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중국 왕조, 제국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03:32
만주족이 세운 중국 최후의 통일 왕조. 강건성세로 불리는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19세기 서구 열강의 침략과 내부 혼란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아편 전쟁 태평천국의 난 청일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거쳐 1912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하며 2천년 중국 군주제의 막을 내렸다.
- 누르하치, 만주족 통일 기반 마련
- 누르하치, 후금 건국
- 누르하치, 첫 패배와 죽음
- 만주족이라는 이름으로 통합
- 홍타이지, 청나라 건국 및 황제 즉위
- 홍타이지 서거 및 순치제 즉위
- 한족 통치 위한 '십종십부종' 시행
- 이자성의 난, 명나라 멸망
- 산해관 전투 승리, 베이징 점령
- 순치제, 중국의 천자로 선포
- 전국에 강압적 변발령 선포
- 어린 강희제, 오보이 숙청
- 삼번의 난 발발
- 강희제, 삼번의 난 진압 성공
- 정씨 왕국 항복, 대만 평정
- 해금령 해제, 대외무역 재개
-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 옹정제, 군기처 설치
- 강희제 서거 및 옹정제 즉위
-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 체결
- 옹정제 서거 및 건륭제 즉위
- 광동 체제 설립
- 영국, 자유무역 요구하나 거절당함
- 백련교도의 난 발발, 청나라 쇠퇴 시작
- 임칙서, 아편 대량 폐기로 영국 자극
- 제1차 아편 전쟁 발발
- 난징 조약 체결, 불평등 조약의 시작
- 태평천국의 난 발발, 최대 내전
- 제2차 아편 전쟁 발발
- 굴욕적인 톈진 조약 체결
- 영-프 연합군, 베이징 점령 및 원명원 약탈
- 동치중흥 시작, 총리각국사무아문 창설
- 태평천국의 난 진압
- 영국에 최초 공사 파견
- 청프 전쟁 발발
- 청프 전쟁 종결, 톈진 조약(1885) 체결
- 제1차 청일전쟁 발발
-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타이완 할양
- 열강들의 영토 강제 할양 요구
- 광서제, 무술변법 시도하나 실패
- 의화단 운동 발발
- 8개국 연합군, 베이징 침략 및 신축조약
- 서태후, 청말신정 개혁 추진
- 2살 푸이, 선통제로 즉위
- 광서제 독살 사망
- 우창 봉기 발발, 신해혁명 시작
- 선통제 퇴위, 청나라 공식 멸망
1500
[누르하치, 만주족 통일 기반 마련]
16세기 후반, 천명제 누르하치가 북원의 옥새를 발견하며 몽골족을 만주족 군대에 편입시키고 팔기제를 창설했습니다.
이는 분열된 만주족을 하나로 모으는 초석이 되었고, 이후 후금 건국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616
[누르하치, 후금 건국]
분열되어 있던 만주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1616년에 '대금'이라는 국호로 후금을 건국하고 스스로 여진족의 대칸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청나라의 전신이 탄생했습니다.
1618
[칠대한 선포, 명나라와 전쟁 시작]
후금 건국 2년 후,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통치를 거부하고 '칠대한'을 선포하며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국력이 쇠퇴하던 명나라는 누르하치에게 속절없이 패배하며 영토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1621
[후금, 수도를 라오양으로 천도]
누르하치는 명나라에서 빼앗은 도시 라오양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이는 후금이 주변 부족들과 더욱 원활하게 소통하고 명나라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연계를 넓히기 위함이었습니다.
1625
[후금, 수도를 선양으로 천도]
후금은 1625년에 수도를 선양으로 다시 옮겼습니다.
이는 만주족이 몽골 평원의 몽골인들과 연계하고 명나라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협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1626
[누르하치, 첫 패배와 죽음]
만리장성 이북의 절대적 지배자로 떠올랐던 누르하치는 1626년 1월 닝위안현에서 명나라 명장 원숭환에게 첫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후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아들 홍타이지가 뒤를 이었습니다.
1627
[홍타이지, 명나라에 연달아 패배]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유능한 군사 사령관이었으나, 집권 초기에 명나라의 명장 원숭환에게 연달아 패배를 겪었습니다.
이는 명나라가 서양에서 수입한 포르투갈 산 대포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634
[홍타이지, 서양식 포병 창설]
기술적,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홍타이지는 1634년에 기술자들을 포섭하여 유럽식 대포를 다룰 수 있는 새로운 포병을 창설했습니다.
이는 후금 군사력 강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635
[만주족이라는 이름으로 통합]
홍타이지는 분열되어 있던 여진족들에게 하나의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1635년 11월에 공식적으로 '만주족'의 통합을 선포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여진족은 스스로를 만주족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636
[홍타이지, 청나라 건국 및 황제 즉위]
홍타이지는 내몽골의 링단 칸을 굴복시킨 후, 1636년 4월 선양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후금의 칸을 새로운 '청나라'의 천자로 옹립했습니다.
이로써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으며, 원나라의 옥새를 전달받아 원나라의 후예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1637
[조선인, 팔기군에 편입]
홍타이지는 명나라 도시들을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1637년에는 조선인들도 팔기군에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1640년에서 1642년까지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643
[홍타이지 서거 및 순치제 즉위]
홍타이지가 1643년 9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귀족 회의를 통해 5살의 어린 아들 순치제가 2대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의 이복형제 도르곤이 섭정을 맡아 청나라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부상했습니다.
1644
[한족 통치 위한 '십종십부종' 시행]
청나라가 베이징에 입성한 직후, 도르곤 섭정은 한족 통치를 위해 '십종십부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변발 강요 등 만주족 풍습을 강제하면서도, 한족의 매장 풍습, 불교/도교, 혼인 문화, 문자/언어 등 일부 전통을 허용하여 한족의 저항을 최소화하려는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변발 강요는 한족에게 큰 치욕으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반발을 샀습니다.
십종십부종은 ▲남자는 만주족 풍습 따르되, 여자는 따르지 않는다 ▲살아서는 만주족 풍습 따르되, 죽은 후에는 따르지 않는다 ▲양계(陽界)의 일은 만주족을 따르되, 음계(陰界)의 일은 따르지 않는다 ▲관리는 만주족을 따르되, 노비는 따르지 않는다 ▲성인은 만주족을 따르되, 어린아이는 따르지 않는다 ▲유가는 만주족을 따르되, 불교/도교는 따르지 않는다 ▲창기는 만주족을 따르되, 희곡하는 자들은 따르지 않는다 ▲관직 관련은 만주족 따르되, 혼인은 따르지 않는다 ▲국호는 청나라를 따르되, 관직 명칭은 명나라 것을 사용한다 ▲노역이나 세금은 청나라를 따르되, 문자나 언어는 한족 것을 그대로 쓴다는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이자성의 난, 명나라 멸망]
명나라가 내분과 농민 봉기로 흔들리던 중, 1644년 4월 이자성이 이끈 반란군이 명의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고 순 왕조를 세웠습니다.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에서 목숨을 끊으며 명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했습니다.
[산해관 전투 승리, 베이징 점령]
이자성의 반란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사이, 만주족들은 이 기회를 틈타 1644년 5월 27일 산해관 전투에서 이자성의 반란군을 격파했습니다.
이후 청나라 동맹군은 6월 6일 베이징을 점령하며 중국 대륙 통치의 길을 열었습니다.
[순치제, 중국의 천자로 선포]
1644년 10월 30일, 순치제는 자금성에서 중국의 공식적인 천자로 선포되었습니다.
청나라는 빠르게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도망친 잔당들을 추격했습니다.
1645
[전국에 강압적 변발령 선포]
청나라는 산해관 입관 후 이듬 해, 명나라 영토 대부분을 석권하자 전국에 변발령을 선포했습니다.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는 강경한 정책으로 한족들의 극심한 저항과 멸시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진압 과정에서 많은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1661
[내무부, 황실 관리 역할 강화]
순치제 사망 후 강희제 즉위 전, 내무부는 황실 일원과 환관, 궁녀 통제 및 티베트-몽골 무역 관리, 직물 사업 관할 등 역할을 확대하며 황실 행정의 중요 기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자체적인 책 제작 및 소금 상인 세금 징수 등 막대한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1669
[어린 강희제, 오보이 숙청]
8세 어린 나이로 즉위한 강희제는 권력을 장악하려던 보정대신 오보이를 1669년에 숙청하며 황권을 강화했습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노회한 대신을 물리친 이 사건으로 강희제의 평판은 크게 상승했습니다.
1670
[강희제, 유교 가치 전파]
강희제는 1670년대에 황실 칙령을 내려 유교적 가치들을 중국 전역에 널리 퍼뜨리고자 했습니다.
또한 황제의 지원 하에 편찬된 '강희자전'은 만주족들에게 공자와 유교에 대한 배움의 필요성을 일깨웠습니다.
1673
[삼번의 난 발발]
권력을 키우던 3명의 번왕들이 중앙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자, 강희제는 이들에게 하사했던 봉토를 회수하려 했습니다.
이에 1673년, 가장 세력이 컸던 오삼계를 중심으로 번왕들이 반란을 일으켜 약 8년간 지속되는 '삼번의 난'이 시작되었습니다.
1681
[강희제, 삼번의 난 진압 성공]
강희제는 새로 구성된 만주 군대를 이끌고 역습을 감행하여 1681년경, 8년간 이어진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중국 남부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는 황권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683
[정씨 왕국 항복, 대만 평정]
청나라는 1683년, 대만 섬을 지배하던 정성공의 손자 정극상에게서 항복을 받아내며 대만 섬을 평정했습니다.
이로써 청나라에 저항하던 명나라 잔존 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었습니다.
1684
[해금령 해제, 대외무역 재개]
1683년 대만 정씨 왕국이 평정된 후, 청나라는 1684년에 정식으로 바다를 열어 백성들에게 대외무역을 허락했습니다.
광저우 등 4대 해관을 설립하여 무역을 관리하고 관세를 징수했습니다.
1689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강희제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 안정을 꾀했습니다.
이는 청나라가 서구 세력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이후 약 200여 년간 청과 러시아 간의 국경 분쟁을 잠재웠습니다.
1711
[강희자전 편찬 후원]
강희제는 1711년에 한자 사전인 '패문운부'의 편찬을 후원하는 등 유교적 예술과 학문을 장려했습니다.
이는 청나라 통치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문화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활용되었습니다.
1720
[옹정제, 군기처 설치]
옹정제는 1720년대에 '판리군기사무처'(군기처)를 설치하여 황제에게 핵심적인 조언을 주는 기구로 활용했습니다.
이 기구는 군사, 행정 업무를 장악하며 내각대학사를 제치고 청나라의 최고 정무기관으로 떠올랐습니다.
1722
[강희제 서거 및 옹정제 즉위]
1722년 겨울, 청나라 전성기를 이끈 강희제가 사망하고 그의 넷째 아들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했습니다.
옹정제는 강희제 말기부터 쌓여왔던 국가의 병폐를 해결하며 명군으로서의 치세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1723
[그리스도교 불법화]
옹정제는 1723년 그리스도교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선교사들을 대거 추방했습니다.
다만 실질적인 학문을 가진 소수 선교사들은 수도에 머물도록 허락했습니다.
1727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 체결]
옹정제 재위기에 청나라 협상단은 러시아와의 외교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1727년 캬흐타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러시아 상인들에게 무역 이권을 주는 대신 외몽골에 대한 전적 권한을 확보했습니다.
1735
[옹정제 서거 및 건륭제 즉위]
1735년 옹정제가 사망하고 24세의 아들 홍력이 건륭제로 즉위했습니다.
건륭제 시기 청나라는 신장과 몽골 정복, 티베트 통치권 확립 등 수많은 군사적 성공을 거두며 강건성세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1754
[건륭제, 팔기군 만주족 재편]
건륭제는 팔기군 소속 군인들에게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1754년 한족 군인들을 권유 또는 강제로 쫓아냈습니다.
이로써 팔기군은 다시 만주족 중심의 정예군으로 재편되었으며, 만주족 장군들의 위상이 크게 올랐습니다.
1756
[광동 체제 설립]
청나라는 1756년에 '광동 체제'를 설립하여 오직 광저우에서만 유럽인들과의 무역을 허가하고 중국 상인들에게만 독점적인 무역 이권을 부여했습니다.
이는 서양 세력과의 교역을 통제하려는 시도였습니다.
1793
[영국, 자유무역 요구하나 거절당함]
1793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매카트니 경을 필두로 한 사절단을 보내 평등, 호혜주의 기반의 자유무역을 요구했으나, 건륭제는 청나라에 부족한 것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습니다.
이는 이후 서양과의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1796
[백련교도의 난 발발, 청나라 쇠퇴 시작]
건륭제 말기의 부정부패와 인구 과잉으로 인한 사회 혼란 속에서 1796년 백련교가 청나라에 반란을 선포하며 '백련교도의 난'이 발발했습니다.
약 8년간 지속된 이 난은 청나라의 번영에 큰 타격을 입히며 쇠퇴를 가속화했습니다.
1839
[임칙서, 아편 대량 폐기로 영국 자극]
아편 중독과 은 유출로 인한 사회적 병폐가 심각해지자 도광제는 임칙서를 파견하여 아편 무역을 뿌리뽑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임칙서는 1839년 무역항에서 영국 상인과의 합의 없이 아편 상자들을 몰수하여 태워버렸고, 이는 영국과의 '아편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840
[제1차 아편 전쟁 발발]
임칙서의 강경한 아편 단속에 반발한 영국이 1840년 제1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근대식 무장과 전술을 갖춘 영국군에 속절없이 패배하며 국력의 취약성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1842
[난징 조약 체결, 불평등 조약의 시작]
제1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42년 영국과 굴욕적인 난징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상하이, 광저우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고 홍콩 섬은 영국에 99년간 할양되었으며, 이는 청나라 불평등 조약의 시작이자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1850
[태평천국의 난 발발, 최대 내전]
1850년, 시험에 낙방한 유생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은 최악의 기근과 사회 불안 속에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2천만~3천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이 난은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내전으로 기록되며 청나라 국력을 크게 쇠퇴시켰습니다.
1854
[영국, 난징 조약 재검토 요구]
서구 세력은 난징 조약에 만족하지 못하고 1854년 영국 상인들의 강 이용 무역 허용, 베이징 내 영국 대사관 설치 등 새로운 이권 확대를 요구하며 난징 조약의 재검토를 요청했습니다.
1856
[제2차 아편 전쟁 발발]
1856년 청나라 관리들이 영국 국적 배에 허가 없이 승선한 사건을 빌미로 영국은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청나라 군대는 또다시 서구 열강에 패배하며 국력이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1858
[굴욕적인 톈진 조약 체결]
제2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58년 굴욕적인 톈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는 모든 중국 공문서에 한자와 함께 영어를 혼용해야 한다는 내용과 영국 군함의 모든 중국 강 출입 허용 등 불평등한 내용이 담겨있어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1860
[영-프 연합군, 베이징 점령 및 원명원 약탈]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군하여 황제의 여름 궁전인 원명원을 약탈, 방화했습니다.
함풍제는 청더로 피난했고, 베이징에 남은 공충친왕 혁흔이 베이징 조약에 서명하며 러시아에 외만주를 할양하고 베이징에 외국 공사관 주재를 허용하는 등 막대한 이권을 빼앗겼습니다.
1861
[동치중흥 시작, 총리각국사무아문 창설]
5살의 동치제가 즉위하자 좌종당 등 개혁파 관료들은 1861년부터 '동치중흥'이라 불리는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유교 가치 보존과 서구 군사 기술 수용을 목표로, 외교 전담 기구인 '총리각국사무아문'을 창설하는 등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864
[태평천국의 난 진압]
1864년, 증극번의 지휘 아래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되었습니다.
하지만 14년간 지속된 이 대규모 내전은 청 제국에 회복 불가능한 막대한 타격을 입혔으며, 인구 감소와 경제 파탄, 지방 세력 성장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1870
[톈진 교안 발생]
1870년 톈진에서 프랑스 수녀원이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소문으로 반기독교 폭동인 '톈진 교안'이 발생하여 다수의 수녀가 살해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개혁파 관료들과 서구 세력 간의 협력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1876
[영국에 최초 공사 파견]
1876년 10월, 청나라는 국제사회를 보는 시각의 변화에 따라 영국에 처음으로 공사를 파견했습니다.
이는 중국이 근대 서양 국제법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외교적 변혁이었습니다.
1884
[청프 전쟁 발발]
프랑스의 동남아시아 영향력 확대와 청나라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1884년 '청프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에서도 청나라가 패배하며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톈진 조약(1885년)을 맺게 됩니다.
[조선 갑신정변 개입으로 일본과 갈등]
1884년, 일본에서 교육받은 조선 개혁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청나라가 정변 진압을 위해 조선에 군대를 투입하며 일본과 갈등이 커졌습니다.
이는 톈진 조약(1885년)으로 양국 군대가 동시에 철수하기로 합의하며 일단락되었습니다.
1885
[청프 전쟁 종결, 톈진 조약(1885) 체결]
청프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85년 프랑스와 톈진 조약(1885년)을 체결하여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완전한 소유권을 인정했습니다.
이로써 청나라의 동남아시아 영향력은 상실되었습니다.
1894
[제1차 청일전쟁 발발]
조선 문제로 청나라와 일본 간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1894년 제1차 청일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청나라는 '해적이나 사는 야만 국가'로 치부했던 일본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며 양무운동의 한계와 군사적 실패를 드러냈습니다.
1895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타이완 할양]
제1차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하고 타이완섬을 일본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이후 러시아의 삼국 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는 반환되었으나, 청나라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추락했습니다.
1897
[독일 선교사 살해, 자우저우 만 강제 조차]
1897년 11월 1일, 산둥성에서 독일 가톨릭 선교사 2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독일은 이를 빌미로 자오저우 만을 해군력으로 강제 차지하며 중국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을 가속화했습니다.
1898
[열강들의 영토 강제 할양 요구]
1898년은 중국에게 '치욕의 해'로 기억됩니다.
독일이 자우저우 만을, 러시아가 랴오둥 반도를, 영국이 홍콩을 강제로 할양받는 등 서구 열강들의 무자비한 이권 침탈이 극에 달하며 청나라의 주권이 심각하게 위협받았습니다.
[광서제, 무술변법 시도하나 실패]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광서제는 1898년 캉유웨이 등 급진 개혁 세력을 중심으로 '무술변법'을 시도했습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봉건적 체제 개선과 서구식 교육 도입을 추진했으나, 서태후 중심의 보수 세력 반대로 실패하고 광서제는 유폐되었습니다.
1900
[의화단 운동 발발]
기록적인 가뭄과 열강의 간섭, 청나라의 불안정으로 민심이 들끓던 1900년, 민족주의 세력인 의화단이 외국 선교사를 학살하고 서구인들을 몰아내려 '의화단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서태후의 묵인 하에 활동 범위가 넓어졌고, 베이징 조계 침입으로 이어졌습니다.
1901
[8개국 연합군, 베이징 침략 및 신축조약]
의화단 운동을 빌미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하여 자금성을 약탈했습니다.
서태후는 서안으로 피신했고, 청나라는 1901년 막대한 이권 침탈과 전쟁 비용 지불을 강요하는 굴욕적인 '신축조약'(베이징 의정서)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태후, 청말신정 개혁 추진]
국가가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서태후는 1901년 '청말신정'이라 불리는 마지막 개혁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국가 주도 교육 시스템 설립과 1905년 과거제 폐지 등 폭넓은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미 늦은 개혁이었습니다.
1908
[2살 푸이, 선통제로 즉위]
광서제와 서태후 사망 후, 2살의 푸이가 '선통제'로 즉위했습니다.
그의 친부 순친왕이 섭정을 맡았으나, 이후 위안스카이에게 군사권을 넘겨주고 권력을 박탈당하며 황실은 허울만 남게 되었습니다.
[광서제 독살 사망]
유폐된 광서제가 1908년 11월 14일 치사량을 훨씬 상회하는 양의 비소에 의해 독살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듬날 서태후도 사망하며 권력 공백과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1911
[황족 중심 내각 구성, 원로 대신 반발]
순친왕은 1911년 4월, 거의 대부분이 황족으로만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여 국정을 처리했습니다.
이는 장지동과 같은 원로 대신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으며, 이후 신해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창 봉기 발발, 신해혁명 시작]
1911년 10월 10일, 우창 봉기가 일어나면서 '신해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중화민국이 세워지며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중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12
[선통제 퇴위, 청나라 공식 멸망]
신해혁명으로 혼란이 가중되자 위안스카이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중화민국과의 협상 끝에 1912년 2월 12일 최후의 황제 선통제(푸이)의 퇴위를 강제했습니다.
이로써 2천 년에 달했던 중국의 군주제가 막을 내리고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했습니다.
1924
[청나라 소조정, 펑위샹 정변으로 멸망]
1912년 청나라 멸망 후 자금성 내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청나라 소조정'마저 1924년 펑위샹의 정변으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이로써 청 황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1932
[일본, 만주국 건국]
1930년대 일본 제국이 중국을 침략하여 1932년 '만주국'을 세우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황제로 세웠습니다.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으로, 청나라의 후신으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1945
[소련 공격으로 만주국 멸망]
1945년 소련의 공격으로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이 멸망했습니다.
이로써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와 관련된 모든 국가는 사라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