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정치인, 변호사, 노예제 폐지론자
최근 수정 시각 : 2026-01-18- 17:09:10
-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위기 속에서 연방을 수호하고 노예제를 폐지하며 미국의 근간을 재정립했습니다. - 가난한 변방 개척지 출신으로 독학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뛰어난 연설과 리더십으로 분열된 국가를 이끌었습니다. - 재임 중 암살당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자 13개 주 이외 지역에서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 에이브러햄 링컨 탄생
- 독립 및 뉴 살렘 정착
- 잭 암스트롱과의 전설적 대결
-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 취득
- 주류 판매 면허(Tavern License) 취득
- 일리노이주 주의원 당선
- 베리의 사망과 '국가적 부채'
- 일리노이 주의회 창문 탈출 사건
- 제임스 쉴즈의 결투 신청
- 선플라워 아일랜드의 결투와 화해
- 연방 하원의원 당선
- 특허 제6469호 획득
- 상원의원 낙선 및 노예제 토론
-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 제16대 미국 대통령 당선
- 사우스캐롤라이나 연방 탈퇴
- 남부연합 결성
- 제16대 대통령 취임
- 남북전쟁 발발 (섬터요새)
- 노예 강제 해방 법안 승인
- 앤티텀 전투 승리
- 노예해방 예비 선언 공표
- 노예 해방 선언문 공표
- 대규모 흑인 모병 실시
- 게티즈버그 연설
- 수정 헌법 제13조 통과 주장
- 대통령 재선 성공
- 남북전쟁 종전
- 포드 극장 암살 사건 발생
- 에이브러햄 링컨 사망
1786
[조부 에이브러햄 링컨 사망]
링컨의 조부 에이브러햄 링컨이 켄터키로 이주 후 미국 원주민의 습격으로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사망했습니다.이는 링컨 가문에 큰 영향을 미친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링컨의 할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은 버지니아 로킹햄 지역의 약 81헥타르(200 acre) 땅을 상속받은 건장한 지주였습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켄터키주로 이주했으나, 매복하던 미국 원주민에게 습격받아 178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그의 아들들인 머디카이, 조시아, 토머스 링컨이 이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1809
[에이브러햄 링컨 탄생]
미국 켄터키주 싱킹 스프링 팜의 통나무집에서 토머스 링컨과 낸시 링컨의 두 번째 자녀로 에이브러햄 링컨이 태어났습니다.그는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성립 당시의 13개 주 이외의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후에 미국 역사를 바꿀 위대한 여정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1816
[인디애나주로 이주]
링컨 가족은 토지에 대한 권리 설정 등기로 인한 소유권 분쟁으로 살던 땅을 잃고, 인디애나주 페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했습니다.링컨은 이 이주가 부분적으로는 노예제도 때문이었다고 기록했지만, 주된 이유는 토지 등기의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1818
[어머니 낸시 사망]
어머니 낸시 링컨이 독초를 먹은 소에서 짠 독성 우유로 생기는 '우유병'으로 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이른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것은 어린 링컨에게 큰 슬픔으로 남았습니다.
1819
[새어머니 사라와의 만남]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알던 사라 존스턴과 재혼했습니다.사라는 링컨을 따뜻하게 돌보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링컨의 편을 들어주며 학식을 쌓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이는 링컨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라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을 씻길 만큼 자상했고, 링컨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아버지 토머스는 배움은 없었지만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재주가 있어, 링컨은 아버지에게서 연설의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아버지의 배움 없는 모습을 안타까워했고, 힘든 개척지 노동을 싫어해 아버지와의 관계는 점차 멀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1세까지 자신이 바깥에 나가 일해서 번 돈을 아버지에게 모두 드리는 당시의 풍습을 따랐습니다.
1828
[누나 사라 링컨 사망]
링컨의 누나인 사라가 결혼 17개월 만에 아이를 낳다가 21세의 나이에 산욕으로 사망했습니다.링컨은 어머니에 이어 누나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1830
[일리노이주로 가족 이주]
공포스러운 우유병이 다시 확산되자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주 메이콘의 국유지로 이주했습니다.이 시기는 링컨이 가족을 떠나 독립적인 삶을 시작할 준비를 하던 때입니다.
1831
[독립 및 뉴 살렘 정착]
22세가 된 링컨은 카누를 타고 상가몬강을 따라 일리노이주 뉴 살렘 마을에 도착하여 독립적인 삶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그는 이후 뉴 살렘의 사업가 덴톤 오푸트 밑에서 일했습니다.이처럼 청년 시기에 링컨은 우체국장, 변호사, 뱃사공, 가게점원, 토지 측량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온갖 고생을 하였습니다.
1831년 봄, 링컨은 뉴 살렘의 사업가 덴톤 오푸트 밑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뉴 살렘에서 상가몬강과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보트로 물건을 실어 날랐으며, 뉴올리언스에 도착한 후에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목격담도 있습니다. 그는 공식 교육을 약 18개월만 받았으며 대부분 스스로 공부하는 독학자였습니다.
[레슬링 명성]
22세의 링컨이 일리노이주 뉴 세일럼에 도착했을 때, 그는 193cm의 키와 84kg의 근육질 몸매를 지닌 거구였습니다. 고용주 덴튼 오훗이 링컨의 힘을 자랑하고 다니자, 지역 맹주인 '클래리스 그로브 보이스'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부 변경에서 레슬링은 남성성을 증명하고 서열을 정하는 사회적 의례였습니다. 링컨은 이미 성장기 대부분을 레슬링으로 단련한 상태였습니다.
[잭 암스트롱과의 전설적 대결]
지역 최고의 싸움꾼 잭 암스트롱과 자존심을 건 레슬링 대결을 펼쳤습니다. 링컨이 긴 팔을 이용해 주도권을 잡자 암스트롱이 반칙을 시도했고, 이에 격분한 링컨은 그를 단숨에 제압했습니다.
패싸움 직전까지 갔으나, 링컨이 벽을 등지고 "한 놈씩 덤벼라"고 일갈하자 암스트롱은 링컨을 인정하고 악수를 청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링컨은 지역 사회의 인정을 받았고 암스트롱 패거리는 그의 평생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대장 수사슴"의 트래시 토크]
상대를 제압한 후 흥분한 링컨은 관중을 향해 "내가 이 구역의 대장 수사슴(big buck)이다. 누구든 덤벼보고 싶으면 와서 뿔을 갈아봐라!"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링컨이 단순히 점잖은 지식인이 아니라, 야생의 본능과 지배력을 갖춘 우두머리 수컷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832
[베리-링컨 상점 개업]
블랙호크 전쟁 전우였던 윌리엄 베리와 동업하여 뉴 세일럼의 잡화점 세 곳의 재고를 인수해 '베리-링컨 상점'을 열었습니다. 링컨은 경제적 자립을 위해 상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서부 상점들은 물건뿐만 아니라 술도 함께 파는 복합 공간이었습니다.
[첫 정치 입문과 낙선]
일리노이주 의회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며 첫 정치 경험을 쌓았습니다.비록 실패했지만, 이는 그의 정치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833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 취득]
관심이 있던 법률을 혼자서 공부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독학자였던 링컨이 전문직인 변호사가 된 것은 그의 강한 의지와 지적 능력을 보여줍니다.
[주류 및 숙박 가격 책정]
법원으로부터 허가받은 가격표에 따르면 위스키는 12.5센트, 프렌치 브랜디는 25센트, 식사는 25센트, 1박 숙박은 12.5센트였습니다.
이는 베리-링컨 상점이 단순한 소매점을 넘어 지역 주민과 여행객들이 먹고 자는 커뮤니티 거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류 판매 면허(Tavern License) 취득]
수익 구조를 다변화하기 위해 상가몬 카운티 법원으로부터 공식적인 주류 판매 면허를 발급받았습니다. 이 면허로 가게 안에서 잔술을 팔 수 있는 '그로서리' 운영 권한을 얻었습니다.
면허 발급 비용은 7달러였으며 300달러의 보증금이 필요했습니다. 훗날 정적들은 이를 두고 "링컨은 술장사나 하던 사람"이라고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상점 경영 실패와 철수]
뉴 세일럼의 쇠락과 동업자 베리의 알코올 의존 문제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링컨은 자신의 지분을 베리에게 넘기고 상점 경영에서 손을 뗐습니다.
링컨은 장사보다 책을 읽거나 손님들과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1834
[일리노이주 주의원 당선]
일리노이주 주의원 선거에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정치계에 입문했습니다.이전의 낙선 경험을 딛고 공직에 발을 들여놓으며 그의 정치적 커리어가 시작되었습니다.
1835
[첫 사랑 앤 루트리지 사망]
뉴 살렘에서 만난 앤 루트리지와 사귀었으나, 앤이 장티푸스로 사망하며 링컨은 첫 사랑을 잃는 아픔을 겪습니다.그녀의 죽음은 링컨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링컨과 앤은 사귀었으나 정식으로 약혼하지는 않았습니다. 앤은 L씨와의 결혼을 앞두고 이 사실을 링컨에게 알리고 싶어했지만, 8월 25일에 그녀는 장티푸스로 인해 사망하였습니다.
[베리의 사망과 '국가적 부채']
동업자 베리가 사망하면서 상점의 모든 빚이 링컨에게 넘어왔습니다. 그 규모는 약 1,100달러로, 당시 노동자 일당의 1,000배가 넘는 거액이었습니다.
링컨은 파산 신청 대신 이 빚을 '나의 국가적 부채'라 부르며 갚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지키기 위해 측량 기사, 우체국장 등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1836
[메리 오웬스와의 만남]
켄터키에서 온 메리 오웬스와의 교제를 시작했습니다.그러나 두 사람 모두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이듬해 링컨이 관계를 끊어도 비난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며 관계는 끝났습니다.
링컨은 1830년대 초반에 여자 형제를 만나기 위해 켄터키에서 온 메리 오웬스를 만났고, 1836년 하반기에 그녀와 사귀려고 했습니다. 메리는 1836년 11월에 살렘으로 돌아왔고, 링컨은 한동안 그녀의 사랑을 얻으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1837년 8월 16일, 링컨이 메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끊어도 비난하지 않겠다고 썼고, 그녀는 답장하지 않아 관계는 끝났습니다.
1840
[메리 토드와 약혼]
켄터키주의 부유한 노예 소유주 집안 출신인 메리 토드와 약혼했습니다.링컨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결혼의 서막이었습니다.
링컨은 1839년 12월에 스프링필드에서 메리 토드를 만났고, 12월 말쯤 약혼했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노예를 소유한 부잣집이었습니다.
[일리노이 주의회 창문 탈출 사건]
민주당의 은행 관련 법안 처리를 막기 위해 '의사 정족수 미달'을 유도하려던 링컨은, 회의장 문이 잠기자 1층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출석으로 기록된 뒤라 작전은 실패했고, 미래의 대통령이 창문을 넘는 모습은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체면을 버릴 만큼 열정적인 파르티잔이었음을 보여줍니다.
1841
[메리 토드 결혼 취소]
메리 토드와의 결혼을 취소했습니다.복잡한 심경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결혼에 대한 링컨의 고뇌를 엿볼 수 있습니다.
1842
['레베카' 풍자 편지 기고]
지역 신문에 '레베카'라는 가명으로 민주당 제임스 쉴즈를 조롱하는 풍자 편지를 기고했습니다. 쉴즈의 허영심과 외모를 비하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약혼녀 메리 토드도 이에 동참해 더 자극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제임스 쉴즈의 결투 신청]
자신이 조롱당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쉴즈는 작가가 링컨임을 알아내고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링컨은 메리 토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모든 편지를 썼다고 거짓 자백하고 결투를 받아들였습니다.
링컨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 무기로 '기병대용 브로드소드'를 선택하고, 접근을 막기 위해 사이에 '판자'를 놓는 규칙을 정했습니다.
[선플라워 아일랜드의 결투와 화해]
미시시피강의 블러디 아일랜드에서 결투 직전, 링컨은 긴 팔로 높은 버드나무 가지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무력시위를 했습니다. 압도적인 리치 차이를 확인한 쉴즈는 결국 화해를 받아들였고 결투는 취소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링컨에게 타인의 명예를 존중하는 법과 말의 무게에 대한 교훈을 남겼으며, 이후 그는 다시는 익명 비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메리 토드와 결혼]
메리 토드와 스프링필드 저택에서 결혼했습니다.결혼 준비 중에도 링컨이 도망치려 했다는 일화는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지만, 결국 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결혼 준비 동안에도 링컨은 또다시 메리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으며, 그가 어디로 가려고 했는지 물었을 때 "지옥이겠죠"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문화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넓은 의미에서 행복했다고 전해집니다.
1843
[장남 로버트 토드 출생]
장남 로버트 토드 링컨이 태어났습니다.링컨 부부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로버트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습니다.
1844
[스프링필드에 자택 구매]
링컨 부부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가까운 스프링필드에 집을 한 채 샀습니다.메리 토드 링컨은 한정된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며 가정을 꾸렸습니다.
1846
[연방 하원의원 당선]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일리노이주 주의원을 거쳐 이제 미국의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차남 에드워드 베이커 출생]
차남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이 태어났습니다.링컨은 가정부에 따르면 자녀들을 특별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1847
[14년 만의 부채 청산]
하원의원이 된 해, 마침내 '국가적 부채'라 불렀던 상점 빚을 모두 갚았습니다. 장장 14년이 걸린 이 과정은 그에게 '정직한 에이브'라는 신용 자산을 안겨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빚을 피해 도망치던 시대에 링컨은 끝까지 책임을 다했습니다.
1848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과 영감]
오대호 여행 중 배가 모래톱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과거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기계적 해결책을 고민했습니다.
그는 배의 부력을 인위적으로 높여 얕은 물을 통과하는 장치를 구상했습니다.
1849
[선박 부양 장치 특허 출원]
링컨은 변호사 업무 틈틈이 기계공의 작업실에서 직접 나무 모형을 깎아 특허청에 출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선체 양옆에 팽창 가능한 공기 주머니를 달아 부력을 발생시키는 원리였습니다.
[특허 제6469호 획득]
미국 특허청으로부터 '여울에서 선박을 부양시키는 장치(Buoying Vessels Over Shoals)'로 특허 제6469호를 공식 승인받았습니다. 이로써 링컨은 미국 역사상 특허권을 보유한 유일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비록 상용화되지는 못했으나, 이는 그가 인문학적 소양뿐만 아니라 공학적 문제 해결 능력도 갖춘 혁신가였음을 증명합니다.
1850
[차남 에드워드 베이커 사망]
차남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이 아마도 폐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스프링필드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링컨 부부는 자녀를 잃는 깊은 슬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삼남 윌리엄 월러스 출생]
삼남 윌리엄 월러스 링컨이 태어났습니다.자녀를 잃은 링컨 부부의 슬픔을 덜어주는 존재였으나, 윌리엄 또한 11년 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에드워드가 사망한 지 11개월 뒤에 윌리엄이 태어나 자녀를 잃은 링컨의 슬픔이 완화되었습니다.
1853
[사남 태드 링컨 출생]
넷째 아들 태드 링컨이 태어났습니다.태드는 링컨 대통령 사후에도 생존했지만,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1858
[상원의원 낙선 및 노예제 토론]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그러나 노련한 정치가 더글러스와의 노예제도에 대한 공개 토론에서 노예제를 '악의 제도'라고 비판하며 대중에게 노예제 반대론자라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주었습니다.이 토론은 그를 전국적인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링컨은 이 토론에서 "분열된 집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연설로 노예 제도로 대립하던 미국인의 단결을 호소했습니다. 비록 선거에서 더글러스가 재선되었지만, 이 논쟁은 링컨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습니다.
1860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윌리엄 H.슈어드 상원의원을 제치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이는 그의 정치 경력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제16대 미국 대통령 당선]
미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그의 당선은 남부 주들에게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위기감을 증폭시켰고, 결국 연방 탈퇴의 도미노 현상을 초래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연방 탈퇴]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를 처음으로 선언했습니다.이는 링컨의 당선에 대한 직접적인 반발로, 이어서 6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며 남북전쟁의 불씨가 당겨졌습니다.
링컨의 대통령 당선 후, 남부 주들은 '노예제 반대론자'가 대통령이 된 것에 대해 위기감을 드러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다음 해 1월과 2월에 걸쳐 6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했습니다.
1861
[트랜트호 사건 해결]
트랜트호 사건에서 영국과의 전쟁 위기까지 몰렸던 상황을 해결하며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보여주었습니다.이는 남북전쟁 중 또 다른 국제적 위기를 성공적으로 넘긴 사례입니다.
[남부연합 결성]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 7개 주의 대표들이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모여 '남부연합'을 결성했습니다.이로써 미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제16대 대통령 취임]
에이브러햄 링컨이 제16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고 노예제를 폐지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안고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링컨은 취임 후에도 남부와 지속적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진전이 없었습니다.
[남북전쟁 발발 (섬터요새)]
섬터요새 전투가 발발하며 본격적인 남북전쟁의 서막이 올랐습니다.링컨 대통령은 이 거대한 내전 속에서 연방을 보존하기 위한 전쟁을 이끌게 됩니다.
1862
[노예 강제 해방 법안 승인]
의회에서 남북전쟁에 가담한 주들의 노예를 강제로 해방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링컨은 처음에는 북부와 남부 경계 주의 반발을 우려했으나, 이 법안을 승인하며 노예 해방의 길을 열었습니다.
링컨은 의회 권력으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전쟁 사령관 직권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 법안을 승인했습니다. 그 달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의 첫 판을 내각들에게 발표했습니다. 이 안에는 "정당하고, 필요한 군사 조치로서, 1863년 1월 이후부터, 남부에서 노예로 잡혀있는 모든 사람을 영구히 해방시킨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삼남 윌리엄 월러스 사망]
링컨이 첫 대통령 임기를 수행하던 중, 삼남 윌리엄 월러스 링컨이 11살의 나이로 워싱턴 D.C.에서 열병으로 사망했습니다.이는 링컨 부부에게 또 한 번의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앤티텀 전투 승리]
앤티텀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리했습니다.이 중요한 승리 직후, 링컨은 노예 해방 예비 선언을 발표하며 전쟁의 방향을 노예제 폐지로 전환할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노예해방 예비 선언 공표]
앤티텀 전투 승리 3일 후, 링컨은 '노예 해방 예비 선언'을 공표했습니다.이는 남부 주들에게 1863년 1월 1일까지 연방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노예를 해방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1863
[노예 해방 선언문 공표]
링컨은 역사적인 '노예 해방 선언문'에 서명하고 공표했습니다.북부의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여러 주들의 모든 노예를 즉시 해방하라고 선언했으며, 이로써 노예 제도 폐지가 군사적 목표로 설정되어 북군이 남으로 진주하면서 약 3백만 명의 노예가 해방되었습니다.링컨은 서명하며 "나는 내 삶에서 내가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을, 내가 여기 서명하는 지금 이 순간만큼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 선언 이후 링컨은 해방된 노예를 소집하는 정책을 시행했고, 흑인 군대 소집을 강력히 권장했습니다.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링컨을 "처음으로 미국에서 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려고 하지 않은 위대한 사람"으로 평했습니다.
[대규모 흑인 모병 실시]
링컨의 지시에 따라 대규모 흑인 모병 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로렌조 토머스 장군은 미시시피 강변에서 20개 연대에 달하는 흑인들을 소집하며 전력 증강에 기여했습니다.
링컨은 테네시주 주지사 앤드류 존슨에게 쓴 편지에서 "5만 명에 달하는 무장하고, 훈련받은 흑인 병사들이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반란은 끝날 것입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게티즈버그 연설]
게티즈버그 전투 격전지에서 '게티즈버그 연설'을 발표했습니다.이 짧은 연설문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유명한 문구를 통해 미국의 민주주의 이념을 완벽하게 요약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인용되는 연설로 손꼽힙니다.
이 연설의 가장 유명한 대목은 사실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가 성경을 번역한 후 한 말인 "이 성경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통치를 위한 것 입니다."를 링컨이 인용한 것입니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미국의 전통인 자유주의, 곧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수정 헌법 제13조 통과 주장]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의 통과를 주장하며 노예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이끌었습니다.이는 노예해방 선언의 법적 근거를 강화하고 제도적 완성을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1864
[대통령 재선 성공]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4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전쟁 지지세력과 힘을 모아 국민연합당을 창당하고 재선에 성공했습니다.부통령으로는 민주당 출신의 앤드루 존슨을 내세워 초당적 연합을 꾀했습니다.
공화당의 중도파 수장으로서 링컨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던 공화당 급진파와 전쟁에 반대하던 민주당 양쪽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반대파에 지원책을 폄으로써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으며, 뛰어난 수사학과 연설로 대중의 의견을 이끌었습니다.
1865
[남북전쟁 종전]
4년간 이어진 남북전쟁에서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되며 사실상 종전되었습니다.링컨의 굳건한 리더십과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과 같은 최고 지휘관 선발이 승리로 이끌었습니다.전쟁 종료 후 링컨은 관대한 화해를 통해 국가를 통합하는 재건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북군은 4월 3일에 피터스버그를, 그리고 오후에는 남부의 수도였던 리치먼드를 점령했습니다. 1865년 4월 10일, 로버트 리 장군은 휘하 장교와 장병들에게 이별을 고했고, 4월 12일에는 항복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포드 극장 암살 사건 발생]
남부 지지자이자 유명 배우인 존 윌크스 부스에게 포드 극장에서 암살당했습니다.링컨은 경호원 없이 연극을 관람하던 중, 부스의 총에 머리를 맞아 치명상을 입었습니다.미국 역사상 대통령 임기 중 암살된 최초의 인물이자, 이 날은 공교롭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성 금요일이었습니다.
1864년부터 부스는 링컨을 인질로 잡아 남부 포로를 석방하려 계획했으나, 1865년 4월 11일 링컨의 흑인 투표권 연설을 듣고 암살로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부스는 공범자들과 함께 부통령과 서기 암살도 계획했습니다. 링컨의 경호원이었던 존 파커는 잠시 자리를 비웠고, 부스는 10시 13분에 링컨 바로 뒤에서 머리를 겨눠 총을 쐈습니다. 헨리 래스본 소령이 부스를 붙잡았지만, 부스는 그를 찌르고 탈출했습니다. 링컨은 다음 날 새벽에 사망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사망]
오전 7시 22분, 총격으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진 지 9시간 만에 링컨은 결국 사망했습니다.전쟁 서기관 스탠튼은 "이분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이는 미국 역사에 깊은 비극으로 기록되었으며, 링컨은 영웅이자 순교자로 기억되게 됩니다.
군의관 찰스 리얼은 링컨의 부상을 치명상으로 진단했으며, 길 건너 양복점인 피터슨 하우스로 링컨을 옮겼습니다. 사망 직후 부통령 앤드루 존슨이 제17대 대통령직을 승계했습니다. 링컨의 시신은 기차로 워싱턴에서 고향인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오크리지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미국인들에게 워싱턴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느끼게 하는 순교자적인 이미지를 부여했습니다.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 사살]
링컨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가 워싱턴 D.C.남쪽 버지니아의 개럿 농장에서 발견되어 10일간의 추격 끝에 사살되었습니다.암살범이 처단되며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링컨의 죽음이 남긴 여파는 컸습니다.
1871
[사남 태드 링컨 요절]
대통령의 사후에도 생존했던 넷째 아들 태드 링컨이 시카고에서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링컨 부부는 네 명의 자녀 중 세 명을 어린 나이에 잃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1875
[메리 토드 링컨 정신병원 입원]
남편과 세 자녀를 잃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아내 메리 토드 링컨이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그녀의 삶 또한 링컨 못지않게 비극적이었습니다.
장남 로버트 링컨은 어머니의 정신 건강을 우려하여 1875년에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보냈습니다. 링컨 본인도 임상 우울증이라고 불리는 우울한 상태로 고통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92
[미국 레슬링 명예의 전당 헌액]
사후 100여 년이 지나, 그의 독보적인 레슬링 경력을 인정받아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미국 레슬링 명예의 전당'의 'Outstanding American' 부문에 헌액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육체적 강인함을 지닌 '서부의 사나이'였음을 공식적으로 기리는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