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

작가, 소설가, 언론인, 자연주의 문학가, 사회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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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2: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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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
작가, 소설가, 언론인, 자연주의 문학가, 사회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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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루공-마카르 총서를 통해 제2제국 시기 프랑스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며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지식인으로서 용기 있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과 의문스러운 죽음은 그의 삶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었으며 대중에게 끊임없는 흥미를 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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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

[에밀 졸라 출생]

파리의 생-조제프 가 10번지에서 이탈리아인 아버지 프랑수아 졸라와 프랑스인 어머니 에밀리 오베르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라는 본명으로 1840년 4월 2일 파리 생-조제프 가 10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토목기사이자 이탈리아 하급 장교 출신의 프랑수아 졸라였고, 어머니는 두르당 출신의 에밀리 오베르였습니다. 그는 부모의 외동아들이었습니다.

1847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가족의 어려움]

엑상프로방스에서 졸라 댐 건설을 맡던 아버지가 폐렴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가족은 채권자들과의 법적 분쟁과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엑상프로방스에서 졸라 댐 건설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1847년 3월 27일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로 인해 채권자들이 졸라 수로상사에 소송을 걸었고, 어머니 오베르 부인은 법적 절차에 따라 아들과 함께 파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회사는 1852년 파산 선고를 받고 1853년 경매로 매각되었으며, 가족은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1858

[파리로 이주하여 문학적 소양을 쌓다]

성공을 꿈꾸며 어머니와 함께 엑상프로방스를 떠나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이 시기 몰리에르, 몽테뉴,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을 읽으며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 쥘 미슐레 같은 동시대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1858년, 에밀 졸라는 성공을 바라며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사했습니다. 당시 그는 몰리에르, 몽테뉴, 셰익스피어 등의 고전 작가들을 탐독하며 자신의 인문 교양을 넓혔고, 훗날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줄 발자크는 아직 접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쥘 미슐레와 같은 동시대 작가들로부터 과학적, 의학적 영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친구들과 어울리며 점차 사회생활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1865

[첫 소설 《클로드의 고백》 출판]

파리 하류층 삶의 현실에서 영감을 얻어 첫 소설 《클로드의 고백》을 출판했습니다. 이는 그의 문학적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1860년에서 1861년 겨울 동안 매춘부 베르트와의 만남과 그녀를 구원하려던 이상주의적 시도가 파리 하류층 삶의 냉혹한 현실과 부딪히며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에밀 졸라는 자신의 첫 소설인 《클로드의 고백》의 주제를 끌어냈고, 1865년에 이 작품을 출판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867

[《테레즈 라캥》 발표, 자연주의 작가로 인정받다]

첫 작품 《테레즈 라캥》을 발표하며 자연주의 작가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 의학 개념을 문학에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867년 에밀 졸라는 자신의 첫 주요 작품인 《테레즈 라캥》을 출판하며 문단에서 자연주의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설은 그가 의학 연구자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 의학 이론을 문학 창작에 적용하려는 시도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1870

[알렉상드린 졸라와 결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 직전 파리 17구 시청에서 알렉상드린 졸라와 결혼했습니다. 아내 알렉상드린은 그의 불안한 삶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870년 5월 31일, 에밀 졸라는 파리 17구 시청에서 알렉상드린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알렉상드린은 불안정한 삶을 살던 졸라에게 없어서는 안 될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졸라는 평생 아내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는 근시와 모친 부양 상황으로 인해 전쟁에 징집되지 않았습니다.

1871

[《루공-마카르 총서》 시작을 알리는 《루공 가의 운명》 출간]

20권 분량의 기념비적인 소설 대작 《루공-마카르 총서》의 첫 작품인 《루공 가의 운명》을 출간하며 프랑스 제2제국 시대의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1871년 에밀 졸라는 프랑스 제2제국 시기의 사회를 배경으로 한 방대한 20권의 소설 대작 《루공-마카르 총서》의 서막을 여는 첫 작품 《루공 가의 운명》을 출간했습니다. 이 총서는 수세대에 걸친 루공-마카르 가문의 역정을 통해 시대와 특정 세대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담아내려는 야심 찬 문학적 시도였습니다. 이 시기, 언론 활동 덕분에 에드몽과 쥘 드 공쿠르 형제와 친분을 가졌고, 1871년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만나 알퐁스 도데, 이반 투르게네프 등과 교류를 시작하며 문학적 세계를 확장했습니다.

1877

[《목로주점》 대성공과 경제적 안정]

대표작 중 하나인 《목로주점》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오랫동안 겪어왔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삶을 얻었으며, 문학적 명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1877년, 에밀 졸라의 소설 《목로주점》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의 연수입은 크게 증가하며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고,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이 시기 기 드 모파상,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등 젊은 작가들과 교류하며 '육인회'를 결성했고, 이들은 1880년에 작품 모음집 《메당의 만찬》을 함께 출간했습니다.

1880

[《실험소설론》 발표와 '메당의 만찬' 출간]

자연주의 문학 이론을 집대성한 평론집 《실험소설론》을 발표하며 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와 함께 '육인회' 작가들과 공동 작품집 《메당의 만찬》을 출간했습니다.

1880년, 에밀 졸라는 자신의 자연주의 문학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평론집 《실험소설론》을 발표했습니다. 이 책은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 의학 방법론을 문학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당시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그는 기 드 모파상,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등과 함께 '육인회'를 결성하여 공동 작품집 《메당의 만찬》을 출간했습니다. 이 해에 그의 어머니 에밀리 오베르도 사망했습니다.

1886

[《작품》 출간으로 폴 세잔과 절교]

소설 《작품》을 출간했으나, 소설 속 실패한 화가 클로드 랑티에가 자신을 모델로 했다고 생각한 오랜 친구 폴 세잔과 결국 절교하게 되었습니다.

에밀 졸라가 1886년 소설 《작품》을 출간했을 때, 그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당대 화가였던 폴 세잔은 작품 속 실패한 화가 클로드 랑티에가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오랜 우정은 금이 갔고, 세잔은 졸라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 후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통보하며 절교했습니다.

1893

[《루공-마카르 총서》 완결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상]

《파스칼 박사》를 마지막으로 1871년부터 시작된 20권 분량의 방대한 대작 《루공-마카르 총서》를 완결하며 프랑스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와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했습니다.

1893년, 에밀 졸라는 《파스칼 박사》를 출간하며 1871년 《루공 가의 운명》으로 시작된 총 20권의 대작 《루공-마카르 총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이 거대한 연작 소설은 프랑스 제2제국 시대의 다양한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자연주의 문학의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같은 해 그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하며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898

['나는 고발한다...!' 발표와 드레퓌스 사건 참여]

일간지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기사를 발표하여 드레퓌스 사건의 부당함을 고발했습니다. 이로 인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런던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는 당시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간지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프랑스 군부와 가톨릭 교회가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간첩 혐의로 부당하게 유죄 판결 내린 것을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이로 인해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같은 해 런던으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와 명예, 그리고 목숨까지 걸었던 용기 있는 사회 참여로 평가받습니다.

[드레퓌스 재심 결정 후 프랑스 귀환]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 진행이 결정되자 망명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귀환했습니다.

1898년 6월,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이 결정되자 에밀 졸라는 더 이상 망명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던 이들과 함께 힘겨운 싸움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1902

[의문스러운 사망과 암살 의혹]

자택에서 난로 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했습니다. 훗날 굴뚝 청소부의 자백으로 인한 암살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군중과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추모했습니다.

1902년 9월 29일, 에밀 졸라는 파리 자택에서 피워둔 난로의 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계속 유지하며 '공화국 대통령 무슈 루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프랑스 군부와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던 중 발생한 일이라 의문이 증폭되었습니다. 훗날 한 굴뚝 청소부가 누군가의 지시로 굴뚝을 막았다고 자백하면서 암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으며, 특히 광부 대표단이 그의 소설 《제르미날》을 연호하며 추모하는 모습은 그가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큰 존경을 받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그를 잔 다르크에 비유하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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