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바로크 음악가, 교회 음악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2:55:12
- 바로크 시대 음악의 정수를 보여준 독일의 위대한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 독일 전통 음악에 이탈리아 프랑스 양식을 융합하여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함. - 200년간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명문 바흐 가문의 일원으로서 경건한 신앙심과 뛰어난 장인정신을 음악에 담아냈다. - 사후 한동안 잊혔으나 1802년 요한 포르켈에 의해 재조명되며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 오늘날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다.
1685
[음악 명가 막내의 탄생]
독일 튀링겐 지방 아이제나흐에서 거리의 악사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성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바흐 가문은 200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명문 음악가계였으며, 신앙과 장인정신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두 가지 중요한 기질이 되었다.
1694
[9세, 음악 스승이 된 형]
9세에 양친을 모두 잃은 바흐는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가 살던 오르돌프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우며 음악적 토대를 다지기 시작했다.
1700
[음악 명문에서의 성장]
형의 생활고로 15세에 뤼네부르크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곳에서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게오르크 뵘과 얀 아담스 라인켄을 만나며 음악적 시야를 넓히고 큰 영향을 받았다.
1703
[궁정 악단 바이올린 주자]
학교 졸업 후 자활을 위해 18세의 나이로 잠시 바이마르 궁정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며 실전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교회 오르가니스트 데뷔]
바이마르 궁정을 떠나 아른슈타트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며 본격적인 교회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오르간 연주와 작곡에서 크게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시대에 북독일 뤼베크를 찾아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그의 화려한 오르간곡에 명확한 영향을 남겼다.
1707
[마리아 바르바라와의 결혼]
뮐하우젠 시대에 먼 육촌 누나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이 결혼을 통해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 중 다수는 훗날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했다.
1708
[오르간 대가로 귀환]
23세의 나이로 젊은 대가가 되어 바이마르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돌아왔다.
이 시기는 바흐의 '오르간곡 시대'로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곡의 태반이 작곡되어 그의 이름이 독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14년에는 궁정악단의 콘서트마스터로 임명되어 매달 뛰어난 교회 칸타타를 작곡했고, 비발디 등의 이탈리아 협주곡을 연구하며 후기 작품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717
[쾨텐 악장, 걸작들의 탄생]
당시 음악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인 쾨텐 궁정의 악장으로 취임했다.
개혁교회 지역 특성상 세속적인 합주곡과 실내악 작곡에 집중하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 그의 대표적인 세속 기악곡 대부분을 탄생시켰다.
1720
1721
[새로운 사랑, 대가족]
16세 연하의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아이를 얻었으며, 이들 중 빌헬름 프리데만,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요한 크리스티안은 음악사에 이름을 남기는 작곡가로 성장했다.
쾨텐 시대에는 자녀들과 제자들을 위해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과 《인벤션》 등 수많은 클라비어곡을 작곡했다.
1723
[라이프치히, 교회 음악의 정점]
쾨텐 궁정의 재정 악화와 대공비의 음악 무관심 등으로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 겸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 옮겨 27년간 활동했다.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정력적인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 초반에 《마태 수난곡》, 《나단조 미사》,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등 약 160곡의 뛰어난 교회 칸타타를 작곡했다.
1729
[대공을 위한 장송곡]
사망한 레오폴트 대공의 장례식에서 장송음악을 지휘하기 위해 쾨텐을 방문했다.
이때 연주된 'Koethner Trauermusik'은 후일 그의 대표작인 《마태 수난곡》으로 확대되었다.
1736
[새로운 창작의 전환점]
시 당국자 및 교회 책임자들과의 잦은 충돌로 교회 음악 창작에 대한 열의가 줄어들자, 세속 칸타타와 기악곡에 집중하며 작품을 정리하고 적극적으로 출판하는 새로운 경향을 보였다.
이 시기에 클라비어를 위한 《파르티타》, 《이탈리아 협주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이 탄생했다.
1747
[대왕 앞 즉흥 연주]
포츠담 궁정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여, 왕이 제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선보였다.
이 만남은 대왕에게 헌정한 대작 《음악적 헌정》을 작곡하는 동기가 되었다.
1748
[푸가 기법 작곡 착수]
생애 최후의 대작이자 미완성으로 남은 걸작 《푸가 기법》의 작곡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의 음악적 사유와 기법의 정수를 담고 있다.
1749
[뇌일혈, 시력 악화]
뇌일혈로 졸도한 후 시력이 크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후 돌팔이 안과 의사에게 백내장 수술을 두 번 받았으나, 오히려 증세가 더욱 악화되며 음악 활동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
1750
[음악의 아버지, 영면]
잘못된 수술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푸가 기법》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바로크 시대 음악은 종말을 고했다.
1802
[포르켈, 바흐를 깨우다]
사후 한동안 잊혔던 바흐를 독일 음악사학자 요한 포르켈이 세계 최초로 연구하여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을 발표했다.
이 책은 전 유럽에 바흐 광풍을 몰고 오며 그의 음악이 재평가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근대 인문학으로서의 음악사학 발전과 낭만주의 시대의 흐름 속에서 바흐는 핵심 레퍼토리로 부상했고, 오늘날 그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