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인티파다
분쟁, 시위, 봉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53:53
제1차 인티파다는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이스라엘의 점령에 맞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펼친 대규모 민족 봉기이다. 돌팔매질 시민 불복종 등 비폭력 저항부터 무력 충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는 마드리드 회의와 오슬로 협정으로 이어져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의 주체성과 국제적 관심을 증폭시킨 역사적 전환점이다.
1967
[이스라엘 점령지 확대]
제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등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하며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개방했으나, 주로 기술이 필요 없는 육체노동에 국한되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인부 40% 이상이 이스라엘에서 일했으며, 고인구 고실업률 상황이 발생하여 인티파다 발발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1985
['철의 주먹' 정책 도입]
당시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이었던 이츠하크 라빈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제압하기 위해 '철의 주먹' 정책에 강제 추방 조치를 포함시켰다.
이 정책으로 약 4년간 50명이 추방되었고, 서안 지구의 유대인 인구는 1984년 35,000명에서 1988년 64,000명으로 두 배가량 증가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의 공포와 불만을 더욱 키웠다.
1986
[비르제이트 대학교 시위]
가자 지구 비르제이트 대학교에서 이스라엘 군인에 의해 팔레스타인 학생 2명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이스라엘은 즉결 체포, 구금, 구타 등 강경 진압으로 대응하며 긴장이 고조되었다.
1987
[추방 정책 강화]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저항 활동가들을 위협하기 위해 추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이는 이미 '철의 주먹' 정책으로 강화된 추방 조치를 더욱 가시화하며 팔레스타인 사회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가자 지구 주민 사살]
이스라엘 방위군이 매복 작전을 통해 가자 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 7명을 사살했다.
이들은 이슬람 지하드와 연관된 인물로 알려졌으며,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가자 주민 추가 사살]
이스라엘 방위군이 또다시 매복을 통해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 4명을 사살하고 그들의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이에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은 이슬람 지하드와 연루된 지도자를 추방하는 등 강경 대응을 이어갔다.
[글라이더의 밤 사건]
1987년 11월에 발생한 '글라이더의 밤' 사건에서 이스라엘 방위군의 방어 실패가 팔레스타인 봉기 개시의 촉매가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에게 이스라엘의 약점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트럭 충돌 사고 발생]
에레스 교차로에서 이스라엘 장갑차 운반 차량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던 차량과 충돌하여 팔레스타인인 인부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 세 명은 자발리아 난민 수용소 주민으로, 이 사고가 이틀 전 유대인 살해에 대한 보복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제1차 인티파다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자발리아 봉기 확산]
전날 발생한 사망 사건의 장례식에 1만 명 이상이 참석하며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
자발리아 난민 수용소에서는 시위 중 17세 소녀가 화염병을 던지다 사살되어 인티파다의 첫 순교자로 알려졌고, 시위는 서안 지구와 동예루살렘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대규모 사상자 발생]
시위가 격화되며 팔레스타인인 6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다.
이스라엘 군경은 시위 진압을 위해 곤봉, 최루탄, 실탄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나,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갈수록 번졌다.
시위대는 난민 수용소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군인들에게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미 영사관 공격]
시위대는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미국 영사관에 휘발유 폭탄을 던졌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이는 국제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팔레스타인 저항의 한 형태로 해석되며, 인티파다 초기에는 이스라엘 정착촌 공격이나 이스라엘 측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1988
[PLO 지도자 암살]
튀니지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주요 지도자인 칼릴 알 와지르(아부 지하드)가 이스라엘 특수부대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스라엘은 그를 '저항 운동의 주요 통제 인물'로 지목했으며, 그의 사망 이후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26명이 사망했다.
[아랍 연맹 지원 결정]
아랍 연맹은 인티파다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에 대한 아랍 세계의 지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움직임이었으며, 1989년 회담에서도 경제적 지원이 재확인되었다.
[PLO 이스라엘 인정]
인티파다의 성공을 통해 야세르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의 정치 계획을 통제할 만한 신뢰를 얻었다.
그는 알제리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국민 회의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1947년 이후 모든 유엔 결의안을 수용하며 양국 방안을 받아들이는 획기적인 결정을 발표했다.
1989
[미국, 안보리 거부권]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추방 중단 및 제4차 제네바 협약 위반을 규탄하는 결의안 초안을 제시했으나,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미국은 이후 두 차례 더 이스라엘 비난 결의안 초안을 거부하며 이스라엘의 인권 침해 주장을 비난했다.
1990
[내부 갈등 심화]
베니 모리스는 인티파다가 방향성을 잃었다고 언급했다.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이스라엘과 협력했다고 의심받는 이들을 처형하는 사건이 증가했으며, 팔레스타인인 771~942명이 협력자 혐의로 처형당하는 등 내부 폭력이 심화되었다.
이스라엘은 약 1만 8천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협력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성전산 폭동 발생]
성전산 폭동 중 팔레스타인인 22명이 이스라엘 경찰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팔레스타인 저항은 칼에 찔러 살해하는 등 더 위험한 방식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방위군 군인 1명과 민간인 3명이 칼에 찔려 사망하는 등 공격이 계속되었다.
[이스라엘, 유엔 결의 거부]
이스라엘은 통곡의 벽 유대인 공격이 결의안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제672호를 따르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스라엘은 유엔 사무총장 대표단의 입국도 거부하며 유엔의 개입을 방해했다.
1991
[걸프 전쟁과 PLO 고립]
걸프 전쟁에 대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반대 입장은 국제적 외교 고립을 초래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가 경제 지원을 중단했고, 쿠웨이트에서 팔레스타인인 수십만 명이 추방당했다.
이로 인해 PLO는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압박을 받았고, 이는 마드리드 회의 개최로 이어졌다.
1993
[자살 공격 시작]
메홀라 교차로 사건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 저항군의 자살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는 인티파다의 양상을 더욱 폭력적으로 변화시키며 분쟁의 심각성을 더했고, 인티파다 종료 시점까지 자살 공격이 이어졌다.
[오슬로 협정 체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간 오슬로 협정이 조인되면서 제1차 인티파다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 협정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설립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이스라엘 국가 인정이라는 역사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