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비 십자군
종교 전쟁, 십자군, 프랑스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43:34
13세기 가톨릭교회가 이단을 토벌하기 위해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지역에 일으킨 대규모 종교 전쟁입니다. 카타리파 박멸을 목표로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왕국의 남부 영토 확장 야욕과 얽히며 수십만 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이후 도미니코회와 종교재판의 설립을 촉진한 역사적 전환점이자 극심한 폭력과 학살로 얼룩진 잔혹한 십자군으로 기록됩니다. 이는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종교 전쟁 중 하나로 약 20만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랑그도크 주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1176
[알비파의 첫 등장]
남부 프랑스 랑그도크 지역에서 카타리파(알비파)가 대중적인 교파 운동으로 처음 알려지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화했던 이 지역에 새로운 종교적 움직임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900년 만에 대중적 세력을 지닌 교파가 이단으로 규정되는 계기가 됩니다.
1198
[교황의 카타리파 대응]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급속히 확산되는 카타리파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합니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설교를 통한 개종을 시도했으나, 이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카타리파가 지역 귀족들의 강력한 후원을 받으며 교세가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1208
[교황 특사 살해]
툴루즈의 레몽 6세 백작이 파문된 후, 교황 특사 피에르 드 카스텔뇌가 레몽 백작을 만나 격렬한 언쟁 끝에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격노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랑그도크 지역에 대한 십자군 출정을 요청하는 칙서를 선포하며, 이는 알비 십자군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됩니다.
1209
[알비 십자군 발발]
교황 칙서에 따라 프랑스 북부 귀족들이 남부 랑그도크 지역을 향해 결성한 알비 십자군이 공식적으로 발발합니다.
이들은 이단으로 규정된 카타리파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했으며, 이는 프랑스 남부의 정치적 지형을 영구히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대규모 십자군 집결]
약 1만 명의 십자군이 리옹에 집결하여 남쪽으로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툴루즈의 레몽 6세는 임박한 재앙을 직감하고 십자군 토벌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하며 파문을 철회받습니다.
하지만 레몽 로저는 카르카손으로 도주하여 방어 준비를 합니다.
[베지에 대학살]
십자군이 베지에를 함락시키고 끔찍한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가톨릭 교도와 카타리파를 가리지 않고 약 7천에서 2만 명의 시민이 살해당하고 도시가 파괴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십자군의 잔혹함을 알리며 이후 여러 도시들이 저항 없이 항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알비 십자군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첫 번째 대규모 학살 사건입니다..
교황 특사 아르나우드 아말리크가 교황에게 도시 함락을 보고한 문서 등 여러 기록에 따르면 희생된 시민이 7천에서 2만 명에 이릅니다.
[카르카손 포위 시작]
십자군이 견고한 성곽 도시 카르카손에 당도하여 포위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시민이 도주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고, 도시는 곧 긴장감에 휩싸였습니다.
이는 베지에의 끔찍한 소식에 이은 또 다른 대규모 공성전의 서막이었습니다.
[카르카손 물길 차단]
십자군이 카르카손으로 들어가는 물길을 차단하며 도시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방어군 지도자 레몽 로저 드 트랑카발은 협상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포로로 붙잡히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지도자의 상실은 도시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카르카손 함락]
긴 포위 끝에 카르카손이 십자군에 항복했습니다.
시민들은 살해당하지는 않았지만, 알몸으로 도시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카르카손의 함락은 주변 도시들에게 큰 공포를 안겨주었고, 십자군은 가을이 지나기 전에 인근 지역을 무혈 점령하며 초기 진압의 기세를 올렸습니다.
1210
[미네르바 화형 사건]
방비가 잘 된 요새 미네르바가 십자군의 공격 끝에 함락되었습니다.
카타리파에게는 가톨릭으로 개종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끝까지 거부한 140명은 화형에 처해지는 잔혹한 종교적 처벌이 가해졌습니다.
이는 십자군이 이단 박멸을 위해 얼마나 단호했는지를 보여줍니다.
1211
[툴루즈 공성전 시작]
툴루즈의 레몽 6세가 다시 파문당하자, 십자군은 카타리파의 중심지이자 강력한 거점인 툴루즈를 향해 진군하여 공성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전투는 길게 이어지며 십자군에게 큰 난관이 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1213
[페테르 2세 전사]
카타리파를 돕기 위해 십자군에 합류했던 아라곤 왕국의 페테르 2세가 무레 전투에서 전사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카타리파 세력에게 큰 타격이었으며, 지역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215
[랑그도크 대다수 점령]
장기간의 군사 작전 끝에 랑그도크 지역의 대부분 도시가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알비 십자군의 초기 진압 단계가 사실상 마무리됩니다.
이는 카타리파 세력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1216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사망]
알비 십자군을 촉구했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사망했습니다.
이는 십자군에 대한 종교적 동력이 약화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218
[몽포르 사령관 전사]
툴루즈가 함락된 후 도주했던 레몽 6세와 그의 아들 레몽 7세가 지역 도시들의 반란을 주도하며 십자군과 대치하는 가운데, 십자군 사령관 몽포르가 전사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도자를 잃은 십자군은 결국 랑그도크에서 철수하기 시작하며 카타리파 세력의 반격이 가시화됩니다.
1222
[레몽 6세 사망]
알비 십자군에 맞서 싸웠던 툴루즈의 레몽 6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레몽 7세가 백작 지위를 계승했습니다.
이는 랑그도크 지역의 저항 세력에게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음을 의미합니다.
1223
[루이 8세의 십자군 지휘]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사망하고 루이 8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새 국왕 루이 8세는 랑그도크 지역에 대한 십자군을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하며, 프랑스 왕국이 이단 토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1225
[레몽 7세 재차 파문]
툴루즈 백작 레몽 7세가 그의 아버지처럼 다시 파문당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국왕 루이 8세가 이끄는 십자군이 랑그도크 지역에 대한 압박을 한층 강화했음을 보여줍니다.
1226
[루이 8세의 친정]
프랑스 국왕 루이 8세가 직접 새롭게 십자군을 결성하여 랑그도크로 진격했습니다.
국왕이 직접 군을 이끌고 오자 많은 요새화된 도시들이 저항 없이 항복하는 등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 통치하의 아비뇽은 3개월간 끈질기게 저항했습니다.
[아비뇽 함락]
루이 8세가 이끄는 십자군의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아비뇽이 마침내 항복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왕권이 랑그도크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루이 8세 사망]
프랑스의 루이 8세 국왕이 사망하고, 어린 루이 9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에 루이 8세의 아내 블랑카 데 카스티야가 섭정으로서 십자군을 통솔하게 됩니다.
그녀는 레몽 7세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며 상황을 해결하려 시도했습니다.
1229
[모 협정 체결]
블랑카 여왕의 제안을 받아들인 레몽 7세가 프랑스 북부 모에서 협정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협정 직후 레몽 7세는 붙잡혀 고문당한 후 구속되었고, 이로써 랑그도크 지역은 프랑스 국왕의 직접 통치하에 놓이게 됩니다.
알비 십자군의 주요 군사 작전이 종결되고 프랑스 왕국의 영토가 크게 확장된 전환점입니다.
[툴루즈 종교재판 개시]
랑그도크가 프랑스 국왕의 점령 하에 놓이자, 툴루즈에서 대규모 종교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카타리파 잔당을 색출하고 이단 사상을 뿌리 뽑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으며, 이후 수많은 사람이 종교적 이유로 처벌받는 계기가 됩니다.
1233
[도미니코회, 종교재판 전담]
새로 즉위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도미니코회에 종교재판의 권한을 일임했습니다.
이로써 랑그도크 전역에서 종교재판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카타리파는 물론 이단으로 규정된 수많은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거나 산 채로 불태워지는 등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1244
[몽세귀르 요새 함락]
9개월간의 끈질긴 공성전 끝에 카타리파의 강력한 요새 몽세귀르가 함락되었습니다.
이는 카타리파 저항 세력에게 큰 타격이었으며, 그들의 거점들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245
[퀘리부 함락과 저항 종결]
카타리파의 마지막 요새인 퀘리부가 함락되면서, 카타리파의 조직적인 군사적 저항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이는 알비 십자군 전쟁의 종교적 목표가 거의 달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1255
[알비 십자군 최종 종료]
카타리파 세력을 전멸시킴으로써 알비 십자군의 모든 군사 작전이 최종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에 달하는 랑그도크 사람들이 학살당했으며, 이 중 상당수는 무고한 주민들이었습니다. 이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종교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