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하이든

오스트리아 작곡가, 교향곡의 아버지, 고전파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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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2:5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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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하이든
오스트리아 작곡가, 교향곡의 아버지, 고전파 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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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작곡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그는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며 106곡의 교향곡과 68곡의 현악4중주곡으로 고전 시대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제1악장 소나타 형식을 완성한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만년에는 대작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사계》로 깊은 감동을 선사했으며 놀랍게도 바로크 고전 낭만주의 음악가 중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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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2

[음악 신동의 탄생]

훗날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릴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이 오스트리아 로라우에서 태어났습니다.

12남매 중 둘째로, 음악을 사랑하는 마차 수리공 아버지 덕분에 일찍이 음악적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1738

[음악 교육 시작]

여섯 살이 되던 해, 하이든은 뛰어난 음악 재능을 인정받아 수양아저씨 프랑크의 집으로 가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게 됩니다.

1740

[소년 합창단 입단]

빈의 명문 성 스테파노 대성당 소년합창단에 입단하며 황실 무대에 서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죠.

1749

[소년 합창단 퇴단]

변성기를 맞아 소년 합창단을 나오게 된 하이든은 이후 약 10년간 빈에서 자유롭지만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고, 귀족들의 음악 교사나 실내악 연주자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죠.

이 시기의 고난은 훗날 그의 음악에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1759

[백작 궁정악장 취임]

10년간의 힘든 생활 끝에 마침내 보헤미아 칼 폰 모르친 백작의 궁정악장으로 취임하며 안정된 직업을 얻었습니다.

이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하며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키웠습니다.

1760

[결혼 및 악단 해산]

모르친 백작 집안의 재정 악화로 악단이 해산되면서 다시 실업자가 된 하이든은 빈으로 돌아와 연상의 마리아 안나 켈러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평생 그에게 가정의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1761

[에스테르하지 부악장]

헝가리 에스테르하지 후작 가문의 관현악단 부악장으로 취임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았습니다.

관현악단 관리와 훈련을 맡으며 그의 관현악 작법은 눈부시게 발전하게 됩니다.

1762

[새로운 후원자 등장]

파울 안톤 후작이 타계하자 동생 니콜라우스 후작이 후원을 이어받았습니다.

니콜라우스는 형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예술 옹호자였으며, 그의 지원 아래 하이든의 악단은 더욱 충실하게 확대되었습니다.

1772

[고별 교향곡 작곡]

에스테르하지 별궁에서 후작의 긴 체재로 인해 단원들이 가족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하이든은 단원들의 귀가를 소망하는 《고별 교향곡》을 작곡하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이 곡은 각 악기가 하나씩 소리를 멈추고 퇴장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1781

[러시안 4중주곡 완성]

고전파 현악4중주 구조와 정신을 확립한 6곡의 《러시안 4중주곡》을 완성하며 소나타 형식의 전형을 제시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대 젊은 작곡가였던 모차르트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786

[파리 교향곡 작곡]

하이든의 명성이 전 유럽으로 퍼지면서 파리 오케스트라로부터 6곡의 교향곡 의뢰를 받아 《파리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명작을 잇달아 발표하며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1790

[후작 사망 및 은퇴]

30년 가까이 모시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사망하자, 하이든은 명예 악장 칭호를 받고 직위에서 물러나 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는 그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791

[첫 영국 방문 대성공]

흥행사 잘로몬의 권유로 영국 런던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6곡의 《잘로몬 교향곡》(1기)을 발표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의 명성은 국제적인 수준으로 확고해졌습니다.

[모차르트와의 작별]

런던 체류 중, 음악적 교류를 나누던 젊은 천재 모차르트가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이는 하이든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1792

[베토벤과의 첫 만남]

첫 영국 방문 후 귀국길에 본에서 아직 젊었던 베토벤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후 잠시 빈에서 그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역사적인 두 거장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1794

[두 번째 영국 방문]

다시 한번 영국을 방문하여 6곡의 《잘로몬 교향곡》(2기)을 작곡하며 런던 관객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이 12곡의 교향곡은 그의 교향곡 창작 발전의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1798

[대작 《천지창조》 발표]

만년에 다시 에스테르하지 악장으로 돌아와 헨델의 오라토리오에 영감을 받아 대작 《천지창조》를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은 고전파 음악의 성악 분야에서 그의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801

[오라토리오 《사계》 발표]

《천지창조》에 이어 또 다른 오라토리오 대작 《사계》를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들은 젊은 시절의 바로크 음악 경험과 독자적인 교향적 사고를 통합하여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1809

[무덤 도굴 및 머리 실종]

하이든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일반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곧 그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머리가 사라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즉각 수사를 요청했습니다.

음악 천재 하이든의 뇌를 연구하고 싶었던 오스트리아 귀족의 부탁으로 유태인 피터와 로젠바움이 저지른 일로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하이든의 머리를 더욱 비싼 값에 팔기 위해 다른 노인의 머리로 귀족을 속이고 진짜 하이든의 머리는 익명의 사람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이후 하이든의 머리는 100여 년 넘게 유럽 전역을 떠돌며 수난을 겪었습니다.

[음악 거장의 영면]

나폴레옹의 제2차 빈 공략 포성을 들으며 77세의 나이로 영면했습니다.

그는 바로크, 고전파, 낭만주의 음악가들 중 '세계최초'로 가장 오래 산 음악가로 기록되었습니다.

1954

1954.06 사후 145년

[145년 만의 완전한 안식]

무덤이 파헤쳐진 지 무려 145년 만에, 마침내 유해반환소송에서 승소하며 하이든의 머리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스트리아 주민 수십만 명이 환영했고,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미사에 참석해 뒤늦게나마 그의 머리를 찾은 것에 대해 후손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했습니다.

위대한 음악가는 이제서야 완전한 안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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