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하버마스

독일 철학자, 사회학자, 비판이론가, 언론인

num_of_likes 70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48:16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독일 철학자, 사회학자, 비판이론가, 언론인
report
Edit

- 20세기 후반 서양철학계의 거장이자 현대 사회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 - 비판이론 실증주의 실용주의 등 다양한 분야를 융합해 독창적인 사회 이론과 인식론을 구축. - 의사소통 합리성 담론 윤리 공론장 개념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이성과 인간 해방의 잠재력을 탐구. - 좌우 전체주의적 행동을 비판하고 민주주의적 정치 문화 진작에 적극적으로 기여. - 선천적인 언어 장애를 극복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의사소통 이론을 발전시킨 독특한 삶의 궤적을 지녔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929

[언어 장애를 안고 태어나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선천적으로 구순구개열(언청이) 장애를 안고 태어난 하버마스는 어린 시절 동네 소년들의 놀림에도 개의치 않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열성분자로 분류되어 히틀러 유겐트 정규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는데,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약자까지 배려하는 의사소통 이론을 정립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원문 내용에 충분.

1949

[학문의 길로 들어서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철학을 수학하기 시작한 이후 1954년까지 괴팅겐, 취리히, 본 등 다양한 대학에서 철학, 심리학, 독문학, 경제학 등 폭넓은 학문을 공부하며 자신의 학문적 기초를 단단히 다졌다.

원문 내용에 충분.

1956

[비판 이론의 시작]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사회연구소에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조교로 들어가면서 비판 이론의 세계에 입문했다.

이는 그의 철학적 여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가 이후 전개할 독자적인 사상 체계의 씨앗이 되었다.

원문 내용에 충분.

1961

[하이델베르크 교수 임용]

당시 서른두 살의 나이로 아직 교수 자격 논문도 통과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는 그의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일찍이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원문 내용에 충분.

1964

[비판이론의 공식 후계자]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로 돌아와 철학 및 사회학 교수가 되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비판 이론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이로써 그는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어 아도르노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중요한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 독일 사상계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원문 내용에 충분.

1965

[전체주의 비판, 논란을 낳다]

1960년대 중반부터 좌우 이념에 상관없이 전체주의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이는 파시즘이 특정 정치 이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그의 통찰을 보여주며, 당시 사회에 중요한 논쟁점을 던졌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이후 격렬한 논란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원문 내용에 충분.

1971

[‘좌파 파시즘’ 발언과 갈등]

1960년대 말 격렬했던 서독 학생운동 세력과의 갈등으로 교수직을 사임하고 슈타른베르크의 막스 플랑크 과학기술세계 생활조건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시위를 '마조히즘', '좌파 파시즘'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극렬한 학생운동권의 적이 되었고, 이는 좌익 진영의 편협성을 지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10여 년간 연구소에 파묻혀 오직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며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탄생시켰다.

원문 내용에 충분.

1981

[『의사소통 행위론』 출간]

오랜 사색과 탐구를 거쳐 그의 핵심 사상인 '의사소통 행위 이론'이 집대성된 저서 『의사소통 행위론 1, 2』를 출간했다.

이 책은 영미 언어 분석 철학의 성과를 폭넓게 수용하여 '화용론적 전회'를 감행하고, 담론 윤리학과 의사소통적 이성의 합리성 개념을 체계화하여 현대 철학사에 큰 획을 그으며 그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원문 내용에 충분.

1982

[프랑크푸르트대 복직]

10여 년간의 연구 활동 끝에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에 복직하며 학계로 돌아왔다.

이 시기부터 그는 1960년대 실증주의 논쟁을 시작으로 역사가 논쟁, 현대-탈현대 논쟁, 독일 통일 논쟁 등 2차 대전 이후 독일 현대사의 거의 모든 주요 논쟁에 참여하며 독일의 민주주의적 정치 문화 진작에 크게 기여했다.

원문 내용에 충분.

1986

[한국 내 금서 지정]

제자인 송두율 교수의 스승이라는 이유로 1986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그의 서적이 국내에 입수되지 못했으며, 번역 시도조차 무산되는 등 학문적 교류에 큰 제약을 받았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의 경직된 이념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이후 1987년부터 서적이 출간되었으나 1994년부터 활발히 번역되기 시작했다.

원문 내용에 충분.

1996

[명예로운 정년퇴직]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하며 명예교수가 되었다.

이후에도 활발한 저술 및 연구 활동을 이어가며 세계 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원문 내용에 충분.

2001

[독일서적상인 평화상]

독일서적상인 연합회 평화상을 수상하며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평화와 인류 이해 증진에 기여한 사회적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상은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화상 중 하나로, 그의 영향력이 학계를 넘어선 대중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원문 내용에 충분.

2003

[송두율 교수 피신 조언]

제자인 송두율 교수가 한국 귀국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선고받아 감옥에 있을 때, 그가 '안중근 평화상'을 받는 것을 감옥 밖에서 직접 받는 것으로 오인하여 송 교수에게 독일 대사관으로 피신하라고 일러주기도 했다.

이는 한국 문제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과 제자를 향한 염려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원문 내용에 충분.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