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프루이 라그랑주
수학자, 천문학자, 수리물리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3:00:43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의 천재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라그랑주 역학 변분법 해석학 정수론 등 현대 수학과 물리학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인물.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아카데미 수학 부장을 역임했으며 나폴레옹에게 백작 작위와 훈장을 받는 등 프랑스 혁명기를 거치며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에펠탑에 이름이 새겨진 72명의 위인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1736
[천재 수학자의 탄생]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의 혈통을 물려받아 태어났다.
11명의 형제자매 중 맏이였으며, 아버지는 사르데냐 왕국의 군자금을 맡은 부유한 관리였으나 투기로 재산을 잃었다.
라그랑주는 후에 이 가난이 수학을 직업으로 삼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1753
[수학의 세계에 눈뜨다]
17세가 되던 해, 토리노 대학교에서 법을 공부하던 중 에드먼드 핼리의 논문을 우연히 읽고 수학에 대한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어떤 도움도 없이 혼자서 수학을 독학하며 완성된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후에 포병학교 교사가 될 수 있었다.
1754
[변분법 아이디어와 깨달음]
자신의 짧은 에세이를 기하학자 파냐노에게 보내며 미적분학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공유했다.
그러나 8월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 요한 베르누이의 과학적 발견과 자신의 아이디어가 동일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다른 사람의 발견을 표절한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했다.
[등시곡선 문제 연구]
이전에 겪었던 불행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고 등시곡선 문제에 대한 연구 내용을 파냐노에게 보냈다.
이 첫 에세이는 사라졌지만, 후에 같은 주제로 쓰인 두 개의 회고록이 남아있다.
1755
[오일러에게 보낸 변분법]
19세의 나이로 변분법에 대한 순수하게 해석학적인 접근 방식을 라틴어로 요약하여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보냈다.
라그랑주 본인도 이 업적을 자신의 가장 뛰어난 수학적 성과 중 하나로 여겼다.
1756
[베를린 아카데미 회원]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지지에 힘입어 베를린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그의 초기 연구 성과가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1758
[토리노 과학 아카데미 설립]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토리노 과학 아카데미로 발전하게 될 법인 조직을 설립했다.
그의 초기 저작 대부분은 이 아카데미의 결과물인 《토리노에서의 기타 연구》 5권에 수록되어 있다.
1764
[달의 칭동 연구 수상]
달의 칭동 현상에 대한 연구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 연구는 달이 왜 항상 한쪽 면만 지구를 바라보는지 설명하며, 후에 일반화된 운동방정식의 근원을 포함하고 있어 특히 중요하다.
또한 삼체 문제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1766
[베를린 아카데미 부장]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장 르 롱 달랑베르의 추천으로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과학 학사원의 수학 부장이 되었다.
20년 이상 베를린에 머무르며 수많은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이 해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목성 위성의 운동에 대한 연구로 다시 한번 상을 받았다.
1770
[네 제곱수 정리 증명]
바슈가 증명 없이 제시했던 '모든 양의 정수는 4개의 제곱수들의 합이다'라는 정리를 증명하여 정수론 분야에 큰 기여를 했다.
이는 현대 정수론의 중요한 발전 중 하나이다.
1771
[윌슨의 정리 증명]
n이 소수일 때, (n-1)! + 1은 항상 n의 배수라는 윌슨의 정리를 증명했다.
이 역시 정수론 분야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1772
[라그랑주 점 발견]
지구, 태양, 달에 대한 삼체 문제 연구 중, 일직선상인 경우와 정삼각형인 경우 두 가지 특정 패턴의 해를 찾아냈다.
이는 현재 '라그랑주 점'으로 알려져 있으며, 천체 역학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이 해에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수상했다.
1773
[삼체 문제 연구 수상]
천체 역학 분야에서 중요한 삼체 문제에 대한 에세이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상을 받았다.
이는 그가 천문학 문제 해결에 얼마나 깊이 기여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1774
[프랑스 아카데미 수상]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또다시 상을 받았다.
행성 궤도의 교점에 대한 운동, 행성 궤도의 안정성에 관한 연구 등 천문학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를 이어갔다.
1775
[이차 형식 일반화]
그의 저서 《산술연구》에서 정수가 ax² + by² + cxy와 같은 형태로 표현될 때의 일반적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항 이차 형식에 대한 일반적인 정리를 만들었다.
이는 정수론 분야의 중요한 진전이었다.
1778
[혜성 섭동 연구 수상]
혜성에 의한 행성 궤도의 섭동(교란)에 대한 논문으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다.
그의 연구는 역학적 구적법을 이용한 섭동 계산법의 기반을 마련했다.
1783
[아내 비토리아의 사망]
수년간 병치레하던 아내 비토리아가 사망하자 깊은 의기소침에 빠졌다.
이 시기는 그에게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1786
[파리로 이주 및 학술원 가입]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사망 후, 스페인과 나폴리 등 여러 나라의 초청을 거절하고 루이 16세의 요청을 받아 파리로 이사했다.
프랑스 과학 학술원(후에 프랑스 학사원)의 회원이 되었으며, 루브르에 마련된 특별 저택과 특전을 받았다.
1788
[《해석역학》 출판]
베를린에서 집필을 시작한 그의 기념비적인 역작, 《해석역학》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뉴턴 이래 고전역학을 가장 포괄적으로 다루었으며, 19세기 수리물리학 발전의 기반을 마련한 세계최초의 변분법을 이용한 해석역학 교과서였다.
《해석역학》(Mécanique Analytique)은 가상일의 법칙을 정립하고, 변분법의 도움으로 고체와 유체 역학 전체를 하나의 기본 원리에서 유도할 수 있음을 보였다. 일반화된 좌표를 사용하는 방법은 그의 해석에서 가장 기발한 결과로 평가받는다. 윌리엄 로언 해밀턴은 이 작업이 오직 과학적인 시로써만 표현될 수 있다고 극찬했다. 그는 또한 역학이 4차원 기하학과 유사한 순수 수학의 한 분야라고 표현했다.
1792
[아델라이드와 재혼]
인생에 대한 슬픔과 소심함에 빠져있다가 친구 천문학자의 딸 아델라이드 르 모니에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녀는 헌신적인 부인이 되어 라그랑주와 행복한 관계를 유지했다.
1793
[프랑스 공포정치 시작]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모든 외국인은 프랑스를 떠나야 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개입으로 라그랑주는 특별 면제되었다.
1794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수]
프랑스 혁명 속에서도 살아남아, 새로 개교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해석학의 첫 번째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강의는 형태와 내용 면에서 완벽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교사로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도 있다.
[라부아지에의 죽음과 명언]
프랑스 혁명 당시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세무사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길로틴에서 처형되었다.
라그랑주는 이에 대해 '이 머리가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이를 키우는 데는 백 년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라는 비통한 명언을 남겼다.
1795
[단위 측정 및 학과장]
새로 설립된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의 수학과 학과장으로 4개월간 임명되었다.
또한, 미터와 킬로그램을 표준 단위로 최종 선택하고 십진법 세분화를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무게 및 측정 개혁 위원회에 참여했으며, 경도국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1796
[피에몬테의 영광]
이탈리아 주재 프랑스 공관이 라그랑주의 아버지에게 아들의 업적에 대해 프랑스 공화국을 대신하여 축하를 전했다.
'그의 천재성은 모든 인류를 명예롭게 하였고, 이런 사람을 낳은 피에몬트의 특별한 영광이다'라고 칭송하며 그의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1797
[《해석함수론》 출판]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의 변분법 강의를 바탕으로 한 논문인 《해석함수론》을 출판했다.
이 책은 대수학의 일반성 원리에 의존하고 수열의 대수함수 발전에 기반하여 미분학을 여러 정리로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라그랑주는 이 책에서 무한히 크거나 작은 양들에 관련된 미분학의 문제점들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연구는 오귀스탱 루이 코시, 카를 구스타프 야코프 야코비, 카를 바이어슈트라스의 연구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1798
[《수치 방정식 해법》 출판]
에콜 폴리테크니크 강의 성과를 담은 《수치 방정식 해법》을 출판했다.
연분수를 이용하여 방정식의 실근을 근사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여러 정리를 발표했다.
1799
[프랑스 상원의원 선출]
프랑스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적 명예를 얻었다.
이는 그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커졌음을 보여준다.
1802
[프랑스 국적 취득]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후, 그의 조국인 피에몬테를 프랑스 땅으로 합병하는 Sénatus-consulte에 서명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이로써 라그랑주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되었다.
1803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그의 학문적 업적과 프랑스에 대한 기여를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1804
[《함수의 미분적분법》 출판]
《함수의 미분적분법》을 출판했다.
이 책은 1806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으며, 그가 유명한 '라그랑주 승수법'을 발표한 저서이기도 하다.
변분법 연구에 큰 기여를 했다.
1806
[국제 학술원 회원 선정]
영국의 왕립 협회와 스위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 회원으로 선정되며 국제적인 학술 명예를 얻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영향력이 유럽 전역에 걸쳐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1808
[나폴레옹 백작 작위 수여]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 제국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나타낸다.
그의 이름은 현재 에펠탑에 새겨진 72개의 이름 중 하나로 남아있다.
1810
[《해석역학》 개정 시작]
그의 위대한 저서 《해석역학》의 완전한 개정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1813년 파리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2/3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1811
[무한소 방법론 정립]
《해석역학》 두 번째 판의 서문에서 무한소의 사용을 정당화하며, 무한소 방법이 증명을 짧고 간결하게 만드는 확실하고 의미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미분학의 철학적 기반에 대한 그의 견해를 보여준다.
1813
[최고 훈장 수여]
파리에서 사망하기 이틀 전, 나폴레옹으로부터 화합의 제국 훈장 대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그의 마지막 영예이자 프랑스 최고 지도자의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위대한 삶의 마감]
프랑스 파리의 뤼 드 포부르 생토노레 128번지에서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프랑스의 위인들이 잠든 팡테옹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묘비에는 프랑스어로 그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