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전쟁

전쟁, 유럽사,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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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년부터 1559년까지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유럽 강대국들이 얽힌 대규모 전쟁. 나폴리 왕국 및 밀라노 공국 계승 갈등으로 시작해 영토와 권력 투쟁으로 확대. 합스부르크 왕가 승리 스페인 유럽 최강국 부상. 이탈리아 쇠퇴 및 야전 포병 머스켓 등 군사 기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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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4

[샤를 8세 이탈리아 침공]

프랑스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명분으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지지를 받으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허약한 용병군을 손쉽게 제압하고 나폴리를 정복했습니다.

프랑스군의 빠른 진격은 이탈리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유럽 각국이 이탈리아의 부와 약점을 인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샤를 8세는 25,000명(8,000명의 스위스 용병 포함)의 병력을 이끌고 나폴리를 십자군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도움을 받아 큰 저항 없이 이탈리아를 통과하며 나폴리 정복에 성공했습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용병들은 프랑스군에게 무능력하게 저항하다 패배했습니다.

1495

[반(反)프랑스 동맹 결성]

샤를 8세의 프랑스군이 나폴리를 정복하고 약탈하자,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크게 반발했습니다.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교황령,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이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베네치아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이는 프랑스군이 본국과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프랑스군의 나폴리 약탈에 반발하여 북부 이탈리아와 유럽 주요국들이 베네치아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이 동맹에는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교황령,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이 참여하여 프랑스-나폴리 사이의 길을 차단했고, 샤를 8세의 군대는 본국과의 지리적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세미나라 전투 승리]

프랑스 샤를 8세의 군대는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2세와 스페인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가 지휘하는 나폴리-스페인 동맹군을 완파했습니다.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본국 귀환 길은 베네치아 동맹군에 의해 막혔습니다.

프랑스군은 나폴리-스페인 동맹군을 완파했지만, 베네치아 동맹군이 프랑스-나폴리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프랑스군은 본국으로 귀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포르노보 전투와 철수]

북이탈리아 포르노보에 도착한 프랑스군이 베네치아 동맹과 충돌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 못한 채 전리품을 남겨두고 프랑스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 후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2세는 프랑스 수비군을 몰아내고 나폴리를 되찾았습니다.

1495년 7월 4일 북이탈리아 포르노보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베네치아 동맹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습니다. 7월 6일 벌어진 포르노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정적 승리 없이 전리품을 남겨두고 프랑스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샤를 8세가 프랑스로 물러난 후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2세는 전투를 통해 프랑스 수비군을 몰아냈습니다.

1499

[루이 12세, 밀라노 정복]

샤를 8세 사후 왕위에 오른 프랑스 루이 12세는 밀라노 공작 계승권을 주장하며 롬바르디아를 침공했습니다.

비스콘티 가문과의 혈통을 명분으로 내세운 루이 12세는 2만 7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밀라노를 공성전 끝에 정복하고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는 이탈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지속적인 야욕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 샤를 8세 사망 후, 루이 12세는 할머니 발렌티나를 통해 밀라노 비스콘티 가문의 혈통을 물려받았음을 주장하며 밀라노 계승권을 내세웠습니다. 그는 1499년 7월 1만 명의 기병과 5천 명의 스위스 용병을 포함한 27,000명의 군대를 이탈리아로 파견, 공성전 끝에 10월 6일 밀라노를 정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밀라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사로잡혔습니다.

1500

[나폴리 분할 협정 및 전쟁]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스페인 페르난도 2세와 나폴리 왕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양국 연합군은 1502년 나폴리를 점령했으나, 분할 조건에 대한 이견으로 동맹은 깨지고 전쟁으로 번졌습니다.

이는 유럽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변덕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프랑스 루이 12세는 나폴리 정복을 위해 신성로마제국, 영국, 스페인 등과 우호적 조약을 맺어두었습니다. 1500년 11월 그는 스페인 페르난도 2세와 나폴리 분할 협정에 합의했고, 1502년 연합한 프랑스-스페인 군대는 나폴리 왕국을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분할 조건에 대한 의견 차이로 결국 양국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1503

[스페인의 나폴리 장악]

스페인 장군 코르도바는 1503년 체리뇰라와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연이어 대파하며 스페인군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이 패배로 프랑스 루이 12세는 나폴리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나폴리는 스페인 총독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스페인은 이탈리아 남부에 확고한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스페인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1494년 1차 전쟁에서 무력했던 스페인군을 개혁했습니다. 1503년 4월 체리뇰라 전투와 12월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며 프랑스군을 나폴리에서 철수시켰습니다. 나폴리는 코르도바 장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508

[캉브레 동맹 결성]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확장을 우려하여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캉브레 동맹을 조직했습니다.

이 동맹은 베네치아를 견제하고 이탈리아 반도의 세력 균형을 재편하려는 유럽 강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반영합니다.

1503년 교황으로 선출된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확장에 심각한 우려를 표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2세, 스페인의 페르디난도 왕,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역시 베네치아를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 율리오 2세는 1508년 12월 프랑스, 교황령,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이 참가하는 캉브레 동맹을 조직하여 베네치아를 억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1509

[아냐델로 전투 승리]

캉브레 동맹군은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 군대를 크게 격파하며 동맹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파도바 공성전에서는 베네치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점령에 실패하며 전쟁의 양상이 복잡하게 전개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1509년 5월, 캉브레 동맹군은 아냐델로 전투에서 베네치아 군대를 크게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파도바 공성전에서는 베네치아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점령에 실패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은 대규모 용병군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되자 포위를 풀고 후퇴했습니다.

1511

[교황, 신성 동맹 결성]

교황 율리오 2세는 이제 프랑스의 루이 12세를 이탈리아의 가장 큰 위협으로 판단하고,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더 나아가 잉글랜드, 스페인, 신성로마제국까지 끌어들여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거대한 '신성 동맹'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교황이 직접 나서 유럽 정치의 판도를 뒤흔든 중요한 외교적 전환점이었습니다.

1510년이 되면서 교황 율리오 2세는 프랑스 루이 12세를 베네치아 이상의 위협으로 여기며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1510년 3월, 교황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스위스의 여러 주와 흥정하여 6,000명의 스위스군을 고용했습니다. 1년 후, 교황측 군대가 로마냐 근교에서 수차례 패배를 당하는 동안 교황은 프랑스에 대한 신성 동맹을 선언했고, 이 동맹은 잉글랜드, 스페인, 신성로마제국이 참가하면서 급속히 커졌습니다.

1512

[라벤나 승리, 프랑스 철수]

프랑스군은 라벤나 전투에서 스페인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지휘관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틈을 타 스위스군이 밀라노를 침공해 점령하자, 프랑스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밀라노에는 스포르차 가문이 다시 복위되었습니다.

가스통 드 푸아의 지휘 아래 프랑스군은 1512년 라벤나 전투에서 스페인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투 중 푸아가 전사했습니다. 이후 스위스군이 밀라노를 침공해 점령하자 프랑스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했고, 밀라노에는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가 공작으로 복위되었습니다.

1513

[노바라 전투 프랑스 패배]

프랑스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재침공했으나, 스위스 용병들은 노바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습니다.

이 해 신성 동맹은 베네치아, 프랑스,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라 모타, 긴가트, 플로든 필드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프랑스의 이탈리아 야욕을 좌절시켰습니다.

루이 12세가 밀라노 재침공을 시도했으나, 1513년 6월 노바라 전투에서 밀라노의 스위스 용병에 의해 프랑스 란츠크네히트 용병이 포위 공격을 받아 결정적 패배를 당했습니다. 신성 동맹은 이어서 1513년 10월 라 모타에서 베네치아를, 1513년 8월 긴가트에서 프랑스를, 1513년 9월 플로든 필드에서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연속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515

[프랑수아 1세, 마리냐노 승리]

루이 12세의 뒤를 이어 프랑수아 1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탈리아 원정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을 이끌고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을 격퇴했습니다.

이 승리로 교황과 스페인이 밀라노를 포기하면서 신성 동맹은 사실상 붕괴했습니다.

1513년 2월 교황 율리오 2세 사망 후 동맹을 이끌 리더십이 부재했습니다. 1515년 1월 프랑스 루이 12세가 죽고 프랑수아 1세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을 이끌고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을 격퇴했습니다. 이 전투 후 교황 레오 10세와 스페인이 밀라노를 포기하면서 신성 동맹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1516

[북이탈리아 프랑스에 항복]

마리냐노 전투 이후, 누아용 조약과 브뤼셀 조약이 체결되면서 북이탈리아 전체가 프랑스와 베네치아에 항복했습니다.

이로써 프랑스는 북이탈리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1516년 8월 누아용 조약 및 브뤼셀 조약에 의해 북이탈리아 전체가 프랑스와 베네치아에 항복했습니다.

1519

[카를 5세, 황제 즉위]

스페인 국왕 카를 5세가 신성로마황제로 선출되자 프랑수아 1세는 극심한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영토가 프랑스를 포위하는 형국이 되어 국가 안위에 심각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의 오랜 라이벌 관계를 격화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카를 5세)가 1519년 6월 신성로마황제로 선출되자 황제 선거에 고배를 마신 프랑수아 1세가 강한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영토인 스페인, 독일, 플랑드르 등으로 프랑스 영토가 둘러싸여 국가의 안위가 위협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1521

[프랑스의 전쟁 선포]

프랑수아 1세는 합스부르크와의 관계 악화를 빌미로 카를 5세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예상과 달리 교황 레오 10세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황제와 손을 잡았습니다.

잉글랜드 헨리 8세까지 합세하며 프랑스는 베네치아를 제외한 강력한 동맹군에 맞서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자 프랑수아 1세는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기대와는 달리 교황 레오 10세는 갑자기 황제와 화친하고 제국의 편에 섰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교황은 제국 황제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교황과 황제의 편에 서서 대프랑스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프랑스의 동맹은 베네치아 공화국 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1522

[비코카·세시아 전투 패배]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은 1522년 비코카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롬바르디아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1524년 세시아 전투에서도 다시 한번 심각한 패배를 겪으며, 프랑스군은 스페인의 아쿼버스 전술에 고전하며 이탈리아에서의 입지를 잃어갔습니다.

카를 5세는 1521년 프랑스로부터 밀라노를 빼앗아 1522년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에게 돌려주었습니다.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은 1522년 4월 비코카 전투에서 제국-스페인-교황령-밀라노군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면서 롬바르디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롬바르디아를 탈환하기 위해 재차 투입된 프랑스군 역시 1524년 4월 세시아 전투에서 제국-스페인군에게 심각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스페인의 아쿼버스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1525

[프랑수아 1세 파비아 포로]

프랑수아 1세가 직접 군을 이끌고 롬바르디아를 침공했으나,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군대에 완패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는 유럽 군주 사상 최초로 전쟁 중 적국의 포로로 잡히는 굴욕적인 사건을 겪었습니다.

이 패배는 프랑스의 이탈리아 야욕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1524년 10월 프랑수아 1세는 직접 프랑스군을 이끌고 롬바르디아를 침공했지만, 1525년 2월 파비아 전투에서 완패하고 그 자신도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는 유럽 역사상 드문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526

[프랑스-오스만 동맹 체결]

프랑수아 1세가 포로로 잡히자 프랑스는 왕의 석방을 위해 오스만 투르크 쉴레이만 대제와 전례 없는 기독교-무슬림 동맹을 맺는 파격적인 외교를 시도했습니다.

이 동맹은 유럽 기독교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결국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플랑드르, 부르고뉴를 포기하는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하고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가 스페인에 감금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프랑스는 왕을 석방하기 위해 일련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오스만 투르크의 쉴레이만 대제와 전례 없는 기독교-무슬림 동맹을 맺음으로써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 플랑드르, 부르고뉴를 모두 포기한다는 마드리드 조약에 동의한 후 1526년 2월에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쉴레이만 대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526년 8월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연합군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교황의 코냑 동맹 결성]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 세력이 비대해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프랑스,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와 함께 코냑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이 동맹의 목표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카를 5세의 영향력을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1526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힘이 커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1526년 5월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를 상대로 코냑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교황령뿐만 아니라 프랑스,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등이 이 동맹에 가입했으며, 동맹의 목표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카를 5세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1527

[제국군, 로마 약탈]

코냑 동맹의 분열로 프랑스군이 롬바르디아를 떠나자, 제국군은 로마로 진군하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제국군에게 구금당했으며, 이는 교황권의 위상에 큰 타격을 입히고 카를 5세의 이탈리아 내 영향력을 절대적으로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이 롬바르디아를 떠나자 제국군은 로마로 진군했습니다. 로마를 점령한 제국군은 로마를 약탈했으며,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제국군에 의해 구금되어 카를 5세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해야 했습니다.

1529

[캉브레 조약 및 동맹 이탈]

나폴리 공성전 패배 후 프랑스는 캉브레 조약을 체결하고 코냑 동맹에서 이탈했습니다.

이어서 베네치아도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으며, 10개월간 항전했던 피렌체마저 제국군에 패배하며 공화정을 폐지당했습니다.

이로써 카를 5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1528년 나폴리 공성전 패배 후 프랑스는 1529년 캉브레 조약 체결과 함께 동맹에서 이탈했습니다. 베네치아 역시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고, 1529년 피렌체는 제국군이 침공하자 10개월간 농성전을 벌였으나 패배했습니다. 피렌체의 공화정은 폐지되고 귀족정이 실시되었으며,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재종손자인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가 초대 피렌체 공작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카를 5세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이탈리아 반도에서 카를 5세의 영향력은 매우 커졌습니다.

1535

[밀라노 공작 사망, 전쟁 재개]

1535년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밀라노 계승권을 둘러싼 분쟁이 재발했습니다.

카를 5세는 자신의 아들 펠리페를 공작에 임명하려 했고, 이탈리아 북부 소유권을 주장하던 프랑수아 1세가 이를 거부하며 이탈리아 전쟁은 다시 불붙었습니다.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는 이미 두 차례 전쟁을 치렀습니다. 1535년 11월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카를 5세는 측근들을 보내 밀라노를 접수한 후 자신의 아들인 펠리페를 밀라노 공작에 임명하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반발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이탈리아 북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이를 거부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했습니다.

1536

[카를 5세, 프로방스 침공 실패]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에 대응하여 카를 5세는 프로방스를 침공, 엑상프로방스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마르세유로 향하는 길목을 철저히 방어하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공격은 프랑스를 압박하려던 카를 5세의 전략적 실패로 기록됩니다.

프랑스의 침공에 대응하여 카를 5세는 프로방스 지역을 침공했고 엑상프로방스로 진격했습니다. 1536년 제국군은 엑상프로방스를 점령했지만, 프랑스군이 마르세유로 향하는 모든 길을 막아서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제국군은 강력히 방어되고 있는 아비뇽을 공격하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퇴각했습니다.

[프랑스, 사보이아 침공]

프랑수아 1세는 2만 7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사보이아 공국으로 진군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사보이아 수도 샹베리를 순식간에 함락하고 토리노까지 점령하며 북이탈리아에서 강력한 공세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밀라노 공략에는 실패했습니다.

1536년 3월, 24,000명의 보병과 3,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프랑스군이 사보이아 공국으로 진군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사보이아 공국의 수도 샹베리를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1536년 4월 토리노까지 점령했지만, 밀라노 공략에는 실패했습니다.

1538

[니차 조약으로 전쟁 종결]

니차 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프랑스에게 토리노를 남겨주었지만, 이탈리아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서로를 증오했던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한자리에 앉는 것을 거부하여 교황 바오로 3세가 중재해야 했을 정도로 양국 간의 갈등은 깊었습니다.

1538년 6월 니차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고, 프랑스 손에 있던 토리노는 남았지만 이탈리아 지도에서 중요한 변화는 없었습니다. 니차 조약이 맺어질 때 서로를 증오하던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는 같은 방에 앉기를 거부하여, 교황 바오로 3세가 두 왕이 있는 다른 방을 오가며 협정을 중개해야 했습니다.

[프레베자 해전 패배]

니차 조약 후, 교황령, 스페인 등 유럽 기독교 국가들이 신성 동맹을 결성하여 오스만 해군을 격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에 참패하며 지중해에서의 오스만 세력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프랑스와 평화가 맺어진 이후 교황령,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몰타 기사단 등이 참여한 신성 동맹이 결성되어 오스만 해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1538년 9월 프레베자 해전에서 패배했습니다.

1541

[오스만, 헝가리 부다 점령]

오스만 제국군이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헝가리의 부다를 점령했습니다.

이 소식에 격분한 카를 5세는 복수를 위해 무리하게 알제 원정을 추진했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원정 실패는 프랑수아 1세가 다시 카를 5세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41년 8월 21일 오스만군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헝가리 부다를 점령했습니다. 9월 8일 제노바에서 이 소식을 접한 카를 5세는 분노하며 복수를 위해 알제 원정을 추진했으나, 안드레아 도리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악천후 속에 강행된 무리한 원정은 선박 침몰 등 엄청난 피해 속에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를 꺾고 밀라노 공작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로 판단했습니다.

1543

[프랑스-오스만, 니스 점령]

오스만 해군 사령관 바르바로사가 함대를 이끌고 마르세이유에 도착, 프랑스 해군과 역사적인 합동 작전을 펼쳤습니다.

양국 연합 함대는 카를 5세의 영지였던 니스를 공성전 끝에 함락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서유럽 강대국과 이슬람 세력의 전례 없는 군사적 협력이었습니다.

1542년 7월, 프랑수아 1세는 오스만과 동맹을 맺은 후 카를 5세에 선전포고했습니다. 1543년 6월 오스만 해군 사령관 바르바로사는 함대를 이끌고 마르세이유로 이동하여 프랑스 해군과 합동 작전을 펼쳤습니다. 프랑스-오스만 함대는 1543년 8월 당시 카를 5세의 영지였던 니스를 점령하고 성을 공성전 끝에 함락시켰습니다. 하지만 방어를 푸는 데는 한 달이 걸렸습니다.

1544

[세레솔레 전투 및 북프랑스 침공]

프랑스군은 세레솔레 전투에서 제국군을 격파하며 다시 한번 군사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카를 5세와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연합하여 북프랑스를 침공, 불로뉴와 수아송을 점령하는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연합군의 협력 부족과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정복지는 결국 단념되었습니다.

프랑스 사령관 당기앵 백작은 1544년 세레솔레 전투에서 제국 군대를 격파했지만, 롬바르디아를 통과해 더 나아가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카를 5세와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북프랑스를 침공하여 불로뉴와 수아송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잉글랜드 군 사이에 협력이 잘 되지 않았고, 맹렬한 오스만 제국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이 되자, 카를 5세의 주선으로 정복지는 단념되고 이전 상태로 되돌려졌습니다.

1551

[앙리 2세, 전쟁 선포]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은 앙리 2세는 프랑스의 안보와 이탈리아 영토 탈환을 목표로 카를 5세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제치고 유럽 정치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으며, 이로써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간의 마지막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547년 프랑스의 앙리 2세는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앙리 2세는 프랑스의 안전과 이탈리아의 탈환을 목표로 1551년 카를 5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합스부르크를 제치고 유럽 정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자 했습니다.

1554

[마르차노 전투 패배]

프랑스군이 토스카나를 침공했으나, 마르차노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에서의 프랑스 군사 작전이 어려움에 직면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였습니다.

1553년 프랑스는 토스카나 침공을 시도했지만 마르차노 전투(1554년 8월 2일)에서 패배했습니다.

1556

[카를 5세 은퇴, 합스부르크 분열]

강력했던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가 은퇴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분열은 유럽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탈리아 전쟁의 향방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556년 카를 5세의 은퇴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페르디난트 1세로 분열되었습니다.

1557

[생캉탱 전투 프랑스 패배]

전쟁의 주요 전선이 플랑드르로 옮겨진 가운데, 스페인 펠리페 2세와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연합군이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겼습니다.

이 패배는 프랑스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플랑드르로 전쟁의 초점이 이동하여 펠리페 2세는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공작과 연합해 프랑스를 생캉탱에서 패배시켰습니다.

1558

[칼레, 프랑스에 점령]

전쟁 막바지에 참전한 잉글랜드는 도리어 마지막 대륙 영토였던 칼레를 프랑스군에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에게 큰 타격이었고, 프랑스에게는 오랜 숙원 중 하나를 달성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잉글랜드는 전쟁의 마지막 해에 참전했지만 도리어 칼레를 프랑스에 점령당했습니다.

1559

[앙리 2세 불운한 죽음]

카토-캉브레지 조약 체결 후 평화를 축하하는 마상 창시합에 참여했던 프랑스 앙리 2세가 불운하게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사망했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프랑스 왕실에 큰 혼란을 야기했고, 이후 프랑스 종교 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평화에 대한 축하 기간 벌어진 마상 창시합에 참여한 앙리 2세는 불운하게도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15살 된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곧 죽고 말았고, 나아가 1562년 프랑스 종교 전쟁(위그노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 체결]

프랑스 앙리 2세는 국내 문제로 인해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수락,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사보이아 공국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에게 반환했습니다.

이로써 길고 긴 이탈리아 전쟁은 마침내 종결되었고, 합스부르크 스페인이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했습니다.

프랑스 앙리 2세는 국내 문제로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고,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였으며 사보이아 공국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에게 반환했습니다. 1559년 전쟁은 끝났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은 프랑스를 누르고 유럽 최강국임을 과시했습니다.

1561

[사보이아, 이탈리아어 공용화]

이탈리아 전쟁 후 사보이아 공국을 돌려받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은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고,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천도했습니다.

이로써 사보이아 가문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모호한 정체성을 벗어나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이탈리아 통일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에게 점령당했던 사보이아 공국을 돌려받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 공작은 1561년 공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었고 1563년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천도했습니다. 이로써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애매한 정체성을 가졌던 사보이아 가문은 이탈리아인으로 정착했고 300년 뒤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전신 사보이아 공국이 이탈리아 역사에 전면으로 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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