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투
전쟁, 전투, 태평양 전쟁,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46:17
태평양 전쟁 막바지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일본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최악의 전투입니다. * 미군과 일본군이 일본 본토에서 처음으로 전면전을 벌인 대규모 상륙 작전입니다. * 미군에게 태평양 전쟁 중 가장 큰 피해를 안긴 전투로 기록됩니다. * 일본군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들도 대규모 자결 및 학살로 사망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1945
[오키나와 전투 시작]
1945년 4월 1일, 미군은 '아이스버그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오키나와에 상륙하며 일본 본토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을 열었습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중 미군이 일본 영토에서 벌인 최초의 대규모 전면전이자, 미군에게 태평양 전쟁 사상 가장 큰 피해를 안긴 충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미군은 상륙 전 한 달 동안 3만 발의 포탄을 쏟아부으며 일본군의 저항을 무력화하려 했지만, 일본군은 섬 남부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미군 주력 4개 사단이 오키나와 가데나 만에 성공적으로 상륙, 일본군의 초기 저항 없이 광대한 북부 지역을 장악했으나, 이는 섬 남부에 숨어있는 일본군의 거센 저항을 예고하는 고요함이었습니다.
[슈리성 방어선 맹공]
미군이 방심한 사이, 일본군의 사령부인 슈리성에서 무수한 동굴 진지들이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은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로 동굴을 하나하나 제거해야 했고, 이는 전투를 장기전으로 만들며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일본군은 미군이 방어선을 뚫을 때까지 싸우고, 뚫리면 다음 방어선으로 후퇴하는 전술을 사용하여 미군이 섬을 완전히 점령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었습니다.
[전함 야마토 격침]
일본 연합 함대의 마지막 희망이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함이었던 야마토가 오키나와 보우노사키 해협에서 미군 전투기와 급강하폭격기의 집중 공격으로 격침되었습니다.
이토 세이이치 함장이 이끌던 7척의 남은 연합 함대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은 야마토는 일본 해군력의 사실상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야마토의 격침은 일본이 더 이상 해상에서 연합군에 맞설 수 없음을 명백히 보여주었으며, 오키나와 전투의 해상 우위가 완전히 연합군에게 넘어갔음을 의미했습니다.
[슈리성 함락, 일본군 퇴각]
수개월간의 격렬한 공방 끝에 미군이 마침내 일본군의 핵심 방어선이자 사령부였던 슈리성을 점령했습니다.
일본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고 섬 남쪽의 마부니 고지 동굴로 퇴각하며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남쪽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미군의 추가 상륙 작전도 진행되었습니다.
슈리성 점령은 오키나와 전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나, 일본군의 강고한 저항은 여전히 계속되어 미군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오로쿠 지구 일본 해군 전멸]
오로쿠 지구에서 일본 해군 사령관 오타 미노루와 군대 대부분이 미군의 맹공에 전멸당했습니다.
이는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사실상 붕괴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타 미노루 사령관은 전투 중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일본군의 남은 병력은 점점 더 고립되어 갔습니다.
[일본군 병력 최종 붕괴]
일본군의 남은 병력 6천 명이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붕괴되었습니다.
이로써 오키나와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미군에 비해 수적으로, 그리고 화력에서 절대적인 열세였던 일본군은 마지막까지 항전했으나, 결국 대규모 전력 손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미군 지휘관 버크너 전사]
오키나와 주둔 미군 총지휘관이던 사이먼 B.
버크너 중장이 일본군의 포격으로 급작스럽게 전사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는 태평양 전쟁 중 전사한 미군 최고위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승패가 결정된 전세는 뒤집히지 않았습니다.
버크너 중장의 전사는 미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조지프 스틸웰 중장에게 지휘권이 인계되며 미군의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일본군 사령부 참모 전사]
일본군 사령부의 주요 참모들마저 전사하며 지휘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이는 일본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사실상 전투의 종결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해진 일본군은 각개격파당하며 마지막까지 버텼습니다. 병력 손실이 너무 커서 정상적인 지휘가 어려워진 상태였습니다.
[전투 종결, 사령관 자결]
일본군 총지휘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 이사무 소장이 마부니 고지 동굴에서 할복 자살하며 오키나와 전투는 83일간의 비극적인 막을 내렸습니다.
이 전투는 미군에게 태평양 전쟁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안겼고, 일본군은 군인뿐만 아니라 12만 명에 달하는 수많은 오키나와 주민들까지 희생된 참혹한 역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거나 수류탄으로 자결할 것을 강요한 비극적인 결말이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본토 침공의 전초전으로 여겨졌으며, 양측 모두에게 엄청난 인명 피해를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민간인 학살과 강제 자결은 전쟁의 잔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미국은 이 전투의 막대한 희생에 충격을 받아 본토 상륙 대신 핵무기 사용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