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화가, 한국화가, 서양화가, 추상화가, 콜라주, 군상, 교수, 동양미술 교육자, 프랑스 귀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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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넘어 세계 미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 이응노는 동양화와 서양화를 아우르는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초기 전통 묵화부터 파리에서의 콜라주 그리고 인간 군상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표현한 군상 시리즈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며 발전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동양 미술을 알리는 데도 기여했지만 동백림 간첩단 사건 연루와 가족 관련 논란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진정한 예술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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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화가의 꿈을 안고 태어나다]

충청남도 홍주군 홍천면 중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17세에 가출했고, 서화가 김규진 문하생이 되어 서예·사군자·묵화를 교습받으며 '죽사'라는 호를 얻었습니다.

이응노는 1904년 1월 12일 충청남도 홍주군 홍천면 중리(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서 태어나 유아기를 거쳐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17살 때 가출하여 산제당 단청을 그리는 상엿집 칠장이로 전전하다가, 1923년 경성부에서 유명 서화가 해강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사군자·묵화 등을 교습받고 '죽사'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본격적인 예술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24

[조선미술전 입선으로 재능을 인정받다]

조선미술전에 '묵죽'을 출품하여 입선하며 젊은 나이에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공주, 대전 등지에서 활동하다 전주에 정착해 간판가게를 운영했습니다.

1924년 조선미술전에 '묵죽'을 출품하여 입선하며 젊은 나이에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1928년 공주, 대전 등지에서 활동하다 전주 중앙동에 정착하여 개척사라는 간판가게를 운영했습니다.

1931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부 특선]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부에서 '청죽'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전통 회화 분야에서의 실력을 확고히 다졌고, 이듬해 같은 전람회에 무감사로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부에서 '청죽'으로 특선을 차지하며 전통 회화 분야에서의 실력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이듬해 같은 전람회에도 풍죽, 대죽, 청죽을 무감사로 출품했습니다. 1933년에는 규영 정병조 선생에게 고암이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1935

[일본에서 새로운 예술을 탐구하다]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신문배급소를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며 예술적 지평을 넓혔습니다.

1935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서 신문배급소를 운영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동경 본향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1935년 제95회 일본미술협회전에 풍죽으로 입선하였으며,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1945년까지 선전과 일본 화원전에서 입선과 특선 또는 무감사로 계속 출품했습니다.

1939

[서울에서 첫 개인전 개최]

서울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여 남화 신작들을 선보였으며, 전통적인 사군자에서 벗어나 대상을 사실주의적으로 탐구한 현실 풍경화를 주로 선보였습니다.

1939년 서울 화신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으며, 작품은 남화신작들이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사군자에서 벗어나 대상을 사실주의적으로 탐구한 현실풍경화가 주를 이뤘습니다.

1945

[해방 후 귀국하여 '고암화숙'을 개설하다]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충남 예산의 수덕여관을 인수했고, 서울에 '고암화숙'을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한국 미술계의 재건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45년 42세가 된 이응노는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충남 예산의 수덕여관을 인수하여 동생 흥노에게 경영을 맡기고 서울에 '고암화숙'을 개설했습니다. 1946년 김영기, 배렴, 이유태, 장우성과 함께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으며, 조선미술가협회의 상임위원이 되어 한국 미술계의 재건에 앞장섰습니다.

1948

[홍익대학관 교수 부임]

홍익대학관(현 홍익대학교)에 부임하여 1950년 6월까지 재직하며 후학을 가르쳤습니다. 이 시기 전국 각지에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48년 홍익대학관(현 홍익대학교)에 부임하여 1950년 6월까지 재직했습니다. 1948년에서 1954년까지 대전문화원, 동아갤러리, 서울화신백화점, 광주, 홍성, 수원, 예산에서 개인전을 열며 폭넓은 활동을 펼쳤습니다. 1954년에는 경주 서라벌예술대학의 동양화과 교수로 취임했습니다.

1954

[국전 추천작가 거절 및 뉴욕현대미술관에 작품 기증]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폐단을 지적하며 추천작가 초대를 거절하고, 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 현대한국미술전에 '출범'과 '산'을 출품해 록펠러 재단이 구입하여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그의 국제적 인정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954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폐단을 지적하고 국전 추천작가로 초대받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현대한국미술전에 '출범'과 '산'을 출품하였는데, 록펠러 재단이 이를 구입하여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습니다.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 자크 라상느로부터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하라고 초청을 받았으며,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 초대전에 동양화가로는 유일하게 초대받아 '숲', '산', '은조'를 출품했습니다.

1956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 출판]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을 출판하여 자신의 예술 철학과 기법을 대중에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1956년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을 출판하여 자신의 예술 철학과 기법을 대중에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1958

[프랑스로 작품 활동 무대 이동]

한국 미술계의 비판과 새로운 예술적 도전을 위해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하기 전, 서울 중앙 공보관에서 도불 기념 개인전을 개최하며 한국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고했습니다.

1958년 12월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작품 생활의 무대를 바꾸었습니다. 떠나기 전에 서울 중앙 공보관에서 도불 기념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1959년 서독대사 리차드 허츠 박사의 주선으로 서독을 방문하여 1년간 쾰른, 본, 프랑크푸르트에 체류하며 부부전 및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1960

[파리 정착 및 국제 활동 시작]

파리에 정착하여 재불한국작가전에 출품하고, 미국 워싱턴 국제현대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60년 1월에 파리에 정착하여 재불한국작가전에 출품하였고, 미국 워싱턴 국제현대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파리 폴 파케티 갤러리의 그룹전에도 참여하였습니다.

1961

[독창적인 콜라주 기법 개발 및 국제전 출품]

생활고로 버려진 잡지를 이용해 작업하던 중 붓글씨의 '획'을 연상시키는 독자적인 콜라주 기법을 발전시켰고, 이 작품을 카네기국제미전에 출품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파리에서 새롭게 출발한 이응노의 생활은 궁색하여 작품을 제작할 재료가 없어 뜰에 버려진 낡은 컬러판 잡지를 주워서 그것을 물감 대신 캔버스에 뜯어 붙였습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새로운 전기가 되었고 콜라주 기법을 발견했습니다. 붙여지는 한 조각의 종이가 서예의 획과 같이 한 획 한 획의 힘과 절도가 중첩되고 집적되어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고암의 콜라주 작품 60호는 1961년 11월 개막된 카네기국제미전에 출품되었습니다.

1962

[파리 폴 파케티 갤러리 전속 계약]

파리의 폴 파케티 갤러리에서 '이응노, 콜라주' 초대전을 개최하며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프랑스 파리 살롱 콩파레종에 참가하는 등 유럽 화단에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1962년 11월 파리의 폴 파케티 갤러리에서 '이응노, 콜라주' 초대전을 개최하고 폴 파케티 갤러리와 전속으로 계약하였습니다. 또,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초대 개인전을 가졌고, 프랑스 파리 살롱 콩파레종에 참가하였습니다. J. Lassaigne, M. Ragon, P. Schneider 3인 평론가의 추천으로 파리 막스 카가노비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독일 뮌헨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1964

[파리동양미술학교 설립]

프랑스 화단의 예술가와 각계 인사의 후원으로 파리 세르누쉬 미술관 안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동양 미술의 보급과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회갑이 된 이응노는 1964년 11월 초 프랑스화단의 예술가와 각계 인사의 후원으로 파리 세르누쉬 미술관 안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린 카네기 국제미술제에 초대작품을 출품하였고, 스위스 오베르니에 누마가 갤러리와 파리 막스 카가노비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1965

[상파울로 비엔날레 은상 수상]

브라질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국제 미술계에서 그의 예술적 가치를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1965년 브라질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후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과 스위스 누마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1967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되다]

한국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의 동베를린에 방문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고국에 납치, 투옥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 조작되었고, 그는 한국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독의 동베를린에 갔다가 고국에 납치돼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영복은 자신의 재판이 빨리 끝나 대전교도소에 수용되면 이응노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이응노가 프랑스 정부의 탄원에 힘입어 빨리 출소했기에 만나지 못했다고 회고했습니다.

1969

[옥고 끝에 프랑스로 돌아가다]

프랑스 정부의 탄원에 힘입어 옥고 끝에 석방된 뒤, 예산 수덕여관에서 요양하다 프랑스로 돌아가 예술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대한민국 예술계와는 단절되었으나 국제적으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69년 3월 석방 후 예산 수덕여관에서 요양하다가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로 인해 대한민국 예술계와는 단절되었으나 스위스와 프랑스에 이어 일본·미국·벨기에를 중심으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파리의 동양미술학교에서 다시 프랑스인들에게 묵화기법을 지도했습니다.

1975

[현대화랑 개인전 및 국제 전시회 참가]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영국 브리스톨 시립미술관의 회화와 콜라주전에 출품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영국 브리스톨 시립미술관의 회화와 콜라주전에 출품하였습니다. 1976년 11월 파리에서 고려화랑을 개관하였고, 프랑스에서 'Ungno Lee'라는 그의 생애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같은 해 주앵빌 고등학교의 벽화를 제작했습니다.

1977

['무화' 개인전으로 한국과의 관계 단절 및 '군상' 시리즈 시작]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동백림 간첩단 사건'과 관련된 사상적 문제로 대한민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군상(群像)' 시리즈를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舞畵)'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사상적 문제로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그의 아내 박인경은 1977년 7월 31일 취리히에서 북한에 의해 발생한 백건우와 윤정희 부부 납치미수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군상(群像)’ 시리즈를 집중적으로 그렸습니다. 그의 초기 ‘군상’ 작품에서는 후기 문자추상에서 보이던 장식적인 양식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표현되었으며, 후반으로 들어오면서 이미지가 작고 단순해지면서 반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1983

[프랑스 시민권 취득]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며 그의 국적은 대한민국에서 프랑스로 바뀌었고, 이는 그의 예술 활동과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83년 이응노는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였습니다. 이후 1985년 일본 도쿄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1989

[프랑스 파리에서 타계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하여 8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예술 인생의 막을 내렸습니다.

1989년 1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하여 8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예술 인생의 막을 내렸습니다. 사후 1992년 프랑스 보쉬르센에 그를 기린 '고암서방'이 건립되었고, 2007년 대전광역시 서구 만년동에 이응노미술관이 개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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