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옛 국가, 유교 국가, 왕국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00:48
1392
[조선 건국]
고려말, 명나라와의 외교 갈등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급진 신진사대부가 공양왕을 폐위하고 새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명나라와의 절충 끝에 고조선을 근거로 한 '조선'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500년 조선 왕조의 막이 올랐다.
1394
[한양 천도]
조선 건국 후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겨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한양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로 여겨졌으며,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398
[1차 왕자의 난]
조선 건국 초기, 개국공신 정도전 등 재상 중심의 정치와 왕권 중심의 정치를 주장한 이방원(후일 태종)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이방원이 실권을 장악하며 왕권 강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1400
[2차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왕위를 둘러싼 왕자들 간의 갈등이 다시 한번 촉발되었다.
이방원은 결국 이 난을 통해 자신의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고 태종으로 즉위했다.
1446
[훈민정음 반포]
세종대왕이 백성들이 쉽게 글을 배우고 소통할 수 있도록 창제한 우리 고유의 문자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로, 조선 문화의 위대한 업적으로 기록된다.
1455
[세조 찬위]
수양대군(세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강제로 빼앗고 왕위에 오르는 사건.
이는 왕권과 신권의 갈등, 특히 왕권 강화를 위한 무력 찬탈의 성격을 띠며 조선 초기 정치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485
[경국대전 완성]
조선의 국가 통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이 세조 시기부터 준비되어 성종 대에 완성, 반포되었다.
이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의 근간을 명문화하여 500년 왕조의 안정적인 운영 기반을 마련했다.
1498
[무오사화]
조선 초기 훈구파와 새롭게 등장한 사림파의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
연산군이 사림파를 숙청한 첫 번째 사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많은 사림 인사들이 화를 입었다.
1506
[중종반정]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신료들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사건.
이 반정을 계기로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에 들어서며 조선 중기 정치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519
[기묘사화]
중종반정 이후 정치를 주도하던 조광조 등 사림파가 훈구파의 반발로 대규모 숙청을 당한 사건.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이 좌절되며 사림파가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555
[을묘왜변]
명종 시기, 전라남도 해안에 왜구들이 대규모로 침입하여 영암, 장흥, 진도 등지를 약탈한 사건.
이는 조선의 해안 방어 체계의 허점을 드러냈으며, 임진왜란 전 대규모 왜구 침입의 전조였다.
1559
[임꺽정의 난]
조선 중기, 황해도 지방에서 양반과 탐관오리의 수탈에 맞서 의적으로 활동한 임꺽정이 이끈 농민 봉기.
당시 사회의 부패와 민중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583
[이탕개의 난]
선조 시기, 함경도 지역에서 여진족 이탕개가 일으킨 대규모 반란.
조선의 북방 방어 체제에 대한 위협을 보여주었으며, 이후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조선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1592
[임진왜란 발발]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며 발발한 대규모 전쟁.
비교적 평온했던 조선 사회를 크게 뒤흔들어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의 역사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1594
[훈련도감 설치]
임진왜란 중 조선의 군사 체계 한계를 절감하고, 삼수병(포수, 사수, 살수)으로 구성된 전문 상비군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된 중앙군영.
이는 이후 조선 후기 오군영 체제의 시초가 되었다.
1597
[정유재란 발발]
임진왜란 이후 재차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
조선의 국토는 또다시 황폐해졌고,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 등 의로운 항전이 펼쳐졌으나 전쟁의 상처는 깊었다.
1608
[창덕궁 준공]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을 대신하여 광해군 시기 창덕궁이 재건되었다.
이후 창덕궁은 조선의 법궁으로 자리매김하며, 조선 왕실의 주요 거처이자 정치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
1617
[인목대비 폐비]
광해군이 자신의 왕위 계승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긴 인목대비(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를 폐위하고 유폐한 사건.
이는 광해군의 패륜적 행위로 비판받았고, 인조반정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1619
[강홍립 청에 투항]
명나라와 후금(청)의 전쟁에서 명을 지원하러 갔던 조선군 도원수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한 사건.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이후 조선과 후금 간의 관계에 복잡한 영향을 미쳤다.
1623
[인조반정]
광해군의 실정(인목대비 폐비, 중립 외교 등)을 비판하며 서인 세력이 일으킨 정변.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했으며,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전환되어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다.
1624
[이괄의 난]
인조반정 공신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일으킨 반란.
한양이 일시적으로 반란군에 함락되는 등 큰 혼란을 겪었으며, 인조 정권의 불안정성을 드러내고 후금에게 조선 침략의 빌미를 제공했다.
1627
[정묘호란]
인조반정 후 친명배금 정책으로 돌아선 조선을 압박하기 위해 후금(청나라의 전신)이 침략한 전쟁.
조선은 큰 피해를 입고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1636
[병자호란]
청나라가 국호를 바꾼 후 다시 조선을 침략한 전쟁.
조선은 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항복(삼전도의 굴욕)을 하고 청에 신속 관계를 맺는 비극을 겪었다.
1659
[기해 예송]
효종의 죽음 후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간에 벌어진 첫 번째 예송 논쟁.
이는 단순한 복상 문제에서 벗어나 왕권과 신권의 관계, 성리학적 예법 해석을 둘러싼 치열한 정치 투쟁이었다.
1674
[갑인 예송]
효종비 인선왕후의 죽음 후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둘러싸고 다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두 번째 예송 논쟁.
기해예송과는 반대로 남인이 승리하며 정국 주도권이 교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1680
[경신환국]
숙종 시기 남인과 서인의 대립 속에서 서인이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송시열의 영의정 복직 문제와 복창군 등의 역모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정국이 급변했다.
1689
[기사환국]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문제로 서인과 대립하다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을 정권에 등용한 사건.
장희빈의 등장과 죽음이 이러한 환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694
[갑술환국]
숙종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희빈을 강등하며,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다시 정권에 등용한 사건.
붕당 정치의 격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숙종이 환국을 통해 왕권 강화를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1712
[백두산 정계비 건립]
숙종 시기, 청나라와 백두산 일대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세운 비석.
압록강과 토문강을 국경으로 명시했으나, 토문강 해석을 둘러싼 후대의 논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1727
[정미환국]
영조 시기 소론이 노론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영조의 탕평책이 본격화되기 전, 왕권 강화를 위한 노론 견제의 시도로 볼 수 있다.
1728
[이인좌의 난]
영조의 즉위에 반대하며 소론 강경파와 남인 잔여 세력이 이인좌를 중심으로 일으킨 대규모 반란.
영조는 이 난을 진압하며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탕평책을 추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736
[속대전 간행]
영조 시기, 《경국대전》 이후 변화된 사회 현실과 제도를 반영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편찬한 법전.
이는 조선 법제의 지속적인 정비 노력을 보여준다.
1762
[사도세자 죽음]
영조가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비극적인 사건.
이는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갈등,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로, 조선 후기 정치사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연표에서는 '무고의 옥'으로 표기되어 있다.
1772
[탕평책 실시]
영조가 붕당 간의 정치적 대립과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특정 붕당에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이는 왕권 강화와 정치 안정에 기여하고자 한 개혁 정책이었다.
1776
[규장각 설치]
정조가 학문 연구와 정책 개발을 담당하는 핵심 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했다.
이는 왕실 도서관 역할뿐 아니라, 정조의 개혁 정치 추진을 위한 인재 양성과 학술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1780
[홍국영 축출]
정조의 즉위 초 측근 세력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홍국영이 왕권을 위협한다는 명분으로 축출되었다.
이는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친위 세력조차 견제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791
[신해박해 및 신해통공]
정조 시기, 천주교(서학)를 탄압한 '신해박해'와 시전 상인의 독점적 상업 활동 특권인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이 있었다.
신해통공은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촉진하여 조선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811
[홍경래의 난]
순조 시기,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과 세도정치의 부패에 반발하여 홍경래가 주도한 대규모 농민 봉기.
이는 조선 후기 심화된 사회 모순과 민중의 불만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1846
[프랑스 함대 국서 전달]
헌종 시기, 프랑스 세실 제독의 함대가 조선 해안에 출몰하여 국서를 전달했다.
이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조선에 접근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초기 사건 중 하나로, 조선이 대외적 위기에 직면했음을 보여주었다.
1860
[동학 탄생]
철종 시기,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민족 종교.
유교, 불교, 선교의 요소를 융합하고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내세워 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동학 농민 혁명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1862
[임술농민봉기]
철종 시기, 삼정의 문란(세금 제도의 부패)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대규모 농민 봉기.
특히 진주 민란이 대표적이며, 이는 조선 후기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냈다.
1866
[병인박해]
고종 시기,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프랑스 선교사들과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한 사건.
이는 이후 프랑스의 병인양요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 요구를 하며 대동강에 침입하자, 평양 주민들이 배를 불태워 침몰시킨 사건.
이는 서양 세력과의 첫 번째 대규모 무력 충돌로, 이후 신미양요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1867
[경복궁 재건]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고 왕권 강화를 상징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경복궁을 다시 지은 사업.
막대한 재정과 백성들의 강제 노역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871
[신미양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벌어진 전투.
조선은 강화도 초지진, 덕진진 등에서 격렬히 저항하며 미군을 물리쳤고,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워 서양 세력 배척 의지를 천명했다.
1876
[강화도 조약]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조선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이 조약으로 부산 등 3개 항구를 개방하고 일본인의 영사재판권 등을 인정하며 조선은 자주적인 개항이 아닌 강압적 문호 개방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82
[임오군란]
근대식 신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와 봉급 미지급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궁궐을 침범하여 고종과 민비가 피신하는 등 큰 혼란을 겪었으며,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884
[갑신정변]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기점으로 일으킨 정변.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자주적인 개혁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1894
[동학혁명 및 갑오경장]
조선 후기 사회 모순과 외세 침략에 맞서 동학 농민군이 일으킨 대규모 봉기.
이는 외세의 개입으로 진압되었으나, 이후 정부는 일본의 압력 아래 '갑오경장'이라는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사회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1895
[을미사변]
일본이 조선의 친러시아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궁궐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만행.
이는 조선의 자주성을 침해하고 일본의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1897
[대한제국 선포]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주 독립 국가임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이는 조선 왕조가 약 500년의 역사를 마치고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