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 군인, 독립운동가, 건국의 아버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21:57:31
미국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며 신생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2선 연임 관례를 확립하고 평화로운 권력 이양의 모범을 보인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뛰어난 리더십으로 혼란 속 미국을 안정시켰다.
1732
[미국의 국부 탄생]
버지니아 식민지 웨스트모얼랜드 카운티에서 어거스틴 워싱턴과 메리 볼 워싱턴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게 될 위인의 첫 걸음이었다.
1749
[젊은 측량 기사]
17세의 나이에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의 첫 측량 기사로 활동하며 식민지 지형에 대한 귀중한 지식을 쌓았다.
이 경험은 훗날 군사 작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외에도 농장주로서 20명 이상의 노예를 거느리며 활동한 이력도 있다.
맏형 로렌스 워싱턴이 유력 가문인 페어팩스 가문과 결혼하면서 조지 워싱턴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 영토를 소유한 토마스 페어팩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 후원을 통해 첫 번째 공직인 컬페퍼 카운티 측량기사로 임명되었다.
1751
[생애 유일한 해외 여행]
배다른 형 로렌스의 결핵 치료를 위해 바베이도스에서 요양했다.
이는 조지 워싱턴이 생애 동안 미국을 떠난 유일한 경험으로, 그의 시야를 넓히는 기회가 되었다.
1753
[프랑스 최후통첩 전달]
21세의 나이로 버지니아 민병대에 입대, 프랑스인들에게 영국의 최후통첩을 전달하기 위해 오하이오 국경으로 파견되었다.
이 임무는 프랑스 인디언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워싱턴의 보고서는 북미와 유럽 전역에 널리 읽혔다.
1759
[마사 워싱턴과 결혼]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의 미망인인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3,000명이 넘는 노예와 1만 7,000에이커의 땅이 그의 재산이 되어 버지니아주 최고 갑부 중 한 명이 되었다.
결혼 전 자신의 친구 아내였던 샐리 패어팩스와 불륜 관계를 가졌으며, 샐리가 영국으로 떠난 뒤에도 다시 돌아올 것을 요구하는 등 관계를 유지했다.
1775
[대륙군 총사령관 임명]
대륙회의에서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결정으로 미국의 독립을 위한 기나긴 전쟁의 최전선에 서게 되며,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독립이 승인될 때까지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복무하며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결속력 없는 군대와 불안정한 대륙회의를 통솔하고 동맹국 프랑스와 의견을 조율하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전쟁이 끝난 뒤 개인적 삶을 위해 농장으로 돌아가자, 당시 영국 국왕 조지 3세는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극찬했다.
1787
[미국 헌법 제정 의회]
연합 규약을 대체할 미국 헌법 초안 작성을 위한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를 주재했다.
이 회의는 강력한 연방 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1789
[초대 대통령 만장일치]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만장일치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는 그에 대한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보여주는 기록적인 사실이다.
대통령 지명권을 가진 선거인단 69명 전원이 그에게 투표했다. 부통령은 존 애덤스가 당선되었다.
[역사적인 대통령 취임]
미국 최초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신생 국가의 수반이 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정부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아 미국의 행정 시스템을 확립했다.
초기에는 국왕처럼 대접받으려 했으나, 점차 대통령직의 권한과 역할을 정립해나갔다.
1794
[위스키 반란 진압]
초대 재무장관 해밀턴의 주류세 부과에 반발하여 발생한 '위스키 반란'을 직접 군대를 이끌어 진압했다.
이는 연방 정부 성립 후 최초의 시련이었으며, 공권력의 엄중함을 단호히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영국과 제이 조약 체결]
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으로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전쟁을 피하고자 초대 대법원장 존 제이를 특사로 파견하여 '제이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토머스 제퍼슨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이 강행했으며, 프랑스와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미 해군 실질적 창설]
바르바리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미국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미 의회가 '미해군 무장법 1794'를 통과시키고 워싱턴이 서명함으로써 사실상 해군이 재건되고 실질적으로 창설되었다.
이로써 신생 미국의 해상 안보 기반이 마련되었다.
재정난으로 해체되었던 해군을 재건하기 위한 논의는 1786년부터 있었으나, 1793년 알제 해적의 상선 11척 나포 사건 이후 진지하게 재개되었다. 이 법안은 전함 건조 자금을 포함했으며, 이후 알제와의 평화 협정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1796년 워싱턴의 노력으로 3척의 선박 건조가 다시 진행되었다.
1797
[2선 연임 관례 수립]
대통령 임기 제한 조항이 없었음에도 3선 권유를 거절하고 퇴임하여 2선 연임의 관례를 수립했다.
그는 '고별사'를 통해 통일의 중요성, 당파성과 파벌주의 경고, 해외 문제 불간섭주의를 강조하며 떠나는 지도자의 모범을 보였다.
1799
[미국의 국부 서거]
임기를 마치고 마운트버넌 농장으로 돌아간 지 2년 뒤,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헨리 리는 그의 장례식에서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그리고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이라 칭송하며 그의 위대한 유산을 기렸다.
1976
[명예역 대원수 추서]
사후 177년이 지난 뒤,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 의해 명예역 미국 대원수 계급을 추서받았다.
이는 그가 미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외에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 명예역 대장,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에 의해 명예역 원수 계급을 추서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