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혁명당 사건
공안 사건, 사법 살인, 인권 탄압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50:34
중앙정보부가 주도하여 두 차례에 걸쳐 조작된 공안 사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반국가 조직을 내세워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탄압했으며 특히 2차 사건에서는 사형 선고 18시간 만에 8명의 피고인에게 형을 집행하는 등 비인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사법살인으로 규탄받았으며 30여 년 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고 국가로부터 시국사건 사상 최대 규모의 배상을 받았다. 그러나 1차 사건 일부 유죄 판결 등 여전히 논쟁이 남아있는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1962
[김배영 일본 밀항]
인혁당 사건 관련자인 김배영이 일본으로 밀항하여 신분을 숨겼습니다.
그는 훗날 북한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며, 박정희 정권은 2차 인혁당 사건의 자금줄로 그를 지목했습니다.
1964
[1차 인혁당 사건 발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도예종, 양춘우 등 언론인과 학생 41명을 '인민혁명당' 결성 및 국가 사변 기획 혐의로 검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이 북한 노동당 지령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1심에서는 대다수가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검찰이 기소한 인원은 13명에 불과했습니다. 2심에서는 6명이 실형, 5명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김배영 북한으로 월북]
일본 경시청의 수배를 받던 김배영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통해 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는 훗날 남파 공작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집니다.
1967
[김배영 남파 및 체포]
월북했던 김배영이 북한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1971년에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박정희 정권은 그를 2차 인혁당 사건의 자금원으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1972
[유신 체제 발족]
박정희 정권이 강력한 독재 체제인 유신 체제를 발족시키며 인권 탄압과 국민 통제가 심화되었습니다.
이는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2차 인혁당 사건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1973
[김대중 납치 사건]
야권 지도자 김대중이 일본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더욱 거세졌습니다.
1974
[긴급조치 4호 공포]
박정희 대통령이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인민혁명을 기도한다고 주장하며,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습니다.
이는 이후 2차 인혁당 사건의 법적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 수사]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정부 전복 세력'으로 규정하고, 긴급조치 4호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024명을 영장 없이 체포했습니다.
이 중 253명이 구속 송치되었습니다.
[2차 인혁당 사건 발표]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고 발표하며, 이들이 민청학련의 국가 전복 활동을 지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즉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2차 인혁당 사형 선고]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부가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21명 중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 사형을, 7명에게 무기징역을, 나머지 6명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했습니다.
이는 군 검찰의 구형과 동일한 판결로, 사법 절차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을 남겼습니다.
재판은 민청학련, 인혁당 재건위, 일본인 사건으로 분리하여 진행되었습니다.
[민청학련 중형 선고]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32명에게도 이철, 유인태 등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되었습니다.
2명의 일본인에게도 징역 20년이 선고됐으나, 이들 대부분은 이듬해 특별조치로 석방되어,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의 차이를 보였습니다.
대부분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에 의한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습니다.
[조지 오글 목사 추방]
인혁당 사건 관련 신원 운동을 펼치던 개신교 성직자 조지 오글 목사가 정부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되었습니다.
1975
[2차 인혁당 대법원 확정]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고, 서도원 등 8명에게 사형을, 김한덕 등 7명에게 무기징역을 포함한 중형을 최종 확정했습니다.
당시 13명의 대법관 중 이일규 대법관만이 원심 재판의 불법성을 지적하며 판결에 반대했습니다.
당시 대법원장 민복기를 비롯한 다수의 대법관이 사형 판결에 동의했습니다. 이 판결은 이후 '사법살인'으로 강하게 비판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형수 8명 전격 사형 집행]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단 18시간 만에, 황산덕 법무부 장관의 서명으로 8명의 피고인 전원에 대한 사형이 새벽에 집행되었습니다.
이는 인권 유린의 극단적인 사례이자, 전 세계 사법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전례 없는 속도로 진행된 '사법살인'으로 규탄받았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는 이 사건을 맹렬히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동아일보가 이를 1면에 보도하며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일본 외무성 관료는 한국을 '야만국'이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송상진 시신 탈취 사건]
사형당한 송상진의 주검을 유족이 연미사를 위해 성당으로 옮기려 하자, 경찰이 시신을 탈취하여 강제로 화장 처리했습니다.
이를 막으려던 문정현 신부는 영구차 바퀴에 깔려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제임스 시노트 신부 추방]
인혁당 구명 운동을 펼쳤던 가톨릭 성직자 제임스 시노트 신부 또한 정부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되었습니다.
2002
[의문사위, 사건 조작 발표]
참여정부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라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는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005
[국정원도 사건 조작 인정]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사건을 조작했던 기관의 후신이 스스로 진실을 인정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사형 집행 30년 만의 재심]
2차 인혁당 사건의 사형 집행 후 무려 30년 만에 재심 청구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왜곡되었던 진실을 바로잡을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2007
[8인 사법살인 무죄 판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가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했던 피고인 8명에 대해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등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는 32년 전의 사법살인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역사적인 판결이었습니다.
재심에서 검찰은 이례적으로 구형 없는 논고를 진행하며 사실상 무죄 취지를 인정했습니다.
[최대 손해배상액 판결]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서울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시국사건 사상 최대 규모인 637억여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이는 국가 폭력에 대한 사법적 단죄이자 피해 회복의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배척하며, 과거사 진실 규명과 인권 회복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배상액은 원금 245억여 원에 이자 392억여 원이 더해진 금액입니다.
2010
[일본인 민청학련 무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10개월간 복역했던 일본인 다치카와 마사키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며, 조작된 사건의 진실이 다시 한번 밝혀졌습니다.
[박범진 전 의원 증언]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던 박범진 전 국회의원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인혁당은 국가 변란을 기도한 지하조직이었다'고 증언하며, 실제로 당의 강령과 규약을 보았고 입당 선서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인혁당의 강령이 '민족 자주적인 정권을 수립하여 북한과의 협상으로 통일을 시도한다'는 내용이었다고 언급하며, 과거사 위원회의 발표와 상반되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2011
[안병직 교수 주장]
안병직 교수가 저서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 기원과 미래》를 통해 인혁당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공산혁명을 위한 조직이었다고 주장하며,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역사 인식을 제시했습니다.
2012
[박근혜 대표 발언 논란]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는 MBC 라디오 인터뷰와 국회 기자들 앞에서 '인혁당 사건에는 두 가지 판결이 존재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013
[1차 인혁당 재심 무죄]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기소자 13명 중 9명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4명은 여전히 유죄로 남아, 인혁당 사건의 복잡한 진실과 지속적인 논쟁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