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화가, 서양화가, 예술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04:46:18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 그는 일제강점기 민족혼을 담은 그림으로 저항했고 한국 전쟁의 비극 속에서도 소 가족 등 향토적 소재로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극심한 가난과 가족과의 이별이라는 고통 속에서도 짧고 강렬한 예술혼을 불태우며 한국 미술사에 영원히 기억될 독보적인 족적을 남겼습니다.
1916
[이중섭 탄생 및 평양 이주]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평양 외가에서 성장하며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작고하자 가족과 함께 외가인 평양으로 거처를 옮겨 평양 내 손꼽히는 부자였던 외조부 덕분에 어려움 없이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33
[오산학교 입학 및 미술 입문]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서양화가 임용련에게 미술 교육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미술 세계에 입문했다.
중학교 졸업 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서양화가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교육을 받으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오산학교 시절 일본 미술전에 황소를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하여 일본 기자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았고, 친일 논조에 반발해 낙관 이름을 '둥섭'으로 바꿔 표기하는 등 민족정신을 표출했다.
1936
[일본 유학 시작]
일본 도쿄 제국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유학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듬해 도쿄 분카 학원으로 옮겨 혁신적인 학풍 속에서 예술을 공부했다.
1936년 일본 도쿄 데이코쿠 미술 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인 1937년 자유롭고 혁신적인 분위기의 도쿄 분카 학원으로 옮겨 유학 생활을 이어갔다.
1941
1941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던 조선인 화가 이쾌대, 진환, 최재덕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당시 일본 화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1943
1943년 자유미술가협회 특별상 태양상을 수상하며 일본 화단에서 주목받는 신예 작가로 떠올랐다. 이는 그의 작품 세계가 인정받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45
[고향 귀국 및 결혼]
해방 후 고향으로 귀국했고, 5월에는 도쿄 유학 시절 만난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와 원산에서 결혼했다.
1945년 고향인 평안남도 평원군으로 귀국했다. 같은 해 5월, 도쿄 분카 학원 유학 시절 만난 일본인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 1921~2022.08.13)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렸다.
1946
[원산사범학교 사직 및 응향 사건 연루]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잠시 재직했으나 1주일 만에 사직했다. 같은 해 친구 구상의 시집 《응향》 표지 제작에 참여했다가 '응향 사건'에 연루되었다.
1946년 원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했으나 1주일 만에 사직하는 짧은 교직 생활을 했다. 같은 해 친구 구상 등이 펴낸 시집 《응향》의 표지 제작을 맡았는데, 이 시집이 퇴폐적, 반인민적, 반동주의적인 작품으로 규정된 '응향 사건'에 연루되며 어려움을 겪었다.
1950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월남하여 경상남도 부산, 통영, 제주도 등지로 거처를 옮겨가며 힘든 피란 생활을 이어갔다. 특히 통영에서는 학생을 가르치며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1952
[극심한 가난과 가족의 일본행]
극심한 가난으로 그림 재료조차 살 수 없게 되자, 부인과 두 아들이 일본으로 떠나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한국 전쟁 중 그림 재료를 살 돈조차 없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52년 부인과 두 아들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가족과 헤어지게 되었다.
1953
[가족과의 짧은 재회]
부두 노동으로 마련한 돈으로 일본 처가를 방문하여 가족과 잠시 재회했으나, 1주일 만에 다시 헤어져 귀국했다.
1953년, 부두 노동으로 힘들게 번 돈으로 선원증을 마련하여 일본 처가를 방문, 잠시 동안 부인과 두 아들을 만났다. 하지만 일본에 오래 머물 수 없어 1주일 만에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외로운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955
[생애 마지막 개인전 개최와 좌절]
친구들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으나, 작품 판매 대금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좌절하고 거식증과 조현병 증세를 겪게 되었다.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도파백화점에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개최했다. 40여 점의 작품을 전시하여 20점을 판매하는 높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구매자들이 전쟁 후 어려운 형편을 핑계로 작품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거나 먹을 것으로 대신하여 실제 손에 쥔 돈은 미미했다. 이로 인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져 거식증과 조현병 증세에 시달리게 되었다.
1956
1956년 9월 6일,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41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친구들이 뒤늦게 그를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시신과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남아있어,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화가의 비극적인 마지막을 보여주었다.
1978
197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이는 한국 근대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의 예술적 업적과 공로를 기리기 위함이었다.
2005
[위작 논란 발생]
둘째 아들이 공개한 그림 8점이 경매에 나왔으나, 10월에 위작으로 판명되어 미술 시장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05년 3월 16일,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이 첫 공개하여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같은 해 10월 가짜로 밝혀지는 위작 논란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미술 시장에 큰 충격과 냉각을 가져왔다.
2007
2007년 3월 6일, 이중섭 화가를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었다. 이는 대중에게 그의 삶과 예술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6
2016년 9월 1일,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었다. 이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이중섭의 예술적 가치와 대중적 인기를 다시 한번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2022
2022년 8월 13일, 이중섭 화가의 평생의 반려자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부인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 여사가 향년 101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녀는 이중섭과의 애틋한 사랑과 그의 예술 세계를 기억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