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작가, 언론인, 수필가, 시인, 교수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50:14
* 한국 단편소설의 거목 가산 이효석. * 경성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등단. * 구인회 활동을 통해 문학적 깊이를 더했으며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후학 양성. *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에서 섬세하고 유려한 필치로 자연과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려냄. * 자유로운 사고와 문학적 실험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김.
1907
[평창에서 태어나다]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난 이효석은 훗날 '메밀꽃 필 무렵'으로 한국 문학사를 수놓는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가 됩니다.
그의 삶은 고향의 자연만큼이나 풍요롭고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914
[초등 학교 입학]
8세가 되던 해, 고향 봉평면에서 100리 떨어진 평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합니다.
이때부터 그의 지적 탐구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 (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
[단편 '도시와 유령' 발표]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며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합니다.
이후 '행진곡', '기우' 등을 발표하며 동반자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였다.
1930
['가난뱅이 작가'의 고뇌]
'가난뱅이 작가'로 스스로를 자조하던 그는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직업을 찾습니다.
중학 시절 은사의 도움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하지만, 문인 작품을 검열하는 일에 대한 동료들의 비판에 부딪혀 결국 열흘 만에 그만두게 됩니다.
그의 양심과 문학적 자유를 지키려 했던 젊은 날의 고뇌가 엿보입니다.
그는 돈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 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
1933
[문학 동인 '구인회' 결성]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함께 문학 동인 '구인회'를 결성합니다.
이 시기 '돈', '수탉' 등 향토색 짙은 작품들을 발표하며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깊이 있게 구축해나갑니다.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
[숭실전문학교 교수 부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국문학과 영문학 교수로 부임하며 강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동시에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하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갑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국문학과 영문학 교수가 된 후, 강의 활동과 동시에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자진 폐교한 뒤 이를 승계한 대동공업전문학교가 신설되면서 이효석은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이어갔다.
1936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 발표]
한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불후의 명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합니다.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아름다운 자연 묘사와 애틋한 인간사의 조화로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하며, 그의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상징이 됩니다.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효석의 삶은 시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 영화를 즐겨 보았고,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이 그의 삶이었다.
1938
['장미 병들다' 출간]
서구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단편 '장미 병들다'를 발표하며 문학적 스펙트럼을 넓힙니다.
이 시기 이태준, 박태원 등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단편 작가로 인정받았습니다.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1939
[성(性) 본능 탐구 '화분' 발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화분'을 발표하며 문단에 또 한 번 새로운 경향을 제시합니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도 주목받았습니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1940
[사랑하는 가족의 상실]
사랑하는 아내 이경원과 차녀를 잃는 비극을 겪습니다.
이 큰 상실감으로 인해 깊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건강을 해치며 작품 활동에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부인 이경원과 차녀를 잃은 후 실의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못하다가 1942년 5월 25일 결핵수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1941
[왕수복과의 애틋한 사랑]
아내와 딸을 잃은 슬픔 속에서 당대 최고의 가수 왕수복과 애틋한 사랑을 나눴다는 가십이 있습니다.
그는 왕수복을 단순한 여가수가 아닌, 인격을 가진 여성으로 존중하고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외로웠던 시기, 그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던 관계로 평가됩니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이효석 작가는 가수 왕수복과 사랑했다. 부인 이경원, 차녀와 사별한 후에 외로웠던 이효석 작가는 왕수복을 다른 남성들과 달리 예쁜 여가수, 노래하는 꽃이 아닌 인격을 가진 여성으로서 존중하고 사랑했다.
1942
[결핵수막염으로 별세]
결핵수막염으로 인해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작가의 삶이 안타깝게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1942년 5월 25일 결핵수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1972
[묘소 첫 이장 (용평면)]
모친의 유골과 합장되어 있던 묘소가 영동고속도로 건설 공사로 인해 용평면 고속도로 변으로 이장됩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모친의 유골과 합장했으나, 1972년 영동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용평면의 고속도로 변으로 이장하였다.
1998
[묘소 두 번째 이장 (파주)]
영동고속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다시 한번 경기도 파주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됩니다.
고인의 마지막 안식처를 찾는 여정은 계속됩니다.
1998년 영동고속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하였다.
2021
[고향 평창으로 최종 이장]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고향인 강원도 평창군으로 다시 이장되어, 메밀꽃 피는 고향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2021년 고향인 평창군으로 다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