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궁궐, 세계유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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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세계유산,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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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 왕조 500년간 중국의 정치적·상징적 수도였던 궁궐. 세계 최대 규모의 건축물로 현존 최대 목조 건축물(태화전) 최대 양각 조각(보화전 답도) 세계 최대 규모 시계 컬렉션 등 다양한 기록을 보유. 1925년 고궁 박물원으로 개원하여 대중에 개방되었으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됨. 연간 1 5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자 관광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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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

[세계 최대 궁궐, 자금성 착공]

영락제는 명나라의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며, 세계 최대 규모의 궁궐인 자금성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100만 명 이상의 일꾼이 동원된 대역사였습니다.

명나라 영락제(1403~1424년)가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시작된 자금성 건설은 14년이 걸렸으며, 100만 명 이상의 일꾼을 필요로 했습니다. 중국 남서부의 고급 녹나무와 베이징 근처의 대리석, 쑤저우에서 구운 '금 벽돌' 등 최고급 재료를 사용하여 지상 최고의 궁전을 목표로 했습니다. 자금성 내 오문, 신무문 등 주요 문들과 태화전, 건청궁 등의 핵심 전각들도 이때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420

[자금성, 500년 역사 시작]

14년간의 대공사 끝에 자금성이 마침내 완공되었습니다.

980여 개 건물과 72만 제곱미터 면적을 자랑하며, 이후 약 500년간 명·청 왕조 24명의 황제가 머문 중국의 심장이자 정치적 수도가 됩니다.

특히 태화전은 중국 현존 최대 목조 건축물로 위용을 뽐냅니다.

자금성은 완공 이후 1644년까지 명 왕조의 중심지였으며, 명대부터 청대까지 14명의 명나라 황제와 10명의 청나라 황제, 총 24명의 황제가 이곳에서 생활하며 국정을 돌봤습니다.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72만 m²의 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의 담과 800채의 건물, 8,707칸의 방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태화전(太和殿)은 면적 2,368㎡, 폭 66m로 자금성 내부에서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이자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목조 건축물입니다.

1535

[궁궐 명칭 변경 및 건설]

인수궁이 있던 자리에 자녕궁이 새로 지어졌고, 경인궁, 승건궁 등 여러 궁궐의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는 황실의 변화와 함께 궁궐의 용도와 위상이 재정립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명나라 가정제 시기, 경인궁(長安宮 → 景仁宮), 승건궁(永寧宮 → 承乾宮), 영화궁(永安宮 → 永和宮), 종수궁(咸陽宮 → 鍾粹宮), 경양궁(長陽宮 → 景陽宮), 연희궁(長壽宮 → 延祺宮), 영수궁(長樂宮 → 毓德宮), 태극전(未央宮 → 啓祥宮), 장춘궁(永寧宮 → 長春宮), 익곤궁(萬安宮 → 翊坤宮), 저수궁(壽昌宮 → 儲秀宮), 함복궁(壽安宮 → 咸福宮) 등의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또한, 가정제 재위기인 1536년에는 인수궁이 있던 자리에 자녕궁(慈寧宮)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1576

[자금성 명칭 공식 사용]

북극성을 의미하는 '자(紫)'와 금지된 공간을 뜻하는 '금(禁)'을 합쳐, '자금성'이라는 이름이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만이 드나들 수 있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된 것이죠.

자금성(紫禁城, Zǐjìnchéng)의 '자(紫)'는 북극성을 의미하며, '금(禁)'은 금지된 공간을 뜻합니다. '성(城)'은 도시를 의미합니다. 현재 중국어권에서는 주로 '고궁(故宫)'이라 불리며 '옛 궁궐'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1611

[경양궁의 비극]

경양궁에서는 태창제의 생모 공비 왕씨가 30년간 유폐되다시피 지내다 죽음에 임박해서야 아들을 만나 통곡했던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황실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슬픈 역사입니다.

경양궁은 태창제(泰昌帝)의 생모인 공비 왕씨가 출산 이후 여기에서 30년 넘게 유폐되다시피 지내며 아들을 만나지 못하다가 1611년 죽음이 임박하자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태창제가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가 실명한 생모를 안고 통곡했던 비극이 일어난 곳입니다.

1644

[이자성, 자금성 함락]

명나라 후기, 반란군 이자성이 자금성을 함락시키고 무영전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500년 명나라 황실의 권위가 무너지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명나라 후기, 후금 군대의 침략과 내부 반란으로 혼란이 극심해지자, 순 왕조의 황제를 자칭한 이자성(李自成)이 1644년 4월 자금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는 자금성 내 무영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며 명 왕조의 종말을 선언했습니다.

1645

[청나라, 자금성 접수]

만주족이 이자성군을 격파하고 자금성을 차지했습니다.

순치제는 이곳에서 청 왕조의 지배를 선포하고, 주요 건물 이름을 '조화'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등 궁궐에 만주족의 요소를 불어넣었습니다.

이자성군을 격파한 만주군은 중국의 패권을 장악했고, 순치제(順治帝)는 자금성에서 청 왕조의 수립을 알리는 의례를 거행했습니다. 청의 지배자들은 '패권'보다 '조화'를 강조하며 몇몇 건물 이름을 변경했고, 궁궐에 샤머니즘적 요소를 도입했습니다. 태화전의 이름도 봉천전에서 황극전으로, 다시 태화전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654

[강희제 탄생]

경인궁에서 청나라의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인 강희제가 태어났습니다.

자금성은 황제의 탄생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강희제(康熙帝)의 생모 효강장황후(孝康章皇后)가 거주했던 경인궁(景仁宮)에서 1654년 5월 4일 강희제가 태어났습니다.

1678

[옹정제 탄생]

영화궁에서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탄생은 자금성, 나아가 청나라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옹정제(雍正帝)의 생모 효공인황후(孝恭仁皇后)가 거주했던 영화궁(永和宮)에서 1678년 12월 13일 옹정제가 태어났습니다.

1735

[수강궁 건설]

건륭제의 생모 효성헌황후가 거주했던 수강궁이 건설되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습니다.

이곳은 황실의 중요한 여성들이 머물던 공간으로 역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수강궁(壽康宮)은 자녕궁 서쪽에 위치하며, 1735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73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건륭제의 생모인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를 비롯해 여러 황실 여성들이 이곳에 거주했습니다.

1742

[건복궁화원 조영]

건륭제는 중국 강남 지역의 아름다운 원림을 모방하여 건복궁화원 조영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황제의 심미안이 돋보이는 휴식 공간이었습니다.

건복궁화원은 자금성 내 서북쪽에 있으며, 건륭제가 1742년부터 중국 강남 지역 원림의 느낌을 살려 조영한 화원입니다.

1772

[영수궁 권역 및 구룡벽 재건]

건륭제는 퇴위 후 거주할 영수궁 권역을 자금성 양식을 본따 재건했습니다.

이 시기, 천자의 지위를 상징하는 '중국 3대 구룡벽' 중 하나인 영수궁 구룡벽도 함께 세워졌습니다.

건륭제는 1772년부터 1776년까지 영수궁 권역을 재건하며 황극전, 낙수당, 이화헌, 심연서옥, 고화헌, 수초당, 부망각, 권근재, 창음각, 양성전 등을 지었습니다. 특히 황극문 바깥에 세워진 구룡벽(길이 29m, 높이 3.5m)은 9마리 용이 '구오지존'을 상징하며, 산서성 대동, 북경 북해공원의 구룡벽과 함께 '중국 3대 구룡벽'으로 불립니다. 동쪽에서 3번째 용은 일부가 깨져 유리 대신 나무로 복원된 흥미로운 역사를 지닙니다.

1776

[문연각 완공 및 사고전서 보관]

청나라의 방대한 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보관하기 위한 문연각이 완공되었습니다.

화재 예방을 위해 '물'을 상징하는 검은색 기와를 사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사고전서>는 1773년에 편찬이 시작되었습니다. 문연각은 해녕 지역의 유명 장서각인 천일각의 구조를 참고하여 지어졌으며, 청나라가 세운 대표적인 장서처인 북4각과 남3각의 건축적인 규범이 되었습니다. 자금성에서 거의 유일하게 검은색 기와를 얹은 건물입니다.

1782

[도광제 탄생]

남3소의 힐방전에서 청나라 8대 황제 도광제가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미래 황실의 주역들이 성장하던 공간이었습니다.

남3소는 원래 황태자의 처소였으나 청나라 강희제 때 일반 궁인들의 처소로 바뀌었고, 1746년에 황자들의 처소로 재편되었습니다. 도광제(道光帝)가 이곳 힐방전에서 1782년 9월 16일 태어났습니다.

1796

[건륭제, 태상황으로 퇴위]

가경제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된 건륭제가 황극전에서 마지막 천수연을 거행했습니다.

자금성은 황제의 권력 이양이라는 중요한 국가 의례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건륭제는 가경제에게 제위를 물려준 뒤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났습니다. 황극전은 황제 즉위식, 결혼식, 책봉식 등 국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들이 열리던 장소였으며, 1894년에는 서태후의 60세 생일 하례, 1904년에는 서태후의 70세 생일을 하례하러 온 9개국 사절을 접견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1860

[서구 연합군, 자금성 점령]

제2차 아편전쟁 중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자금성을 점령했습니다.

이는 중국 황실의 권위가 흔들리고 서구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던 아픈 역사를 보여줍니다.

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자금성을 차지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점령했습니다.

1900

[진비의 비극적 죽음]

의화단 사건 중 서태후가 자금성을 도피했고, 개혁 성향의 광서제 애첩 진비가 진비정 우물에 던져져 익사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자금성은 열강의 침략과 황실 내부의 갈등이 교차하는 격동의 현장이었습니다.

1900년에 서태후는 의화단 사건 동안 자금성을 도망쳤고, 1901년까지 자금성이 군대에 의해 점령되도록 내버려뒀습니다. 진비정 우물이 유명해진 건 1900년에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서태후가 광서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도망치기 직전, 평소 개혁적인 성향으로 서태후의 눈밖에 난 광서제의 애첩 진비(珍妃)를 우물 속에 던져 익사시켰기 때문입니다. 1년 뒤 베이징으로 돌아온 광서제는 진비의 시신을 건져 후하게 장사지냈습니다.

1912

[청나라 멸망, 황제 퇴위]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퇴위하며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중국 황실의 역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자금성은 더 이상 중국의 정치적 중심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 웅장함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자금성은 14명의 명나라 황제와 10명의 청나라 황제, 총 24명의 천자를 모셨으며, 1912년에 푸이(선통제)가 퇴위할 때까지 중국의 정치적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새로운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고, 자금성의 외성은 공용으로 넘겨졌지만, 내성에는 1924년에 쿠데타로 쫓겨나기 전까지 푸이가 거주했습니다. 푸이는 신무문을 통해 자금성을 떠났습니다.

1925

[고궁 박물원 개원, 대중 개방]

황실의 전유물이었던 자금성이 '고궁 박물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이는 자금성이 모두의 유산으로 거듭나는 역사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1925년 10월, 자금성은 고궁 박물원(故宫博物院)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명, 청 시대의 황실이 수집한 엄청난 규모의 작품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습니다.

1948

[자금성 보물, 대만으로 이동]

국공 내전 중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이전하면서, 자금성에 있던 가장 가치 있는 보물 약 2,972개의 상자가 타이완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유물들은 현재 타이베이 국립 고궁 박물관의 핵심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1933년 일본 침략으로 자금성 보물이 피난 갔다가 2차 세계 대전 후 난징으로 임시 보관되었습니다. 이후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자, 당시 난징을 거점으로 하던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국부천대를 결정하며 난징에 있던 자금성 보물 중 가장 가치 있고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은 것들을 골라 약 2,972개의 상자를 배에 실어 대만으로 보냈습니다. 이 수집품들은 양은 작지만 당시 자금성의 보물들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것들이었고, 1965년까지 창고에 보관된 후, 타이페이의 국립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며 다시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한편 약 8,000여 개의 상자는 공산당에 의해 베이징으로 돌려보내졌고, 2,221개의 상자는 아직도 난징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961

[국가 중요 유물 지정]

중국 정부가 자금성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자금성의 역사적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 '명·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87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자금성은 '명·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자금성은 중국의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궁궐이기 때문에, 1987년에 '명과 청 황제의 궁궐'로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지정되었습니다.

2007

[스타벅스 자금성 폐점]

자금성 내에 입점했던 스타벅스가 '문화 유산 훼손' 논란 끝에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문화재 보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진 결과이자 승리였습니다.

2000년에 오픈한 스타벅스는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2007년 7월 13일에 문을 닫았습니다. 중국 언론은 2006년 외국 방문자에게 가격을 속이기 위해 중국 시민들의 입장은 거부하는 몇몇 기념품 숍에 대해서도 보도한 바 있습니다.

2012

[관광객 1,500만 명 돌파]

자금성은 매년 1,5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을 유치하며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16년과 2017년에는 1,6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2012년부터 자금성은 매년 1,500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을 받고 있으며, 2016년과 2017년에는 1,600만 명이 넘게 자금성을 다녀갔습니다.

2017

[트럼프 대통령, 자금성 만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금성 내부에서 만찬을 가졌습니다.

이는 자금성이 여전히 국제적인 상징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금성 내부에서 만찬을 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금성 내부에서 식사를 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중국 정부와 재단이 합작하여 진행한 영수궁 복원공사도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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