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로댕

프랑스 조각가, 근대 조각의 시조,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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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2: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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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로댕
프랑스 조각가, 근대 조각의 시조,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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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출신의 조각가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근대 조각의 문을 연 거장. - 기존의 고정된 조각 개념을 깨고 인간 내면의 감정과 생명의 약동을 역동적인 형태로 표현. -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 등 불멸의 작품을 통해 조각을 회화와 동등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림. - 미켈란젤로 이후 최대 거장으로 평가받으며 전 세계 조각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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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

[파리 노동자 가정에서 출생]

프랑스 파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로댕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탁월한 소질을 보였습니다.

14세부터 17세까지 미술과 수학 전문 학교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하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스승인 르코크 드 브아도드랑은 학생들이 생각하고 관찰한 것을 그리는 것이 인격 발전에 중요하다고 가르쳤고, 이는 로댕의 조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857

[미술학교 입학 3수 실패]

프랑스 최고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기 위해 세 차례나 도전했지만, 로댕은 번번이 거부당했습니다.

당시 주류였던 신고전주의 작품들과 다른 그의 '새로운 감각적인' 조각품들이 심사위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쓰디쓴 좌절은 오히려 로댕이 정규 교육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학교를 떠난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조각가의 조수 등으로 일하며 20여년간 장식품을 만드는 장인으로 지냈습니다.

1862

[누이의 죽음과 예술 재개]

누이 마리아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죄책감을 느낀 로댕은 조각을 그만두고 로마 가톨릭 신앙에 귀의합니다.

하지만 사제 피터 줄리안 데이말드의 '당신은 사제보다 조각가'라는 격려로 다시 조각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동물 조각가 앙투안루이 바리의 수업에 참여하며 동물의 섬세한 근육 표현에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1864

[첫 작품 낙선 & 운명적 만남]

24세의 로댕은 그의 첫 조각품인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를 살롱에 출품했지만 안타깝게 낙선했습니다.

같은 해, 평생의 반려자가 될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나 아들 오귀스트 외젠 뵈레를 낳고 첫 조각 전시회를 열게 됩니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명성 높은 조각가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의 작업실에서 일하며 지붕, 계단, 출입문 장식 등을 만드는 실질적인 경험을 쌓았습니다.

1870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로댕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러나 카리에 벨뢰즈 아틀리에의 요청으로 벨기에 브뤼셀에서 증권 거래소 건물 장식들을 만들며 미술 활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1875

[이탈리아 여행과 체류 시작]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 로댕은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찾아 나섭니다.

이탈리아 체류는 그에게 자연으로부터의 새로운 출발점이었으며, 훗날 그의 중요한 대표작 중 하나인 《청동 시대》를 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876

[논란의 《청동 시대》 발표]

로댕은 《청동 시대》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으나, 동시에 거센 공격을 받았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작품의 '너무나 생생한' 청년상을 보고 산 사람을 본떴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는 조각의 고정관념을 깨고 살아있는 듯한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려 한 로댕의 '최초'의 대담한 시도에 대한 당시 예술계의 이해 부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1877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귀국]

이탈리아에서 얻은 깊은 영감을 바탕으로 로댕은 프랑스로 귀국합니다.

이 시기부터 그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가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합니다.

1880

[대작 《지옥의 문》 주문]

로댕은 평생에 걸쳐 작업할 거대한 역작, 《지옥의 문》을 주문받았습니다.

높이 6.5미터의 문에 186인의 인체를 조각한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의 희로애락과 고통을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대작은 후일 《생각하는 사람》 등 로댕의 다른 수많은 유명 작품들을 잉태하는 모태가 됩니다.

1881

[운명적 연인, 카미유 클로델]

자신의 제자이자 동업 작가인 카미유 클로델과의 운명적인 인연이 시작됩니다.

그녀는 로댕의 뮤즈이자 예술적 동반자였지만, 16년 뒤 로댕과의 결별 후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 시기에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 《빅토르 위고》, 《발자크》 등 여러 중요한 작품 주문을 받으며 명성을 확고히 합니다.

1895

[《칼레의 시민》 발표]

인간의 고뇌와 희생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의 대표작 《칼레의 시민》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건을 단순한 기념비를 넘어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깊이 있게 탐구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로댕의 조각이 지닌 서사적 힘을 보여줍니다.

1898

[논란의 《발자크 상》 발표]

만년에 《발자크 상》을 발표하여 또 한 번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문호 발자크를 잠옷 바람의 거대한 덩어리로 표현하여 외면의 묘사를 넘어선 내면적인 웅대함을 포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조각 분야에 다시금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로댕의 파격적인 실험정신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1900

[조각가로서 대성공]

로댕은 20세기 전환점에서 조각가로서 '대성공'을 거두며 세계적인 명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 시기, 사랑의 보편적 감정을 담은 아름다운 작품 《입맞춤》을 발표하며 그의 예술적 깊이를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1904

[불멸의 명작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의 일부로 구상되었던,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을 독립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조각품 중 하나로, 로댕의 깊이 있는 인간 탐구를 상징하며 근대 조각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1905

[릴케의 비서 활동]

세계적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로댕의 비서로 활동하며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로댕』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 위대한 두 예술가의 만남은 예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1908

[로댕 미술관의 시초, 비롱 호텔]

릴케의 강력한 촉구로 현재의 로댕 미술관이 된 비롱 호텔을 빌리게 됩니다.

이 공간은 로댕의 수많은 작품들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며, 그의 예술 정신을 후대에 전달하는 거점으로 자리 잡습니다.

1916

[전 재산 국가에 기증]

로댕은 자신의 모든 작품과 전시물을 프랑스 국가에 기증하며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과 미래 세대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예술적 유산이 영원히 보존되고 대중과 공유될 수 있도록 한 위대한 결정이었습니다.

1917

[근대 조각의 거장, 서거]

프랑스 뫼동에서 근대 조각의 거장이자 미켈란젤로 이후 '최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로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예리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인간의 모든 감정과 생명의 약동을 표현하며 근대 조각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전 세계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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