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민족운동, 반외세운동,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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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4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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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과 기독교 포교에 대한 반감으로 일어난 대규모 민족운동. 의화단이라는 민간 조직이 주도했으며 부청멸양(청을 돕고 서양을 멸한다)을 구호로 내걸었다. 베이징 외국 공관 포위 사건으로 8개국 연합군이 청을 침공했고 결국 신축조약 체결로 막대한 배상금과 주권 침해를 초래하며 실패했다. 비록 한계가 명확했으나 중국 민족주의 각성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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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

[의화권 첫 등장]

백련교를 모태로 한 무술 단체 '의화권'이 청나라 관방 문서에 처음으로 기록되며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에는 통일된 조직 없이 각 촌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부유층을 위협해 재물을 나눠주는 자위 조직의 성격이 강했다.

1808

[의화권 금지령]

청나라 가경제 13년, 조정은 의화권을 '건전하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종교'로 규정하고 그 활동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백련교와 결합하며 권술 훈련에 종교적 성향이 더해져, 민간 신앙과 뒤섞이며 복잡한 종교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1894

[대도회 조직]

조현에서 유사단이 '보위신가(保衛身家)'를 내세우며 민간 무술단체인 대도회를 조직했다.

이는 이후 의화단 운동에 합류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1896

[대도회 반기독교 투쟁]

유사단이 이끄는 대도회가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했으나, 청나라 조정은 양강총독 유곤일과 산둥순무 이병형을 파견하여 이들을 평정했다.

그러나 반기독교 정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산발적으로 지속되었다.

1897

[독일의 산둥 점령]

독일 제국이 산둥성 일대를 점령하면서 이권 침탈을 심화시켰고, 이에 반발한 의화권의 반외세 및 반기독교 운동이 더욱 격화되었다.

이들은 다른 민간 자위 조직과 통합하여 스스로 '의화단'이라 칭하며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 선교사 살해]

조주부 거야현에서 대도회 무리들이 독일 선교사 2명을 살해하는 '거야교안'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독일 제국이 산둥성 교주만을 세력 범위로 삼고 조차하는 빌미를 제공했고, 이로 인해 산둥순무 이병형이 파직되는 등 국제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이후 의화단의 반외세 운동이 격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98

[의화단 운동 본격화]

독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 활동이 왕성했던 산둥성 북부 지역에서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을 돕고 서양을 멸한다)'을 구호로 내건 본격적인 의화단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해 여름부터 극심한 가뭄으로 유민이 대거 발생하며 의화단에 합류하여 세력이 급증했다.

[영국의 웨이하이웨이 점령]

영국군이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강제로 점령하고 조차하며 산둥인들의 위기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이는 열강의 중국 이권 침탈 심화의 또 다른 사례로, 반외세 감정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의화권으로 명칭 변경]

기존의 '신권'이 '의화권'으로 명칭을 고쳐 활동 지역을 넓혔고, 대도회 역시 '의화권'으로 이름을 바꿔 산둥성 전 지역으로 의화권의 활동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는 의화단 운동의 초기 확장 단계로 볼 수 있다.

['의화단' 호칭 첫 사용]

산둥순무 장여매가 의화권 세력을 단련시켜 각 향의 자위 조직으로 삼자고 청정에 건의하며, 상주문에 '의화단'(義和團)이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는 의화단이 공식 문서에 등장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관현교안 발생]

조삼다, 염서근 등 18명의 '18괴'가 이끈 호묘(護廟) 투쟁인 '관현교안'이 일어났다.

이들은 이원둔의 옥황묘를 헐고 천주교 성당을 지으려는 것에 반대하며 '부청멸양' 구호를 공개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기독교와 서양 침략을 연계시키고 부자를 털어 가난한 사람을 구하자는 내용으로 대중적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1899

[선교사에게 '관함' 부여]

청나라 조정이 선교사들에게 '관함'(官銜) 즉, 관의 직위를 부여하여 정식으로 지배, 통치자의 신분을 인정해주었다.

주교는 총독과 순무와 같은 반열에 서게 되었고, 이는 천주교 선교사뿐 아니라 최혜국대우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도 적용되어 선교사 세력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의화단 운동 공식 시작]

청나라 말기 외세 배척 운동인 의화단 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날이다.

산둥 지방에서 시작되어 화북 지역으로 확산되며 외세의 이권 침탈과 기독교 포교에 대한 저항을 본격화했다.

[위안스카이 의화단 탄압]

새로 부임한 산동순무 위안스카이가 열강의 요구에 따라 의화단을 강력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탄압은 오히려 의화단 세력이 허베이성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어 의화단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이들은 철도, 교회, 전선 등 모든 외래적인 것을 파괴하며 기독교도들을 학살했다.

1900

[서태후 폐위 시도 좌절]

서태후가 황제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조카딸 소생인 부준을 황태자로 앉히려는 '기해건저' 계획을 시도했으나, 열강의 공동 압력으로 좌절되었다.

이 사건은 서태후의 열강에 대한 불만을 극도로 증폭시키며, 이후 의화단에 대한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열강, 진압 최후통첩]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4개국 공사가 청 정부에 의화단 활동 엄금을 요구하며, 2개월 이내 진압하지 못하면 육군과 해군을 파병하여 직접 평정하겠다는 조회를 보냈다.

이는 열강의 개입 명분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열강 군대 베이징 진입]

베이징 주재 각국 공사들이 회의를 소집하여 '공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베이징으로 군대를 끌어들이기로 결정하고, 이 사실을 청나라 총리아문에 통보했다.

이는 의화단 운동이 국제적 군사 개입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발단이 된다.

[열강 군대 베이징 입성]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의 4개국 군대 400명이 베이징으로 진입했다.

이는 청나라가 열강의 무리한 요구를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입장에서 허락한 것으로, 서태후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의화단 베이징 입성]

의화단이 베이징으로 물밀듯이 들어와 외국 공관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베이징 주민들까지 의화단에 가담하여 그 수가 10만 명에 육박했고, 일부 왕부와 대신들도 의화단을 지지하는 등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시모어 원정대 좌절]

영국 해군 제독 시모어 지휘 아래 8개국 연합군 2,129명이 톈진을 출발해 베이징으로 향했으나, 의화단의 강력한 저지와 청군의 공격을 받아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톈진 조계로 물러나야 했다.

이는 연합군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같은 날 의화단은 시산의 영국 공관을 소각하고, 일본 공사관 서기관이 살해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일본 공사관 서기관 피살]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야마 아키라가 의화단을 지지하는 청나라 장군 동복상의 감군(甘軍)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외국인에 대한 의화단의 적대감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며 국제 사회의 공분을 샀다.

[다구 포대 함락]

톈진 다구 포대 밖에 정박해 있던 32척의 외국 군함이 상륙하여 다구 포대를 점령했다.

이 사건은 청나라 조정의 선전포고를 촉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톈진 함락의 서막을 열었다.

[독일 공사 케텔러 피살]

독일 외교 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 남작이 총리아문에 항의하러 가던 중 숭문문 앞 큰길에서 청군과 의화단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국제 사회를 격분시켰고, 서태후의 선전포고 결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이징 거리에는 '양인 살해 현상금' 벽보가 나돌며 폭동과 테러가 난무했다.

[청, 열강에 선전포고]

서태후가 열강이 제시한 4가지 요구 사항(실제로는 날조)에 자극받아 '결사항전'을 선언하며 선전포고 조서를 내렸다.

이로써 청나라는 8개국 연합군과의 전면전에 돌입했으며, 의화단과 동복상의 감군(甘軍) 등이 베이징 외국 공관과 천주교회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남호보 선언 제안]

서태후의 선전포고 지시를 받은 호광총독 장지동과 양강총독 유곤일이 동남지역의 안정을 위해 '동남호보(東南互保)' 즉, 중앙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체적으로 외세와 협상하여 지역을 보전하자는 의견을 논의했다.

이는 이후 지방 관료들이 중앙의 명령을 거부하는 중요한 선례가 된다.

[동남호보약관 체결]

성선회, 여련원이 장지동과 유곤일을 대표하여 상하이 주재 각국 영사들과 정식 담판을 시작, '동남호보약관'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양강, 호광, 양광을 포함한 산둥, 복건, 절강, 안휘성 등 광범위한 남동부 지역이 의화단 활동으로부터 격리되고 사회 경제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연합군이 의화단 진압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연합군 톈진 함락]

다구 포대를 점령한 연합군이 톈진으로 진격하여 도시를 함락시켰다.

연합군은 톈진을 몇 구로 나누어 점령하고, 러시아, 일본, 영국이 지정한 세 사람이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톈진 도통아문'이라는 식민통치 기구를 설립했다.

이는 청나라 영토에 대한 열강의 직접적인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러시아 만주 아이훈 점령]

의화단 전쟁을 빌미로 20만 명의 러시아군이 만주로 내려와 아이훈을 점령하며 만주 침략을 본격화했다.

이는 훗날 러일전쟁의 중요한 배경이 된다.

[연합군 베이징 함락]

톈진을 출발한 8개국 연합군 18,300명이 격전을 치른 끝에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의화단에게 55일간 포위당했던 외국 공사관 구역을 해방시켰다.

이로써 청나라 수도는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고, 서태후와 광서제는 서안으로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서태후, 베이징 탈출]

연합군이 자금성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서태후와 광서제, 소수 측근들은 베이징을 탈출하여 서안으로 피신했다.

이때 서태후는 감금하고 있던 광서제의 황후 진비(珍妃)를 우물에 밀어 넣어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베이징 연합군 약탈]

베이징을 점령한 8개국 연합군은 3일간 의화단 색출을 명분으로 끔찍한 살인, 약탈, 강간 등 범죄를 자행했으며, 희생자의 대부분은 의화단과 무관한 민간인이었다.

특히 독일군의 잔혹성이 심했고, 자금성 등 주요 기관에서 귀중한 문화재와 재물이 약탈되었다.

연합군은 베이징 시내 거리와 집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잡아갔고, 잡혀간 사람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의화단 잔당 소탕 작전'을 명분으로 보복성 폭행과 약탈은 광분에 달했으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훈족 연설'이 독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림원의 '영락대전'을 비롯한 귀중한 전적 4만 6천여 본이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4개국에 의해 약탈되었고, 은 6천만 냥과 녹미까지 탈취당했다. 서태후가 복원한 이화원도 약탈되었다.

[러시아 만주 치치하르 점령]

만주 남하를 계속하던 러시아군이 치치하르를 점령했다.

이는 러시아의 만주 전역 점령 계획의 일환이었다.

[의화단 지지자 1차 처벌]

열강의 강화 조건 중 하나인 의화단 관련자 처벌 요구에 따라, 청나라 조정은 장친왕 재훈, 단군왕 재의 등 의화단을 지지했던 왕과 대신들의 작위를 박탈하고 파직하는 1차 처벌을 단행했다.

하지만 열강은 처벌 수위와 대상이 약하다고 항의했다.

[러시아 만주 선양 점령]

러시아군이 만주의 주요 도시인 선양(盛京)을 점령하며 만주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이홍장 강화 협상 개시]

서태후의 지시를 받은 이홍장이 러시아 제국의 호위 아래 베이징으로 돌아와 열강과의 강화 협상을 시작했다.

러시아는 이홍장을 '친러시아파'로 간주하여 그를 전권으로 승인하며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다.

[의화단 지지자 2차 처벌]

열강의 계속되는 항의에 청나라 조정은 의화단 지지자에 대한 2차 처벌을 단행했다.

그러나 열강은 여전히 불만을 표출했다.

[러시아, 만주 협약 강요]

랴오둥반도의 러시아 총독 알렉세예프가 성징 장군 증기에게 '임시 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이 조약은 만주에서 청나라의 통치권을 사실상 배제하는 내용이었으나, 청나라는 증기에게 서명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며 비준을 거부했다.

[열강, 강화 조건 제시]

8개국 연합군 외 네덜란드, 벨기에, 에스파냐가 합세한 11개국이 공동으로 청나라 정부에게 '의화대강 12조'라는 강화 조건을 제시했다.

이 조건은 수정 불가를 통보하며 청나라에 강력히 요구되었다.

[서태후, 강화 조건 수용]

서안으로 피신해 있던 서태후는 열강이 제시한 '의화대강 12조'에 자신이 처벌 대상에서 제외된 것을 확인하고, 청조 유지를 위해 어떤 가혹한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생각으로 경친왕 혁광과 이홍장에게 이를 따르도록 지시했다.

이로써 세부적인 화의 토의가 시작되었다.

1901

[의화단 지지자 3차 처벌]

열강의 불만 표출이 계속되자 청나라 조정은 의화단 지지자에 대한 3차 처벌을 단행하며 자살 명령 및 사형 집행 등의 강도 높은 조치를 취했다.

[의화단 지지자 4차 처벌]

열강의 요구에 따라 청나라 조정은 의화단 지지자에 대한 4차 처벌을 최종적으로 단행하며 주요 책임자들에게 강도 높은 처벌을 내리고, 의화단 소탕을 요구하다 파직된 사람들을 복직시켰다.

[신축조약 체결]

경친왕 혁광과 이홍장이 청나라를 대표하여 서양 11개국 대표와 베이징에서 '신축조약(辛丑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연리 4% 이자로 6750만 파운드, 39년간 지불)을 지불하고, 다구 포대 해체, 베이징 공사관 구역 및 철도 연변에 열강 군대 주둔을 허용하는 등 심각한 주권 침해를 겪게 되었다.

이는 사실상 청나라를 무장해제 시킨 격이었다.

조약에는 할지(영토 할양)는 없었으나, 톈진에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조계지가 추가로 설정되어 톈진의 조계지가 9개국으로 늘어났다. 독일 공사 케텔러 사망에 대한 사죄 사절로 순친왕이 독일로 파견되어 치욕적인 대우를 받았으나 무릎 꿇는 수모는 모면했다. 배상금 지불은 1901년부터 1938년까지 30년이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및 러시아 혁명 등으로 약 5억여 냥을 되돌려 받게 된다.

[서태후, 베이징 귀환]

신축조약 체결 이후, 서안으로 피신했던 서태후와 광서제가 동관을 거쳐 뤄양을 경유하여 베이징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듬해 1월 7일에 베이징에 도착하게 된다.

1902

[서태후, 베이징 완전 복귀]

서태후와 광서제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서태후는 의화단을 적으로 선포하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진압을 명함으로써 의화단 사건을 최종적으로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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