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라호마시티 폭탄 테러

테러, 국내 테러, 대량 살인, 미국 역사, 범죄, 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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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4월 19일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청사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9/11 테러 이전 미국 영토 내 최악의 테러로 어린이 포함 168명이 사망하고 68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반정부 성향의 티머시 맥베이가 연방정부에 대한 복수심으로 감행했으며 미국 사회에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다. 대규모 구조 활동과 범인 체포 재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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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테러 공범의 만남]

1988년, 미 육군 기초 군사훈련에서 티머시 맥베이와 테리 니컬스가 처음 만나 반정부 성향을 공유하며 훗날 끔찍한 테러를 함께 계획하게 됩니다.

이들은 총기 규제 반대와 민병대 운동 지지라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92년 루비 능선 사건과 1993년 웨이코 포위전에서 연방 정부의 강경 진압을 목격하며 이들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고, 특히 맥베이는 웨이코 현장을 직접 방문하며 연방정부 청사 테러를 결심하게 됩니다.

티머시 맥베이는 루비 능선과 웨이코 포위전에서 연방정부의 행동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웨이코 사건이 일어난 지 2주년이 되는 날에 맞춰 테러를 감행하기로 계획했습니다. 공범인 마이클 포티어는 맥베이의 룸메이트였으며, 이 세 사람은 종말대비주의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1994

[테러 표적 물색 및 답사]

1994년 12월, 티머시 맥베이와 공범 마이클 포티어가 오클라호마시티의 앨프리드 P.

뮤러 연방정부청사를 방문해 범행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맥베이는 처음엔 건물 파괴만을 원했지만, 그의 메시지가 많은 사람의 죽음으로 더 명확히 전달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는 이 건물의 정면 유리창이 폭발로 산산이 부서질 것이고, 맞은편 개방된 주차장이 충격을 흡수하며 사진 촬영에도 용이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웨이코 포위전 2주년이 되는 1995년 4월 19일을 범행 일자로 정하며 연방정부에 대한 복수심을 극대화하려 했습니다.

맥베이는 범행 표적이 될 건물이 주류·담배·화기 단속국(ATF)과 마약단속국(DEA) 등 법 집행 관련 연방정부기관을 두세 개 이상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애초에 정부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어 아칸소주 리틀록의 연방정부청사는 1층에 꽃가게가 있다는 이유로 제외했습니다. 뮤러 빌딩은 1977년에 건립되었으며, ATF, DEA 외에도 사회보장국, 육군 및 해병대 신병 모집 사무소 등이 입주해 있었습니다.

1995

[오클라호마시티 테러]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2분, 티머시 맥베이가 몰던 트럭에 실린 2.2톤이 넘는 폭발물이 오클라호마시티의 앨프리드 P.

뮤러 연방정부청사 북측 면에서 폭발했습니다.

이 폭발은 6세 이하 아동 19명을 포함, 168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680명 이상을 부상시켰습니다.

건물의 1/3이 파괴되고 반경 16블록 내 324채 건물이 파괴되거나 손상되는 등 6억 5200만 달러의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야기했습니다.

이 사건은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 영토 내에서 발생한 가장 심각한 테러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맥베이는 폭탄을 오전 11시에 터뜨리려 했으나 당일 새벽 9시로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그는 소설 '터너의 일기'에서 영감을 받아 백인 우월주의자의 트럭 폭탄 테러 방식을 모방했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폭군에게'라는 의미의 라틴어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범행을 감행했습니다. 폭발의 위력은 TNT 2300kg에 맞먹었으며, 89km 떨어진 곳에서도 소리를 듣거나 진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진계에는 리히터 규모 3.0의 지진과 맞먹는 것으로 관측될 정도였습니다. 건물의 붕괴가 대부분의 사망자를 발생시켰으며, 깨진 유리 파편만으로도 전체 사망자의 5%, 부상자의 69%가 발생했습니다.

[주범 맥베이 체포]

폭탄 테러 발생 90분 만인 1995년 4월 19일, 주간고속도로를 북쪽으로 이동하던 테러범 티머시 맥베이가 오클라호마 고속도로 순찰대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순찰대원 찰리 행거는 무면허 운전과 숨겨둔 무기 소지를 이유로 맥베이를 멈춰 세웠습니다.

맥베이는 체포 당시 가짜 주소를 진술했으며, 경찰차 조사 중 발견된 명함에는 '5달러짜리 TNT 한 통.

더 필요함.'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어 범행과의 연관성을 짙게 했습니다.

이 명함은 훗날 그의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부 요원들은 폭탄 테러에 사용된 차량의 차축과 번호판 잔해에서 차량 식별 번호를 조사하여 맥베이의 트럭을 정크션시티의 자동차 대여소와 연결했습니다. 대여소 주인의 증언과 맥베이의 모텔 서명 기록 등을 통해 그가 범인임이 명확해졌습니다.

[대규모 구조 활동 시작]

폭탄 테러 직후, 오전 9시 3분 25초부터 1,800건이 넘는 911 전화가 쇄도하며 대규모 구조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경찰, 소방관, 앰뷸런스가 즉시 현장으로 향했으며, 주변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구조에 동참했습니다.

비상상황 통제 센터가 구성되고 주 방위군 465명이 파견되는 등 주 전역에서 인력과 장비가 투입되었습니다.

폭발 발생 첫 한 시간 안에 50명이 구조되었고, 부상자들은 여러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습니다.

구조 활동 중에는 사람의 심장 박동을 감지하는 음향 감지 장치를 사용하기 위해 잠시 침묵을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마취제 없이 팔다리를 절단하는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또 다른 폭탄이 설치되었다는 제보로 일시적으로 대피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이 의심 물체는 훈련용 미사일로 밝혀져 구조 작업은 45분 후에 재개되었습니다. 마지막 생존자는 붕괴된 건물 지하에서 발견된 15세 소녀로, 오후 7시경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이듬날에는 12,000명 이상이 구호 및 구조 활동에 참여했으며, FEMA의 도시 내 수색구조 작업반도 투입되었습니다. 구조 활동 중 간호사 한 명이 건물 파편에 맞아 숨지기도 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 대국민 담화]

폭탄 테러 소식을 보고받은 빌 클린턴 대통령은 오후 4시 오클라호마시티에 연방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번 테러를 '무고한 어린이들과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시민들에 대한 비겁하고 악랄한 행위'로 규정하며 범인들을 반드시 찾아낼 것을 천명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모든 연방정부청사의 깃발을 30일간 조기로 게양할 것을 명령했으며, 며칠 뒤 직접 오클라호마시티를 방문해 시민들을 위로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희생자 중 19명의 어린이들에게 큰 관심을 보였으며, 잔해 속에서 구출되는 영유아의 사진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저는 우리의 어린이들이 인생과 미래와 대부분의 어른들에 대하여 이 무서운 사건 때문에 무언가 무서운 것을 믿지 않기를 바랍니다. … 어른들은 대개 착한 사람들이며 우리 어린이들을 지켜주기를 바라고 있으며,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라고 연설하며 아이들을 위로했습니다. 맥베이는 나중에 어린이 희생에 대해 자신은 '연좌제를 정의하지 않았다'며 웨이코 사건 때의 정부를 비난했지만, FBI는 그가 범행 전 보육 센터의 존재를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습니다.

[공범 추적 및 증거 확보]

맥베이가 총기 혐의로 석방되기 전, 연방 수사국(FBI)은 그를 폭탄 테러와 관련하여 구금하고 수사를 확대했습니다.

맥베이의 허위 주소 진술을 단서로 FBI는 공범인 테리 니컬스 형제를 추적하기 시작했고, 니컬스의 집에서 질산암모늄, 발파용 모자, 폭탄 제조법 서적, 오클라호마시티 지도 등 결정적인 증거들을 찾아냈습니다.

이로써 니컬스도 범행에 깊이 연루되었음이 드러났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범죄 수사(OKBOMB)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사건 초기 FBI는 국제 테러 조직, 마약 조직, 기독교 원리주의자 등 다양한 가설을 세웠으나, 맥베이의 체포와 증거 확보로 수사는 범인들로 좁혀졌습니다. 맥베이의 여동생 제니퍼도 불법 탄환 제공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오빠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대가로 기소를 면제받았습니다. 요르단계 미국인 이브라힘 아흐마드는 초기 수사 대상에 올랐으나, 추가 조사 후 폭탄 테러와의 연관성이 없다고 판명되었습니다.

[구조 활동 공식 종료]

폭탄 테러 발생 약 2주 만인 1995년 5월 5일 오후 12시 5분, 대규모 구조 및 복구 활동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이때까지 희생자 168명 중 세 명을 제외한 모든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안전상의 이유로 뮤러 연방정부청사 건물은 즉시 철거하기로 결정되었으나, 맥베이 변호인단의 요청으로 재판 준비를 위한 현장 조사를 위해 철거가 잠시 연기되기도 했습니다.

[테러 건물 철거]

1995년 5월 23일 오전 7시 2분, 오클라호마시티 폭탄 테러의 현장이었던 앨프리드 P.

뮤러 연방정부청사가 폭발 한 달여 만에 철거되었습니다.

철거 과정에서 앞서 발견되지 않았던 3명의 희생자 시신이 추가로 발견되는 비극적인 상황도 있었습니다.

건물 잔해는 공범 재판의 증거물로 활용되거나 추모공원 조성, 지역 학교 기부, 구호 자금 마련을 위한 판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1997

[테러범 재판 유죄 판결]

1997년, 오클라호마시티 폭탄 테러의 주범 티머시 맥베이와 공범 테리 니컬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고, 두 사람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범행은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범죄 수사(OKBOMB)를 통해 철저히 밝혀졌으며, FBI는 28,000여 회의 기자회견, 3.2톤의 증거물, 100만 건에 가까운 정보를 수집하며 전례 없는 수사력을 동원했습니다.

마이클 포티어와 로리 포티어는 맥베이와 니컬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습니다. 마이클 포티어는 사건을 정부에 알리지 않은 죄로 12년간 복역을 선고받았고, 로리는 법정 증언 대가로 기소를 면제받았습니다.

2000

[희생자 추모 기념비 건립]

1995년 폭탄 테러가 발생한 지 5년 뒤인 2000년 4월 19일, 테러 희생자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뮤러 연방정부청사 자리에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기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매년 폭발이 일어난 날 같은 시각에 추모 행사가 열려, 그날의 비극을 잊지 않고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2001

[맥베이 사형 집행]

2001년 6월 11일, 오클라호마시티 폭탄 테러의 주범 티머시 맥베이가 독극물 투여 방식으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공범 테리 니컬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이로써 끔찍한 테러의 가해자들은 각자의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미국 정부는 연방정부 청사 주변 경비 강화를 위한 법률을 통과시켜 2005년까지 60건이 넘는 테러 기도를 사전에 막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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