국 황제 승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엘 1세 랑가베가 카롤루스를 '프랑크인의 황제'로 승인했다.

이는 조건부 승인이었지만, 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813

[후계자 루트비히 1세 확정]

연이어 아들들을 잃은 카롤루스는 아헨 법정에서 살아남은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 1세를 합법적인 후계자로 선언하고 공동 황제로 대관식을 거행하며 제국의 미래를 확정했다.

814

[카롤루스 대제 사망]

아헨 궁전에서 늑막염 및 우울증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 이후 프랑크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지만, 그의 업적은 중세 유럽과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 작품에 영감을 주며 영원히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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