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브람스

클래식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num_of_likes 55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2:51:16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요하네스 브람스
클래식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report
Edit

- 독일을 대표하는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 바흐 베토벤과 함께 3B로 불리며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김. - 고전주의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이고 깊이 있는 서정성을 창조. - 4개의 교향곡과 독일 레퀴엠 등 수많은 걸작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음.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833

[브람스 출생]

독일 함부르크에서 도시 음악가 요한 야코프 브람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첫 음악 교습을 받으며 일찍이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요한 야코프 브람스는 호른과 더블베이스 연주자였으며, 자신보다 17세 연상인 재봉사 요한나 헨리카 크리스티아네 니센과 결혼했습니다. 브람스 가족은 함부르크 북부 근교의 작은 집에 살았습니다.

1840

[피아노 교육 시작]

7세의 나이에 오토 프리드리히 빌리발트 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슈베르트의 친구였던 에두아르트 마르크센에게서 심도 있는 피아노 교육을 받으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어린 시절 브람스가 더러운 술집에서 피아노를 쳤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져 왔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브람스 본인이 이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어 논란은 남아있습니다. 10대 초부터는 합창단을 지휘하며 지휘 능력도 키웠습니다.

1853

[음악계 거장들과 만남]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에두아르트 레메니의 반주를 맡아 연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여정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만나 우정을 쌓고, 바이마르 궁정에서 당대 최고 거장이었던 프란츠 리스트를 만나는 등 중요한 인물들과 교류하게 됩니다.

리스트는 브람스의 스케르초 Op.4를 초견으로 연주하며 그의 재능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브람스가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 리스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브람스는 당시 여행으로 지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슈만의 극찬과 발굴]

요아힘의 소개로 로베르트 슈만을 만나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슈만은 《음악신보》에 '새로운 길'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브람스를 '이 시대의 이상적인 표현을 가져다 줄 젊은이'로 극찬하며, 그를 음악계에 공식적으로 알렸습니다.

이는 브람스의 음악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슈만의 극찬은 브람스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완벽주의적인 그의 성격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뒤셀도르프에 머무는 동안 슈만, 알베르트 디트리히와 함께 요아힘을 위한 'F-A-E 소나타'를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1854

[클라라 슈만과의 관계]

로베르트 슈만이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 병원에 입원하자, 슈만의 아내이자 유명 피아니스트인 클라라 슈만과 가까워졌습니다.

브람스는 평생 클라라에게 플라토닉한 연정을 품었으며, 슈만 가족을 돌보며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브람스는 클라라 슈만보다 14살 연하였으며, 그녀에게 평생 깊은 존경과 애정을 보였습니다. 이 시기 슈만의 자살 시도와 입원은 브람스의 작품 활동에도 영향을 미쳐, 훗날 '독일 레퀴엠'의 초기 판본에 쓰일 곡을 작곡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59

[사랑과 첫 협주곡의 좌절]

아가테 폰 지볼트와 약혼했으나 이내 파혼하여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자신의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초연했으나, 초기 몇몇 공연에서는 비평가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브람스는 낭만적인 관계에 여러 번 얽혔지만, 끝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작곡가 본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지만, '신독일 악파'로부터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등 양분된 평가를 받았습니다.

1862

[빈 활동 시작]

처음으로 빈에 방문하여 겨울 내내 체류했습니다.

이듬해 빈 음악학원의 지휘자로 임명되는 등 빈에서의 음악 활동을 시작하며 점차 이곳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게 됩니다.

빈은 브람스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으며, 그의 음악적 성숙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864년 빈 음악학원 지휘자 자리에서 사직한 후 다른 공식 직위를 가지지 않고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전념했습니다.

1868

[‘독일 레퀴엠’ 초연, 명성 확보]

브레멘에서 그의 최대 합창곡인 '독일 레퀴엠'이 초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전 유럽에 브람스의 명성을 드높였으며, 많은 이들이 그를 '슈만의 예언을 이룬 젊은이'로 인정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일 레퀴엠'은 1865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대부분 작곡되었으며, 5악장은 1868년 공식 초연 이후 덧붙여져 186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성공은 브람스에게 용기를 주어 오랜 시간 씨름하던 여러 대작들을 완성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1876

[교향곡 1번 발표]

약 15년에 걸친 오랜 고심 끝에 교향곡 1번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베토벤의 제9번에 이어지는 제10번 교향곡'이라 불릴 만큼 베토벤의 영향과 브람스 독자적인 세계를 완벽하게 조화시킨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브람스는 완벽주의자였으며, 특히 베토벤에 버금가는 작곡가로 평가받은 슈만의 예언 때문에 첫 교향곡 완성에 대한 부담이 컸습니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없애거나 출판하지 않기도 했으며, 교향곡 1번 역시 여러 번의 수정 끝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후 교향곡 2번(1877년), 3번(1883년), 4번(1885년)을 연이어 완성하며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1879

[명예 박사 학위 수락]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락했습니다.

이 감사의 표시로 위트와 활력이 넘치는 관현악 작품 '대학축전 서곡'을 작곡했습니다.

앞서 187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명예 박사 학위는 거절한 바 있습니다. '대학축전 서곡'은 브람스의 작품 중에서도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곡 중 하나입니다.

1889

[세계 최초 음악가 녹음]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보낸 테오 방게만과 실험 녹음을 진행했습니다.

자신의 피아노곡 '헝가리 무곡 1번'을 직접 연주했으며, 이는 주요 음악가가 남긴 세계 최초의 녹음으로 역사적 가치를 지닙니다.

같은 해 함부르크 명예 시민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녹음에서 브람스의 육성은 비교적 깨끗하게 들리지만, 피아노 연주 소리는 잡음이 심해 잘 들리지 않습니다. 녹음된 육성의 주인이 브람스인지 방게만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합니다. 함부르크 명예 시민 선정은 1948년까지 브람스 외에는 없었을 정도로 큰 영예였습니다.

1890

[작곡 포기 결심과 번복]

57세의 나이로 작곡 활동을 포기하려 했으나, 이내 생각을 고쳐 먹고 죽기 몇 년 전에 수많은 명작들을 추가로 내놓았습니다.

이는 그의 말년의 예술적 열정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특히 마이닝겐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네티스트 리하르트 뮐펠트에 감탄하여, 클라리넷 3중주 Op.114, 클라리넷 5중주 Op.115(1891년), 두 클라리넷 소나타 Op.120(1894년) 등 클라리넷을 위한 뛰어난 작품들을 작곡했습니다. 또한 피아노 소품 모음집 Opp.116~119와 '네 개의 엄숙한 노래' Op.121(1896년), 11개의 코랄 전주곡 Op.122(1896년)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1897

[타계]

간암이 매우 악화되어 오스트리아 빈에서 6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빈의 첸트랄프리드호프에 안장되어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Op.121 곡을 완성할 때 이미 간암이 매우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브람스는 평생 검소하게 살면서도 친척들을 돕고 젊은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등 따뜻한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베토벤처럼 자연을 좋아하고 산책을 즐겼으나, 때론 무뚝뚝하고 냉소적인 성격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