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리스트 갈루아
수학자, 사회운동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2:10:26
- 수학의 오랜 난제인 5차 이상 다항식 해법을 제시 군 개념을 세계 최초로 도입한 불운의 천재. - 당대 최고 명문 입시 실패와 스승의 외면 속에서도 독자적 이론을 개척했다. - 급진적 공화주의자로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며 격동의 삶을 살았다. - 스무 살 의문의 결투로 짧은 생을 마감했으나 그의 유고는 현대 대수학의 초석이 되었다.
1811
[수학 천재 갈루아 탄생]
프랑스 부르라렌에서 학교 교장이자 공화주의자였던 아버지와 고전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2세까지는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총명함을 보였다.
아버지는 자유당의 당수였으며, 1814년 부르라렌의 시장이 되었다. 어머니는 라틴어 고전 문학을 읽을 수 있는 법률가의 딸이었다.
1823
[수학에 눈을 뜨다]
리세 루이르그랑에 입학 후, 정치적 혼란으로 많은 학생이 퇴학당하는 와중에도 학업을 이어갔다.
14세 무렵, 다른 과목에 흥미를 잃고 오직 수학에만 깊이 몰두하기 시작했다.
15세에는 르장드르와 라그랑주의 전문 수학 서적을 탐독하며 천재성을 드러냈고, 이는 훗날 자신의 방정식 이론을 세우는 기반이 되었다.
입학 당시 정치 문제로 100여 명의 학생들이 퇴학당했지만 갈루아는 별다른 문제없이 학교생활을 하며 2학년 때 라틴어 우수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학교의 평범한 수업에 불만을 느끼며 오직 수학에만 빠져들었고, 학교는 그의 이런 학습 방식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828
[좌절과 재기]
프랑스 최고의 수학과가 있던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시에서 서툰 구두 시험으로 낙방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그 해 연분수를 주제로 한 첫 논문을 발표하며 새내기 수학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듬해에는 다항 방정식 연구 논문 두 편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했으나, 당시 저명한 수학자 코시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출판을 거절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떨어진 후 수학 과목 평판이 좋지 않던 에콜 프레파라투아르(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의 전신)에 입학했다. 코시는 논문 내용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아카데미 수학상 수여를 위해 두 논문을 하나로 합쳐줄 것을 요청했다.
1829
[수학적 좌절과 음모론]
5차 이상 다항 방정식의 해 존재 판별식에 대한 혁명적인 논문을 제출했지만, 심사위원 푸리에의 사망으로 논문이 분실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로 인해 아카데미 수학상 수상자에서 제외되자, 갈루아는 자신의 논문이 정치적 음모로 배제되었다고 확신하며 격분했다.
첫 두 편의 논문은 코시가 거절하며 한 편으로 고쳐줄 것을 요청했었다. 결국 그해 수상자는 야코비였고, 갈루아와 아벨의 논문은 석연찮은 이유로 제외되었다.
[아버지의 자살]
아버지는 정치 반대파의 교묘한 모략으로 시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선택을 했다.
이 사건은 갈루아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며칠 뒤 치러진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시에도 영향을 미쳐 또 다시 낙방했다.
아버지는 짧은 풍자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으나, 반대파가 이를 위조하여 공격했고 결국 시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갈루아를 평가한 면접관은 그의 논술이 비약이 심해 논리적으로 취약했다고 평가했다. 이듬해 에콜 노르말 입학 시험에서는 "논지는 불명확하지만, 수학적 지성과 예지는 특이할 만하다"는 평과 함께 합격했다.
1830
[혁명적인 수학 개념 탄생]
수학 아카데미에서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문을 학회지에 기고하여 출간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수열을 특정 수학적 조건에 따라 묶는 방법인 '군(群)'이라는 용어를 세계 최초로 사용하며 추상대수학의 문을 열었다.
이는 갈루아 이론과 군론의 기반이 되는 기념비적인 업적이었다.
또한 유한체에 대해서도 최초로 정리했다.
출간된 논문은 갈루아 이론에 대한 것, 고차 방정식의 해에 대한 것, 그리고 유한체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이 논문들을 통해 현대 대수학의 핵심 개념들을 제시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샤를 10세의 7월 포고령에 대항하여 7월 혁명이 발발하자,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은 혁명에 참여했지만 갈루아는 에콜 노르말 교장에 의해 학교에 감금되었다.
이에 격분한 갈루아는 교장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편지를 신문에 기고했고, 실명이 노출되어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프랑스는 샤를 10세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7월 포고령을 선포했으나, 7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 1세가 즉위하는 등 매우 불안정한 정치 상황이었다. 갈루아는 <가제트 데제콜>에 편지를 기고했다.
1831
[혁명가의 길로]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제적당한 후, 갈루아는 급진 공화주의 세력인 국가방위군 포병대에 가입하여 정치 운동에 투신했다.
수학 연구와 정치 집회에만 몰두하던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국가전복 음모 가담 혐의로 체포되며 첫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
국가방위군 포병대는 정부를 약화시키고자 한다는 이유로 1830년 12월 31일 해산되었다.
[단도로 왕을 위협하다]
국가방위군 포병대 장교들의 혐의가 벗겨져 모두 석방된 것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갈루아는 단도를 잔에 대며 국왕 루이 필리프 1세를 위해 건배하는 돌발 행동을 했다.
이는 왕의 목숨을 위협했다는 밀고로 이어졌고, 다음날 그는 다시 체포되었다.
연회는 명예 회복을 기념하여 알렉상드르 뒤마 같은 저명인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열렸다. 갈루아는 6월 15일 석방되었다.
[금지된 군복, 6개월 수감]
바스티유의 날, 갈루아는 금지된 국가방위군 포병대의 제복을 입고 권총과 소총, 단도로 무장한 채 공화주의 시위를 주도하다 또다시 체포되었다.
이 일로 그는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고, 이 기간 동안 수감된 채 수학 이론 연구에 몰두했다.
이 수감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수학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1832
[또다시 좌절된 논문 인정]
수감 중이던 갈루아는 시메옹 드니 푸아송의 요청으로 방정식 이론에 대한 논문을 제출했다.
하지만 푸아송은 논문이 "충분히 엄밀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다"며 냉담하게 거절했다.
이 평가는 갈루아가 출소한 10월에야 전달되었고, 그는 자신의 불운한 상황과 겹쳐 격하게 반발하며 자비 출간을 결심했다.
푸아송은 평가서 말미에 "저자가 보다 명확한 견해를 가진 양식으로 자신의 연구 전체를 작성하여 출판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갈루아는 이 평가서를 받고 자신의 연구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으며, 감옥으로 기록들을 보내달라고 하여 출옥할 때까지 연구했다.
[짧은 자유, 그리고 운명]
6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출소 직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운명적인 결투에 휘말리게 된다.
수감 기간 동안 수학 연구를 이어갔지만, 출소 후에는 정치적 행동이 우선시되었다.
[스무 살의 비극적 결투]
사랑에 빠졌던 여인 스테파니펠리시 포트랭 뒤 모텔이 빌미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결투에 휘말렸다.
그는 결투 5일 전 친구에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때문에 결투를 하게 되었다고 편지를 썼다.
권총 결투에서 오른쪽 복부에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결투 상대가 누구였는지, 왜 피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추측만 무성한 채, 짧고 격렬했던 그의 삶은 종착역에 다다랐다.
결투가 있기 5일 전 친구 슈발리에에게 편지를 썼다. 갈루아가 사랑에 빠졌던 여인은 그가 생애 마지막 한 달간 머물렀던 여관 주인의 딸 스테파니펠리시 포트랭 뒤 모텔로 밝혀졌다. 갈루아 자신이 쓴 편지에 뒤 모텔의 이름이 지워졌던 흔적이 있다. 몇몇 설은 갈루아가 왕당파와 경찰이 연루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렸다고 하지만, 갈루아가 결투 전날 동지들에게 남긴 편지에는 결투 상대가 공화주의자였다고 적혀있다: "두 애국지사가 결투를 걸어왔습니다. 저는 피할 수 없습니다. 조국에 내 이름을 남길 만큼 오래 살지 못하는 운명이니 여러분이 나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꽃 같은 삶의 마감]
전날 입은 총상으로 코섕 병원에 실려 갔으나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급히 달려온 남동생 알프레드에게 "울지 마, 알프레드! 20살 나이에 죽으려면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짜내야 하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불과 스무 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2000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경찰과 동료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질 정도로 그의 죽음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죽기 전 친구 슈발리에에게 그동안 연구했던 수학 이론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담은 편지를 남기며 야코비나 가우스에게 자신의 정리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평가해달라고 당부했다. "훗날 (바라건대) 사람들은 이 엉망인 내용을 해석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그의 죽음은 이후 갈루아 이론과 군론의 중요성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