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 교육자, 언론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52:25
정지용은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존재로 불리며 모더니즘과 한국적 정서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 이상 발굴 청록파 시인 등단 등 후배 문인 양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한국 문단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 한국 전쟁 중 의문사하였고 작품 해금과 향수 표절 논란 등 드라마틱한 삶의 궤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합니다. * 특히 그의 시 향수는 시대를 초월하여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02
[시인 정지용의 탄생]
대한민국을 대표할 서정 시인 정지용이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한의사 정태국과 정미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명은 '정지룡'이었다.
정지용은 대한제국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현 수북리 238번지 일원)에서 한의사인 정태국과 정미하 부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정지룡(鄭池龍)이었다.
1913
11세의 나이에 동갑인 송재숙(宋在淑, 1902년~1971년)과 결혼했다.
1914
[가톨릭에 입문]
아버지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에 입문했으며, '방지거'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는 훗날 그의 작품세계에 종교적 경향을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 정태국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에 입문하여 '방지거(方濟各,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919
[독립 운동 참여, 무기정학]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대회를 주도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으나, 동료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그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3·1 운동이 발발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송빛나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다.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으나, 박종화, 홍사용 등 문우들의 구명운동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1923
[일본 유학, 문학적 성장]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며 문학적 견문을 넓혔다.
유학 생활은 훗날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중요한 시기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영문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문학적 감수성을 키우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었다.
1926
['학조'로 화려한 문단 데뷔]
유학생 잡지 '학조' 창간호에 시 '카페 프란스'를 비롯한 9편의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는 그가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새기는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 〈학조 學潮〉 창간호에 시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이 외에도 〈신민〉·〈문에시대〉 등에 〈Dahlia〉·〈홍춘〉 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왕성한 초기 활동을 보였다.
1933
[이상 발굴, 문학계에 큰 영향]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활동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천재 시인 이상(李箱)의 시를 발굴하여 세상에 소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공헌으로 평가받는다.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발간한 잡지 '가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문학 공개강좌 개최 및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으며, 특히 이상(李箱)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의 시를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인 구인회(九人會)에도 가담하며 한국 문단의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1939
[청록파 시인들의 '스승']
문학 잡지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시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들을 발굴하고 등단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심미안은 한국 문학의 미래를 밝히는 등대와 같았다.
〈문장〉지의 시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며 훗날 '청록파'라 불리게 될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인들을 등단시키며 한국 문단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45
[해방 후, 문학-사회 활동]
광복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및 문과과장으로 부임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과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의 주간을 겸임하는 등 해방 공간에서 문학과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8·15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과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을 맡아 '여적'(餘適)이라는 고정란과 사설을 담당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이어갔다.
1948
[시대의 비극, 보도연맹 가입]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과거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보도연맹' 가입을 강요받았고, 전향 강연에 참여하는 등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시대 상황 속에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 강연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는 이념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 공간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950
[한국 전쟁 중, 의문의 실종]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실종되었다.
이후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했다는 추정, 혹은 미군 폭격에 휘말려 폭사했다는 주장 등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으나, 그의 정확한 사망 일자와 원인은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오랫동안 납북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2003년 문학평론가 박태상이 1950년 9월 25일 미군 폭격으로 동두천 소요산에서 폭사했다는 자료를 공개하는 등 그의 행적과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과 의문이 존재한다.
1988
[시 '향수' 해금, 명예 회복]
한국 전쟁 이후 납북 문인으로 분류되어 오랫동안 그의 이름과 작품이 금기시되었으나, 1988년 해금 조치와 함께 그의 대표작 '향수'가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대중에게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한국 문학사의 아픈 역사를 되짚는 계기가 되었다.
납북 여부와 사인이 모호하여 한때 이름이 '정X용'으로 표기되고 그의 시가 금기시되었으나, 1988년 해금되어 국어 교과서에도 그의 시 '향수'가 수록되면서 잊혀졌던 그의 문학적 가치가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2013
['향수' 표절 논란 제기]
정지용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향수'가 미국의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의 시 '므네모시네'를 표절 또는 번안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논란은 한국 문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그의 작품 세계를 다시금 조명하게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지용의 시 '향수'가 미국의 요절한 천재 시인 트럼블 스티크니(Trumbull Stickney, 1874-1904)의 시 '므네모시네(Mnemosyne)'를 표절 혹은 번안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 의혹은 그의 문학적 위상과 작품의 독창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촉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