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가, 언론인, 퓰리처상 수상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1:50:38
- 간결하고 절제된 빙산 이론 문체로 20세기 소설에 지대한 영향 - 두 차례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등 격동적인 삶을 작품에 투영 - 《노인과 바다》 등 수많은 걸작으로 퓰리처상 노벨 문학상 수상 - 모험과 고독 죽음의 주제를 탐구하며 현대 문학의 거장이 됨
- 작가 헤밍웨이의 탄생
- 기자로서의 첫 발걸음
- 전쟁 영웅, 중상 입다
- 첫사랑의 아픔
- 첫 번째 결혼과 유럽 행
- 파리 특파원 활동
- 잃어버린 원고의 비극
- 투우에 매료되다, '파파' 별명 얻다
-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출판
- 두 번째 결혼, 폴린 파이퍼
- 파리 생활 청산, 키웨스트로
-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 《무기여 잘 있거라》 출판
- 교통사고로 작가 생명 위기
- 아프리카 사파리 경험
- 스페인 내전 종군 기자 활동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집필
- 세 번째 결혼 및 대표작 출판
- 제2차 세계대전 종군, 새 인연
- 네 번째 결혼, 메리 웰시
- 전 세계를 사로잡은 《노인과 바다》
-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 수상
- 생사를 넘나든 비행기 사고
- 노벨 문학상 수상, 그러나 불참
- 잃어버린 파리 원고의 귀환
- 쿠바에서 아이다호로 이주
- 쿠바와의 작별
- 편집증과 FBI 감시
- 메이오 클리닉 정신과 치료
- 자살 시도와 재입원
- 작가 헤밍웨이의 비극적인 최후
1899
[작가 헤밍웨이의 탄생]
미국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의사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1913
[스포츠와 글쓰기 재능 발견]
오크파크 앤드 리버포레스트 고등학교에 다니며 복싱, 육상 등 여러 스포츠에 능했다.
특히 영어 과목에 뛰어나 교내 신문 '더 트래피즈'에 기사를 실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1917
[기자로서의 첫 발걸음]
고등학교 졸업 후 《캔자스 시티 스타》에서 신참 기자로 일하며 '짧은 문장, 짧은 첫 단락, 힘 있는 영어, 긍정적 표현'이라는 언론사의 스타일 가이드로부터 간결한 문체의 기초를 다졌다.
[시력 문제로 입대 좌절]
낮은 시력 때문에 미국 육군 지원에서 탈락했으나, 1918년 초 적십자 이탈리아 야전병원 수송차 운전병으로 자원하며 전쟁터로 향했다.
1918
[전쟁 영웅, 중상 입다]
이탈리아 전선 최전선에서 초콜릿과 담배를 전달하던 중 박격포 공격으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부상 중에도 이탈리아 병사들을 구조한 공로로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경험은 훗날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기초를 형성했다.
1919
[토론토에서 작가 활동 시작]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고, 이후 캐나다 토론토로 거처를 옮겨 《토론토 스타 위클리》에서 프리랜서 및 전속 작가로 일하며 글쓰기 경력을 이어갔다.
[첫사랑의 아픔]
밀라노 적십자 병원에서 6개월간 치료를 받은 후 퇴원했다.
병원에서 만난 7살 연상 간호사 애그니스 폰 커로우스키와 결혼을 꿈꿨으나, 그녀의 이별 통보로 큰 실연을 겪었다.
이 경험은 이후 여성과의 관계 패턴에 영향을 미쳤다.
1920
[시카고 생활과 소설가 앤더슨]
친구들과 함께 살기 위해 시카고로 이사했다.
이 시기 월간 저널 《코퍼레이티브 커먼웰스》의 부편집장으로 일하며 소설가 셔우드 앤더슨을 만났다.
이곳에서 첫 번째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을 만났다.
1921
[첫 번째 결혼과 유럽 행]
시카고에서 만난 8살 연상의 해들리 리처드슨과 결혼했다.
소설가 셔우드 앤더슨의 조언에 따라 유럽 여행 중 파리로 떠나게 된다.
[파리 특파원 활동]
《토론토 스타》의 해외 특파원으로 일하며 파리로 이주했다.
이 시기 거트루드 스타인, 제임스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등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적 성장을 이뤘다.
1922
[잃어버린 원고의 비극]
제네바로 가던 아내 해들리가 리옹역에서 헤밍웨이의 원고로 가득 찬 여행 가방을 잃어버렸다.
이는 그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으며, 잃어버린 원고 중 일부와 이탈리아에서 쓴 단편을 모아 1923년 첫 책 《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를 출판했다.
1923
[투우에 매료되다, '파파' 별명 얻다]
아내 해들리와 함께 스페인 팜플로나의 산 페르민 축제를 방문하며 투우의 매력에 빠졌다.
이 시기부터 '파파'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 경험은 첫 장편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배경이 된다.
[첫 아들 잭의 탄생]
첫 아들 잭 헤밍웨이가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몇 달 뒤에는 두 번째 책인 단편집 《우리들의 시대에》(소문자)가 출판되었다.
1924
[파리로 다시 돌아가다]
토론토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작가로서의 삶을 위해 해들리와 함께 파리로 돌아와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듬해 단편집 《우리들의 시대에》(대문자)를 출판하며 문단에 주목받았다.
1925
[피츠제럴드와의 인연]
F.
스콧 피츠제럴드를 만나 '적대적이면서도 존경하는' 우정 관계를 맺었다.
그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장편 소설 집필을 결심하게 된다.
1926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출판]
첫 장편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가 출판되었다.
간결하고 견고한 서사로 기존 영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전쟁 직후 해외를 떠도는 '잃어버린 세대'의 모습을 담아 헤밍웨이의 대표작이 된다.
1927
[두 번째 결혼, 폴린 파이퍼]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작업을 거듭하며 아내 해들리와의 관계가 나빠지는 가운데, 폴린 파이퍼와 불륜을 시작했다.
결국 해들리와 이혼하고, 그해 5월 파리에서 《보그》 편집자로 일하던 폴린 파이퍼와 재혼했다.
결혼 전 파이퍼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 출판]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이 출판되었다.
권투 경험을 다룬 〈오만 달러〉는 '현실주의의 걸작'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1928
[파리 생활 청산, 키웨스트로]
아이를 갖게 된 폴린의 요청으로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키웨스트 섬으로 이주했다.
이사 직전 집 화장실 사고로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다시는 대도시에서 살지 않게 된다.
[두 번째 아들 패트릭의 탄생]
폴린이 캔자스시티에서 아들 패트릭 헤밍웨이를 출산했다.
출산 당시의 어려움은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 반영되었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뉴욕에 머물던 중 아버지의 자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보낸 금전적인 걱정 말라는 편지가 자살 직후 도착한 사실에 더욱 비통해하며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29
[《무기여 잘 있거라》 출판]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장편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가 출판되었다.
헤밍웨이의 작가적 위상을 공고히 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같은 해 여름에는 스페인에서 투우를 주제로 한 논픽션 《오후의 죽음》 구상을 시작했다.
1930
[교통사고로 작가 생명 위기]
친구 더스 패서스를 바래다주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팔이 부러졌다.
글을 쓰던 손의 신경 회복에 1년 가까이 걸리며 깊은 고통을 겪었다.
이는 그의 작가 활동에 큰 지장을 주었다.
1931
[세 번째 아들 그레고리 탄생]
세 번째 아들 그레고리 헤밍웨이가 태어났다.
1990년대 중반 그레고리는 성전환 수술 후 글로리아 헤밍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1932
[투우에 대한 논픽션 출판]
투우를 주제로 한 논픽션 《오후의 죽음》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문체론인 '빙산 이론'을 언급하며, 작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아도 독자가 진실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33
[아프리카 사파리 경험]
폴린과 함께 케냐 사파리로 10주간 여행을 떠났다.
이 경험은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의 주요 소재가 된다.
1934
[낚싯배 '필라 호'와 카리브해]
낚싯배 '필라 호'를 사들여 카리브 제도로 항해를 시작했다.
이 배는 이후 그의 많은 해양 모험과 작품 활동에 동반자가 된다.
1937년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출판했다.
1937
[스페인 내전 종군 기자 활동]
폴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아메리카 신문 연맹 특파원 자격으로 스페인 내전 현장으로 떠났다.
이곳에서 저널리스트 마사 겔혼을 만나 관계를 발전시켰으며, 마드리드 폭격 경험을 바탕으로 유일한 희곡 《제5열》을 집필했다.
193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집필]
마사 겔혼에게 영감을 받아 자신의 역작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7월 완성했다.
같은 해 봄에는 쿠바 아바나로 이주하여 암보스문도스 호텔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1940
[세 번째 결혼 및 대표작 출판]
폴린과의 이혼 후 샤이엔에서 저널리스트 마사 겔혼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 시기에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출판되었는데, 한 달 만에 백만 부가 팔렸고 퓰리처상 후보에 오르며 문학적 명성을 다시 인정받았다.
1941
[중국 특파원 활동 및 논란]
마사 겔혼의 잡지 계약을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헤밍웨이는 전반적으로 중국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 기간 '아르고 요원'이라는 암호명으로 소련의 비밀 요원 활동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미국이 선전포고하기 직전 쿠바로 돌아왔다.
1944
[제2차 세계대전 종군, 새 인연]
제2차 세계대전 종군 기자로 런던과 유럽 등지에 머물렀다.
런던에서 《타임》 특파원 메리 웰시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된다.
마사 겔혼과는 이 시기에 이혼을 결정하고, 1945년 3월 최종적으로 이혼했다.
1946
[네 번째 결혼, 메리 웰시]
메리 웰시와 결혼했다.
결혼 5달 후 메리가 자궁 외 임신을 겪는 등 여러 불행이 겹쳤다.
이 시기 교통사고, 부상 등 건강 문제가 끊이지 않았으며, 친한 작가들의 죽음으로 큰 우울감에 빠졌다.
1947
1948
[새로운 플라토닉 사랑의 영감]
유럽 여행 중 베니스에서 19세 소녀 아드리아나 이반치치와 플라토닉 사랑에 빠졌다.
이 경험은 소설 《강 건너 숲속으로》에 영감을 주었으나, 1950년 출판된 이 작품은 혹평을 받았다.
1951
[전 세계를 사로잡은 《노인과 바다》]
《강 건너 숲속으로》의 실패에 화가 나 8주 만에 《노인과 바다》의 초고를 집필했다.
스스로 '내가 써 내려갈 수 있는 작품 중 최고'라고 평한 이 작품은 1952년 출판되며 '이달의 도서'로 선정되어 전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1953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 수상]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는 그의 문학적 성과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수상 후 두 번째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을 떠났다.
1954
[생사를 넘나든 비행기 사고]
아프리카 여행 중 두 차례 비행기 사고를 당해 머리 부상, 갈비뼈 골절, 심각한 화상과 뇌진탕을 입었다.
첫 번째 사고 소식에 언론은 그의 부고를 오보하기도 했으며, 이 사고로 남은 생 대부분을 병과 함께 지내게 된다.
[노벨 문학상 수상, 그러나 불참]
《노인과 바다》의 서사 기술과 현대적 스타일을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아프리카 사고 후유증으로 시상식에 불참하고 서면으로 소감을 전달했다.
이 소감에서 작가의 고독한 삶을 강조했다.
1955
[심각한 건강 악화]
간 질환, 고혈압, 동맥경화 등 심각한 건강 문제로 계속 몸져누웠다.
의사의 금주 권고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이기기 위해 음주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1956
[잃어버린 파리 원고의 귀환]
파리 리츠 호텔에 보관했다가 잊고 있던 트렁크를 찾았다.
트렁크 안에는 파리 시절 쓴 여러 원고들이 있었고, 이는 1957년 초 회고록 《움직이는 축제》 집필의 계기가 되었다.
1959
[쿠바에서 아이다호로 이주]
핑카 비히아의 잦은 방문객에 불만을 느껴 쿠바를 떠나 아이다호 케첨 외곽에 빅우드강이 내려다보이는 집을 구매했다.
쿠바 피델 카스트로 정권에 기뻐했으나, 이듬해 국유화 정책으로 쿠바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1960
[쿠바와의 작별]
카스트로 정권의 외국 자산 국유화 소식에 쿠바를 마지막으로 떠났다.
아바나 은행 금고에 예술품과 원고를 남겼으며, 1961년 피그스만 침공 이후 핑카 비히아는 쿠바 정부에 의해 강제 수용되었다.
[편집증과 FBI 감시]
《라이프》지의 의뢰로 투우 기사 '위험한 여름'을 연재했다.
스페인에서 뉴욕을 거쳐 아이다호로 이동하는 동안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편집증 증상을 보였다.
사후 FBI 파일 공개로 실제로 그가 감시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메이오 클리닉 정신과 치료]
메리의 간호가 불가능해지자 미네소타 메이오 클리닉에 입원하여 고혈압 치료 및 전기 경련 요법(ECT)을 받았다.
그는 이 치료가 기억을 지우고 머릿속을 어지럽힌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1961
[자살 시도와 재입원]
퇴원 3개월 뒤 케첨으로 돌아와 샷건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이 메리에게 발견되어 다시 선밸리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로체스터에서 세 차례 더 ECT 치료를 받고 6월 말 퇴원하여 케첨으로 돌아왔다.
[작가 헤밍웨이의 비극적인 최후]
아이다호 케첨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던 산탄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아버지를 포함해 여동생과 남동생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1961년 초 혈색소침착증 진단을 받은 사실이 사후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