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
제국, 역사적 국가, 왕조, 이슬람 국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46:27
13세기 말 아나톨리아 북서부에서 건국되어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쳐 600년 이상 군림한 광대한 제국입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며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당대 세계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18세기 이후 군사력 약화로 유럽의 환자라는 굴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탄지마트 개혁 등으로 근대화를 모색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해체되었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현재의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재탄생했습니다.
1299
[오스만 제국 건국]
13세기 말, 룸 술탄국 붕괴를 틈타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 서북부에서 독립하며 오스만 베이국을 세웠습니다.
이는 훗날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세 대륙에 걸쳐 600년간 지속될 오스만 제국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후세의 역사 전승에 따르면, 오스만 1세가 아나톨리아 서북부에 세력을 확립해 신정권의 왕위에 올랐다는 1299년이 오스만 제국의 건국 연도로 통례적으로 여겨집니다. 전설에 따르면 오스만 가문의 시조는 쉴레이만 샤로, 룸 술탄국의 보호를 받다가 그의 아들 에르투으룰 가지가 룸 술탄국 편에 서서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수행한 공을 인정받아 봉토를 받았습니다. 그 아들 오스만 1세가 룸 술탄국의 붕괴를 틈타 독립하여 동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을 격파하며 오스만 베이국을 건국했습니다.
1326
[부르사 점령]
2대 술탄 오르한 1세가 동로마 제국의 핵심 지방 도시 부르사를 점령하고, 이곳을 오스만 베이국의 첫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는 유럽 대륙으로의 확장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1326년경 오스만 1세의 뒤를 이은 오르한 1세는 곧바로 동로마 제국의 지방 도시 부르사를 점령했습니다. 부르사는 오스만 베이국의 행정 중심지이자 최초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1346
[발칸반도 진출]
오르한 1세가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6세와 동맹을 맺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넘어 발칸반도의 트라키아 지역에 진출했습니다.
이를 통해 오스만은 유럽 대륙으로의 본격적인 영토 확장을 시작하며, 훗날 세 대륙 제국으로 성장할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346년, 오르한 1세는 동로마 황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와의 동맹을 계기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넘어 발칸반도의 트라키아에 진출하며 유럽에서의 영토 확장을 개시했습니다.
1389
[코소보 전투 승리]
3대 술탄 무라트 1세가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한 발칸 연합군을 격파하며 발칸반도 지배력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 승리는 오스만 제국이 유럽 진출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동시에 상비군 예니체리 창설 등 국가 제도를 정비했습니다.
무라트 1세는 즉위하자마자 아드리아노폴리스(오늘날 에디르네)를 점령하고 이곳을 제2의 수도로 삼았으며, 상비 포병군 예니체리를 창설하는 등 국가 제도를 정돈했습니다. 1389년에는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왕국을 필두로 한 발칸 제후국들의 연합군을 물리쳤습니다.
1396
[니코폴리스 전투 승리]
바예지드 1세가 불가리아 북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을 주축으로 한 대규모 십자군을 완벽하게 격파했습니다.
이 승리로 오스만 제국은 유럽 내 입지를 더욱 강화하고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무라트 1세의 아들 바예지드 1세는 1396년에 불가리아 북부에서 니코폴리스 전투를 벌여 헝가리 왕국을 필두로 한 십자군을 격파하며 영토를 더 크게 넓혔습니다.
1402
[앙카라 전투 패배]
오스만 제국이 앙카라 전투에서 강력한 티무르 왕조에게 참패하며 일시적으로 제국 확장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이 패배는 왕자들 간의 후계 다툼까지 불러와 제국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은 티무르 왕조에게 패배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서는 왕자들 간 후계 싸움이 일어나 제국의 확대를 일시적으로 멈추었습니다.
1421
[제국 재통합 성공]
앙카라 전투 패배와 이어진 왕자들의 후계 다툼으로 흔들리던 제국을 메흐메트 1세가 1421년 성공적으로 재통합하며 국력을 회복했습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바예지드 1세의 아들 메흐메트 1세는 1421년에 제국 재통합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국력을 회복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그 아들 무라트 2세는 다시 자국을 침공한 십자군을 물리치면서 안정된 통치를 펼쳤습니다.
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무라트 2세의 아들 메흐메트 2세가 마침내 동로마 제국의 천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제국 중 하나인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명실상부한 대제국으로 부상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심장이 되었습니다.
국력이 다시 상승하자 1453년 무라트의 아들 메흐메트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마침내 동로마 제국을 점령하였습니다(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하기아 소피아도 첨탑 네 개가 첨가되면서 모스크로 개축되었습니다.
1517
[이슬람 맹주로 부상]
셀림 1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와 이라크 지역까지 지배 영역을 확대했습니다.
또한, 이슬람 2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을 장악하고 아바스 왕조로부터 칼리파 칭호를 양도받아 '술탄-칼리파제'를 창설하며 이슬람 세계의 세계최고 맹주로 우뚝 섰습니다.
1512년 제국을 계승한 셀림 1세는 동로마 제국에 이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까지 멸망시켜 이집트와 이라크 지역까지 지배 영역을 확대했고, 맘루크 왕조가 소유하고 있던 이슬람교의 2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마저 장악해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군림합니다. 더욱이 그동안 맘루크 왕조의 비호 아래 있던 아바스 왕조의 후예로부터 칼리파 칭호를 양보받아 칼리파를 겸하면서 술탄-칼리파제를 창설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초반에 위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 내에서 오스만 제국이 그 중심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1520
[쉴레이만 1세 즉위]
제10대 군주 쉴레이만 1세가 즉위하며 오스만 제국은 세계최고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제국은 중앙유럽과 북아프리카에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는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습니다.
제10대 군주인 쉴레이만 1세(재위 1520년 - 1566년) 때에 이르면 오스만 제국의 국력은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해져 다른 나라를 압도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영역은 중앙유럽과 북아프리카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1526
[모하치 전투 승리]
쉴레이만 1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완파하고 헝가리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이 승리로 오스만 제국은 중앙 유럽으로의 영향력을 최대로 확장하며 서유럽 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쉴레이만 1세는 즉위하면서 베오그라드를 정복해 헝가리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로도스섬에서 무슬림에 대한 해적 행위를 벌이던 성 요한 기사단을 쫓아내면서 동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했습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격파, 헝가리 땅 거의 대부분을 점령했습니다.
1529
[빈 포위전]
신성 로마 제국과 대립하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쉴레이만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빈을 1개월 이상 포위했습니다.
비록 작전은 실패했지만, 오스만군이 서유럽 깊숙이 진출하여 유럽 국가들에게 세계최초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과 대립하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은 쉴레이만 1세는 1529년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빈을 1개월 이상에 걸쳐 포위했습니다. 작전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오스만군이 서유럽 내 깊숙이 들어와 위협한 사건은 당시 서구 국가들에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538
[프레베자 해전 승리]
쉴레이만 1세가 프레베자 해전에서 스페인, 베네치아 등을 위시한 기독교 세계 연합 함대를 대파했습니다.
이 승리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 해상권 다툼에서 세계최고 우위를 차지하며 해양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는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 등을 위시한 기독교 세계 연합 함대를 대파해, 지중해 해상권 다툼에서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1571
[레판토 해전 패배]
쉴레이만 1세 사망 4년 후, 셀림 2세가 키프로스 섬을 점령하자 유럽은 신성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가 기독교 연합 함대에 패하며 지중해 주도권 다툼에서 우위를 상실했습니다.
쉴레이만 1세가 죽은 지 4년 후인 1570년 셀림 2세가 베네치아 지배령인 키프로스 섬을 점령했습니다. 위기 의식을 느낀 유럽은 신성 동맹을 결성해서 이에 맞섰습니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는 기독교 세계의 연합 함대에 패해 지중해 내 주도권 다툼에서 우위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유럽보다 열세에 처한 것은 아니었다. 국력은 여전히 강대하고 지중해 해상권이 순식간에 오스만 제국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1699
[헝가리 상실]
18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하며, 1699년에는 헝가리를 상실했습니다.
이는 제국 쇠퇴의 주요 지표 중 하나로, 이후 발칸반도의 피지배 민족 독립 운동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힘이 약해졌다. 1699년 헝가리를 잃었다. 이후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절대 군주로부터의 민주 혁명과 민족 독립을 추구하는 세계적 흐름에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땅을 되찾았다.
1808
[마흐무트 2세의 개혁]
마흐무트 2세가 즉위하여 군대의 서구화를 위해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외무성, 내무성, 재무성 신설 등 중앙 정부 권력 강화를 추진했습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을 근대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대규모 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08년에 즉위한 마흐무트 2세는 군대의 서구화를 위해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외무성, 내무성, 재무성을 신설하여 중앙 정부의 권력 강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유럽에 유학생을 대거 파견해 인재 육성에도 힘을 쏟았다.
1830
[그리스 왕국 독립]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서구 열강에 연전연패하며 '유럽의 환자'로 평가받던 오스만 제국에서 피지배 민족의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고, 그 결과 1830년 그리스가 왕국으로 독립했습니다.
한편, 아랍인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의 독립 운동이 제국 내에서 일어났다. 1830년 그리스가 왕국으로 독립했고, 이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침략을 당했다.
1839
[탄지마트 개혁 선포]
압뒬메지트 1세가 개혁 칙령을 공포하며 '탄지마트'라 불리는 전면적 개혁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행정, 군사,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서구적 체제로의 전환을 도모하여 제국의 재건을 시도했습니다.
1839년 압뒬메지트 1세는 개혁 칙령을 공포한 후 전면적 개혁 정치를 실행에 옮겼다. 행정에서부터 군사, 문화에 이르기까지 서구적 체제로의 전향을 도모하는 탄지마트(Tanzimat, تنظيمات)가 그것이다. 탄지마트 정책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중앙 집권적 관료 기구와 근대 군대를 확립함으로써 서구형 국가로 전환을 진행해 갔다.
1853
[크림 전쟁 발발]
오스만 제국은 1853년 러시아 제국과 크림 전쟁을 벌였습니다.
영국 등의 가담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승리했으나,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기 위해 비무슬림의 권리를 인정하는 칙령을 발포해야 했습니다.
1853년에 러시아 제국과 사이에 크림 전쟁이 일어났으나, 영국 등의 가담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영국 등의 지지를 획득할 필요성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1856년 개혁 칙령을 발포하여 비무슬림의 권리를 인정하겠노라고 약속했다.
1875
[제국 재정 파산]
개혁과 전쟁 수행을 위한 서구 열강의 거액 차관 도입과 국내 무역 확대로 제국 경제는 서구의 반식민지 유사하게 변모했습니다.
결국 1875년 서구 금융 공황과 농작물 흉작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재정이 파산했습니다.
그러나 개혁과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서구 열강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필요했다. 그래서 결국 서구인들의 국내 무역을 더욱 확대하였으며, 제국은 차츰 경제면에서 서구 나라들의 반식민지 유사하게 되어갔다. 그 결과, 유럽 경제와 농산품 수확량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 제국 재정은 1875년, 서구 금융 공황과 농산물의 흉작으로 말미암아 파산하고 만다.
1876
[미드하트 헌법 공포]
대재상 미드하트 파샤의 지도 아래 아시아 최초의 성문헌법인 '미드하트 헌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이 헌법은 오스만 제국이 서구식 법치국가임을 선언하고 제국 의회 설치 및 무슬림과 비무슬림 신민의 완전한 평등을 천명하며 근대화를 향한 획기적인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탄지마트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좌절로 끝나자 제국에는 새로운 개혁이 요구되었다. 1876년, 대재상 미드하트 파샤의 지도 아래 ‘아시아 최초의 성문헌법’인 제국헌법(통칭 미드하트 헌법)을 공포했다. 헌법은 오스만 제국이 서구식의 법치국가이며, 제국 의회 설치와 오스만의 신민으로서 무슬림과 비무슬림은 완전한 평등을 누린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1878
[헌법 폐지 및 전제정치]
헌법 공포 직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완패하자, 압뒬하미트 2세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미드하트 헌법을 폐지했습니다.
이는 전제 체제의 부활을 의미했으며, 그는 '피의 황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헌법을 발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78년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완패하여 실패로 끝났다. 오스만 정부는 러시아군이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서쪽의 산스테파노까지 진군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린다. 전제 체제의 부활을 바랐던 압뒬하미트 2세는 러시아와 산스테파노 조약을 맺어 강화하는 한편(이후 산스테파노 조약은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등의 유럽 열강이 개입하여 베를린 조약으로 대체된다.),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미드하트 헌법을 폐지하였다. 이날 이후, 좌파는 국외 추방 또는 사형을 각오해야 했고, 압뒬하미트 2세는 ‘피의 황제’로 불린다.
1908
[청년 투르크 혁명]
1908년 '청년 투르크 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압뒬하미트 2세를 폐위하고 메흐메트 5세를 황제로 옹립하며 미드하트 헌법을 부활, 개정했습니다.
이는 제국의 마지막 개혁 시도였으나, '모든 민족의 평등'이 '튀르키예인으로 한정한 평등'으로 바뀌며 민족 독립 열망을 가속화했습니다.
1908년에 압뒬하미트 2세는 청년 투르크 당에 의해 폐위되고 1918년 어느 날 외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청년 투르크 당은 메흐메트 5세를 황제로 모시고 마드하트 헌법을 부활하고 개정하였으며, 군비 경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모든 민족의 평등’이 ‘튀르키예인으로 한정한 평등’으로 바뀌고 아랍인들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의 독립 열망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12
[알바니아 독립]
'청년 투르크 당'의 민족주의 정책은 피지배 민족의 독립 열망을 더욱 가속화시켰고, 이는 제1차 발칸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알바니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며 제국의 영토는 더욱 축소되었습니다.
이것이 제1차 발칸전쟁의 원인이다. 이 결과 알바니아가 튀르키예로부터 독립하였다.
1914
[1차 세계대전 참전]
'통일진보위원회'가 결성한 통일진보당은 독일 편에 서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내부 결속을 위해 아랍 지역 반란의 싹을 잘라 버리기 위해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그리스인을 상대로 대량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통일진보위원회가 결성한 통일진보당은 독일 편에 서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이 과정에서 내부 결속을 위해 애쓰던 오스만 제국은 아랍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의 싹을 잘라 버리기 위해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그리스인을 상대로 대량 학살을 주도하기도 했다.
1918
[1차 대전 패전과 영토 상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이 패배하자, 오스만 제국도 전범 국가로 지목되어 '세브르 조약'에 따라 1914년 이전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중동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는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패전국이 되어 전범 국가로 지목됨으로써 세브르 조약의 결과, 1914년 이전의 영토를 거의 대부분 상실하고 소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만을 지니게 되었다. 그 이후, 그리스한테 침공을 받아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되는데, 한때는 국가의 존망이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1922
[제국 해체 및 튀르키예 건국]
패전 후 그리스 침공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했으나, 무스타파 케말의 지휘 아래 그리스군을 격파하며 실지를 회복했습니다.
이후 케말 파샤는 오스만 제정을 폐지하고 600년간 이어진 광대한 제국을 해체하며, 현재의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했습니다.
그러나 1922년경부터 케말 파샤(장군)의 지휘 아래 그리스군을 앙카라에서 격파하고, 이에서 도주하는 그리스군을 이스탄불에서 또 대파함으로써 그리스 영토 일부까지 실지를 회복하는 등 그 영토가 로잔 조약으로 현재의 튀르키예 공화국 영토로 고정되었다. 메흐메트 6세(재위 1918-1922)가 폐위됨으로써 600년 장수 제국은 해체되었다. 압뒬메지트 2세도 1924년, 칼리프제가 폐지됨에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