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 전쟁
전쟁, 역사, 국제 분쟁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01:58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간 벌어진 아시아 최대 규모의 대규모 전쟁.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과 자원 확보 욕구가 촉발했으며 중국 민족주의가 맞서 싸운 전쟁. 태평양 전쟁과 연계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로 확대되었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남김. 중국의 분단과 함께 국제 연맹 탈퇴 연합국의 지위 인정 등 동아시아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됨.
1931
[만주사변 발발]
일본 관동군이 남만주 철도를 폭파한 후 이를 중국군 소행으로 몰아붙여 만주를 침략합니다.
중국 국민당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 중이라 무저항 정책을 택하고 국제 연맹에 제소했지만,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며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일본 제국의 후원을 받던 친일 군벌 장쭤린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당한 후 그의 아들 장쉐량이 반일 운동으로 돌아서 국민당과 손을 잡습니다. 이에 일본은 대륙에서 식민지를 얻고 소련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만주 지배를 획책합니다. 이들은 남만주 철도 폭파를 조작해 만주를 침략, 펑톈, 장춘, 잉커우, 지린 등을 차례로 점령합니다. 장제스의 밀령에 따라 장쉐량은 전군에 무저항 철수를 명령했으며, 국제 연맹의 철수 촉구 결의안에도 일본은 불응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수반으로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웠습니다. 이후 일본은 만주를 자원 공급지이자 경제시장, 군사 기지로 활용하며 중국 대륙을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국제 연맹은 일본군 철수를 결의했지만,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 연맹을 탈퇴해 버립니다.
1933
[탕구 정전협정 체결]
일본군의 만주 침략 이후, 난징 국민정부가 일본에 정전을 요청하여 톈진의 외항 탕구에서 '탕구 정전협정'이 체결됩니다.
이 협정은 일본군이 만주국 안으로 철수하고 만리장성 이남에 비무장지대를 두는 내용으로, 사실상 난징 국민정부가 만주국을 중국에서 분리되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습니다.
협정은 난징 국민정부가 일본에 크게 양보한 내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광대한 만주 땅에 일본의 지배력이 완벽하게 미치지는 못했고, 동북항일연군 등 여러 항일 무장활동이 계속되었습니다.
1934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시작]
국민당의 5차 공산당 토벌 작전으로 거점 광창이 함락되자, 중국 공산당 홍군의 주력 10만 명이 강서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서쪽으로 탈주하는 '대장정'에 나섭니다.
무려 9,600km를 이동한 끝에 1935년 10월 섬서성 옌안에 다다랐을 때 생존한 공산군은 약 2만 명뿐이었습니다.
국민당의 토치카와 경제적 봉쇄 작전으로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진 공산당은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며 강서 소비에트를 포기합니다. 이 '대장정'은 공산당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지만, 동시에 당의 응집력을 강화하고 마오쩌둥의 리더십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6
[시안 사건 발발]
항일 여론이 고조되던 시안에서 장쉐량과 양호성이 공산군 토벌을 강요하는 장제스를 체포, 감금합니다.
이는 '일체의 내전 정지'와 '일치 항일'을 요구하는 병간(兵諫)으로,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평화적인 해결 끝에 제2차 국공합작의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장제스는 시안에 도착해 장쉐량과 양호성에게 공산군 토벌 혹은 부대 이동이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반공보다 항일'을 주장하는 동북군과 서북군의 여론에 밀려 두 사람은 장제스를 그의 숙소인 '화청지'에서 체포합니다. 장쉐량은 '일체의 내전 정지', '민중애국운동 개방', '구국회의 소집' 등 8가지 요구사항을 전국에 통전하고 중국 공산당 대표를 초청합니다. 소련과 일본 등 주변국도 이 사태에 주목하며 복잡한 국제 정세가 형성됩니다. 난징 국민정부 내에서도 장제스 토벌과 평화적 해결 의견이 대립했고, 공산당 내에서도 장제스 처형 요구가 나왔으나, 결국 '내전 중지, 일치 항일' 여론에 따라 평화적 해결이 추진됩니다.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대표와 국민정부 간 교섭을 통해 '친일파 구축 및 항일분자 영입', '공산당 토벌 정책 정지 및 홍군과의 연합 항일' 등의 협정이 이뤄졌고, 장제스는 12월 25일 석방되며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언명합니다. 장쉐량은 책임을 지고 자진해서 군법회의에 회부됩니다. 시안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제2차 국공합작이 항일 전선의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1937
[루거우차오 사건 발발]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에게 총탄이 날아오고 사병 한 명이 일시적으로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일본군은 이를 빌미로 중국군을 공격하며 루거우차오(노구교)를 점령합니다.
비록 양측이 협정을 맺어 사태를 봉합하려 했으나, 전쟁 명분을 찾던 일본군 상부는 이를 계기로 화북 전면 침공을 결정하며 중일 전쟁의 서막을 엽니다.
일본군 사병이 용변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중국군의 사격과 병사 납치'를 주장하며 펑타이 보병연대 주력을 출동시킵니다. 일본군은 루거우차오를 수비하던 중국 제29군을 공격하여 다리를 점령합니다. 일본군 무타구치 렌야가 이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사건은 후에 일본군이 조작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일본 본토, 만주, 조선에서 병력을 증강해 화북 지역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중국 본토 침략 계획을 세웁니다. 이에 장제스도 화중, 화남 병력을 집합시키고 화북으로 30개 사단을 북상시키는 등 대비합니다. 결국 일본 참모본부는 '속전속결' 전략 아래 7월 28일 화북 전면 침공을 개시, 본격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일으킵니다.
[상하이 전투 발발]
일본 해군 특별 육전대가 상하이 중국 관할구역을 선제공격하며 상하이 전투가 시작됩니다.
일본군은 '2~3개월 안에 전쟁을 끝낼 것'이라 호언장담했지만, 독일식 벙커밭과 장제스 직속 정예 부대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장기전의 수렁에 빠집니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무고한 양민 학살인 '삼광작전'을 개시합니다.
상하이에서의 중국군 저항은 오송 상륙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정도로 격렬했습니다. 특히 독일 군사고문 팔켄하우젠 장군과 한스 폰 젝트 장군의 조언으로 강력한 독일식 콘크리트 진지, 중화기, 지뢰밭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었고, 장제스 직속의 정예 제88사단은 일본군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상륙부대를 묶어놓았습니다. 일본군은 독가스까지 동원하며 겨우 전진했고, 중국군 역시 80만 대병력을 상하이에 집결시켜 맞섰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11월 5일 항저우만 진산웨이에 10군을 상륙시켜 중국군 후방을 위협하자, 장제스는 총퇴각 명령을 내렸고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상하이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27만 명이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군은 '삼광작전'(모두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을 개시하며 쑤저우 학살 등 양민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중화민국-소련 불가침 조약 체결]
일본군의 화북 침략에 맞서 중화민국 정부와 소련 정부는 난징에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합니다.
소련은 200대 이상의 항공기, 화포, T-26 전차 등 막대한 군사 물자를 중화민국에 원조하고 1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며, 군사고문단과 훈련된 의용 파일럿까지 극비리에 파견하여 '제트 작전'이라는 비밀 원조를 수행합니다.
[제2차 국공합작 완성]
중일 전쟁의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국 공산당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칭하며 국민당 휘하 군대로 합류합니다.
이는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7월 8일 공산당의 항일 자위전쟁 주장과 7월 17일 장제스의 '여산담화'를 거쳐 마침내 '제2차 국공합작'이 완성된 것입니다.
비록 합작 중에도 양측의 갈등은 이어졌지만, 일본에 맞서는 연합 전선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장제스는 홍군의 병력 규모를 3개 사단 45,000명으로 하고, 지휘체계에 정부 연락참모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홍군 총지휘에 주더, 부총지휘에 펑더화이를 임명한 독자적인 지휘부 설치를 동의했습니다. 이후 장제스의 정부군은 정면전장에서 지구전을, 공산군은 일본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본에 맞섰습니다.
[난징 대학살 발생]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된 후, 일본군은 약 6주 동안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살육, 방화, 강간 등 잔혹한 행위를 자행합니다.
국민당은 수도를 충칭으로 천도하고, 수비대 사령관 탕성즈는 '결사항전'을 외쳤으나 결국 철수 명령을 내리고 탈출합니다.
철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혼란에 빠진 중국군은 와해되었고, 피난하지 못한 약 60만 명의 시민과 군인들이 공황 상태에 빠지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 중 하나인 난징 대학살의 희생양이 됩니다.
난징 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탕성즈에게 투항을 권고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탕성즈는 내륙으로 후퇴하는 길이나 다리를 모두 끊어버려 시민들의 피난길을 막아 피해를 더욱 키웠습니다.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 성문을 폭파하고 진격하여 격렬한 저항을 받았지만, 전차를 앞세워 시내 거점을 장악합니다. 사령관 탕성즈의 도주 소식에 중국군은 와해되었고, 일본군은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참극은 일본군이 전쟁 초기부터 자행하던 '삼광작전'(태우고, 빼앗고, 죽이는)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됩니다.
1938
[타이얼좡 전투 승리]
일본군이 중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쉬저우 시의 관문인 타이얼좡을 공격하자, 리쭝런이 지휘하는 중국군 5전구 병력이 일본군을 포위하여 격렬하게 맞서 싸웁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대규모 사상자를 입히고 패퇴시켜 여러 현을 수복하는 중일 전쟁 이래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거둡니다.
이는 중국군을 얕본 일본군 지휘관들의 무리한 진격이 한몫했습니다.
일본군 수뇌부는 전쟁 첫해의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하자, 중국군의 보급로 차단을 주 목표로 삼았고, 쉬저우 시 점령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습니다. 타이얼좡 전투는 중국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지만, 일본군은 복수심에 불타 2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쉬저우 방면으로 대공세를 펼쳤습니다. 중국군 역시 60만 대병력을 집중시켜 맞섰지만, 북쪽에서 두 갈래로 공격해 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5월 쉬저우 시가 거의 점령되자 리쭝런은 퇴각을 명령합니다. 이 쉬저우 회전에서 일본군은 43,000명, 중국군은 56,0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황하 제방 폭파 작전]
일본군이 임시수도 한커우로 통하는 철도를 봉쇄하기 위해 정저우 시로 진격하자, 중국군은 황하 제방을 무너뜨려 주변 지역으로 강물을 범람시킵니다.
이 전략으로 수천 개의 마을이 수몰되고 1,0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막아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패퇴시켰습니다.
1939
[일본군의 봉쇄전술 전환 및 전선 고착]
신속한 승리를 기대했던 일본 제국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최소의 군사력으로 전략적 요충지를 점거하는 '봉쇄전술'로 전환하여 중국의 보급로를 끊으려는 '경제적 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넓은 대륙과 중국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전선은 고착화되고 전쟁은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일본군은 1938년 말까지 중국의 해안 주요도시들을 거의 장악했으나, 점령지역 내 게릴라 활동이 격화되고 비인도적인 통치로 주민들의 적개심이 깊어지면서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던 중국군은 미국과 소련의 적극적인 원조를 받으며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이에 중국 국민당은 1939년 겨울, 일본군 점령지를 탈환하고 2차 세계대전에 중국 전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위한 '1939년 동계 대공세'를 준비합니다.
1940
[공산당 세력 급성장 및 백단전투 승리]
전선 고착과 전쟁 장기화 속에서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 세력이 급성장합니다.
팔로군은 40만 명, 신사군은 10만 명으로 불어나며 팔로군은 백단전투에서 일본군 2만 5천여 명을 크게 무찌르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립니다.
한편 일본은 인도차이나 침략과 추축국 동맹을 맺고, 이에 미국은 대일 수출 금지를 결의합니다.
일본은 이를 'ABCD 포위망'이라 칭하며 태평양 전쟁으로 전선을 확대할 구실로 삼습니다.
1940년 이후 중국 대륙은 일본군 점령지구, 충칭 중심의 중화민국 정부 직할지역, 옌안 중심의 공산당 섬강녕변구 등 3개 지역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 시기, 공산군은 유격전을 통해 민심을 얻고 세력을 확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미국의 대일 수출 금지는 일본에 심각한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이는 일본이 자원 확보를 위해 태평양 진출을 결심하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1941
[신사군 사건 (환남 전투)]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북상하던 공산당 계열의 신사군 일부가 국민당군에 의해 기습 공격을 당하는 '환남 전투'가 일어납니다.
7일간의 전투 끝에 신사군 9,000여 명이 전사하며 공산군은 큰 충격에 빠지고, 제2차 국공합작 기간 중에도 양측의 깊은 갈등을 드러내는 사건이 됩니다.
[진주만 공격 및 태평양 전쟁 발발]
일본 제국 해군 연합 함대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를 계기로 중일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됩니다.
중화민국 정부는 일본, 나치 독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버마 전선에 부대를 파견하며 미국 '플라잉 타이거즈' 등 공군 지원을 받습니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도 참전합니다.
미국은 조지프 스틸웰을 군사고문관으로 파견하여 버마-인도 전선을 지휘하게 했고, 중국 전선에 공군 의용대대인 '플라잉 타이거즈'를 지원하여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플라잉 타이거즈는 연합군이 연패하던 태평양 전쟁 초기 수개월 동안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전과를 올리며 연합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습니다. 그러나 국민당군의 전투력은 여전히 열악했고, 지방 주둔 국민당군의 약탈과 강제 징집으로 민란이 발생하는 등 부패와 무능이 심각했습니다. 이러한 국민당의 내부 문제는 중일 전쟁 후 국공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는 원인이 됩니다.
1944
[일본의 대륙타통작전 ('이치고 작전')]
일본군이 전황을 타개하고자 중국 북부 점령지와 남부 하이난섬 일대의 상륙 지점을 연결하는 '대륙타통작전'인 '이치고 작전'을 개시합니다.
이 작전으로 중국군은 대패를 당하고 무려 30만 명의 병력이 희생됩니다.
이는 국민당군의 열악한 장비, 허술한 전투력, 지휘관들의 부패와 무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1945
[중국군의 총반격 시작]
연합군에 유리한 전쟁 상황과 막대한 지원 물자, 그리고 일본군의 공세 둔화를 틈타 중국군은 버마 전선 투입 부대를 중심으로 총반격 작전을 시작합니다.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으며, 중국군은 즈장-랴오허커우 전역에서 일본군에 승리하고 대륙타통작전으로 상실했던 영토를 모두 되찾는 쾌거를 이룹니다.
이후 중국-미국 연합군은 광저우 방면으로 진격하려 했고, 유럽 전선 종결 후 중국 주재 미국 사령관 앨버트 웨더마이어는 '카보네이도 작전'을 구상하여 1946년 중국 동부 해안지대에 미국군을 투입해 전면 공세를 가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이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최초의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3일 뒤인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을 투하하며 일본의 전의를 완전히 상실시킵니다.
이와 동시에 소련도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감행하여 일본의 패색은 더욱 짙어집니다.
[중일 전쟁 종결 및 일본 항복]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8월 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뒤, 미국 군함 미주리호에서 정식 항복문서가 조인됨으로써 약 8년간 이어진 중일 전쟁은 마침내 종결됩니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중국 주재 일본군은 9월 9일 난징에서 중화민국에 정식으로 항복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평화를 바라던 중국인들의 열망에 따라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회담이 열려 '쌍십협정'이 체결됩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 협정을 무시하고 군사적 도발을 감행,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며 '국공 내전'이 재발발합니다. 국민당은 내전에서 패배하여 1949년 12월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겼고,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며 중국은 분단됩니다. 중일 전쟁은 태평양 전쟁의 발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37년 발발을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될 정도로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