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닌 드보르자크
음악가, 작곡가, 클래식, 국민악파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22:05:29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에 알린 거장 안토닌 드보르자크. 평범함 속 위대성을 보여주며 보헤미아의 선율과 국민악파의 열정을 담아냈다. 특히 미국 체류 중 신세계로부터와 아메리칸 등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키며 세계적인 작곡가로 자리매김했다. 음악으로 조국에 최고의 영예를 선사한 인물.
1841
[체코의 거장, 드보르자크 탄생]
여관 주인이자 도축업자인 아버지와 롭코비치 가문의 고용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14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프라하 근처 넬라호제베스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신자로 성장했다.
프라하 근처 넬라호제베스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치터를 전문적으로 연주했으며, 드보르자크는 마을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신자로 성장했다.
1847
[천재적인 바이올린 실력]
요제프 슈피츠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동네 악단과 교회 악단에서 연주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855
[첫 작품을 만들다]
작곡가로서 첫 발을 내디딘 작품을 만들었다고 추정된다.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창작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시점이다.
1857
[프라하 오르간 학교 입학]
삼촌과 선생의 설득 덕분에 16세의 나이로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며 정식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학업과 더불어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실력을 쌓았다.
1861
[순수 음악에 대한 열정]
20세에 실내악 대곡(작품 1의 현악 5중주곡)을 작곡하며 순수 음악에 대한 깊은 열정을 보였다.
당시 슬라브계 민족음악 작곡가들이 표제 음악이나 오페라에 치중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1862
[국민극장 오케스트라 활동]
졸업 후 카렐 콤자크 악단에 가담해 비올라를 연주했다.
이후 체코 국민극장의 임시 극장이 개관하면서 이 악단과 함께 극장 전속 오케스트라의 핵심 멤버로 약 10년간 활동했다.
1865
[바그너의 영향을 받다]
음악원 재학 중 교향곡 제1번과 제2번을 작곡했다.
이때부터 바그너의 선율과 화성 기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하며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했다.
1866
[스메타나의 영향력]
스메타나가 국민극장의 오페라 감독에 취임하면서 그의 민족주의적 음악사상이 드보르자크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870
[첫 오페라 '알프레드' 작곡]
첫 오페라 '알프레드'를 작곡하며 오페라 장르에도 도전했다.
이후 그의 9편의 오페라는 첫 작품을 제외하고 모두 체코어로 리브레토가 작성되어 민족의 얼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1872
1873
[31세, 특별한 성공]
31세의 나이로 특별한 성공을 거두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프라하를 넘어선 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874
[브람스의 극찬과 후원]
오스트리아 작곡상에 두 개의 교향곡과 다른 작품들의 악보를 제출했다.
심사위원이었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드보르자크의 곡에 크게 감명받아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자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작곡상 수상]
오스트리아 작곡상을 수상하며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후 1876년에도 같은 상을 수상하며 브람스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로부터 지속적인 인정을 받았다.
1878
[슬라브 무곡, 세계적 명성]
브람스의 추천으로 유명 출판사 N.
짐로크에서 '슬라브 무곡' 작곡을 의뢰받았다.
이 곡은 베를린 평론가에게 극찬을 받았고, 피아노 4핸드 악보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드보르자크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었다.
1880
[첫 종교 작품 '스타바트 마테르' 초연]
첫 종교 작품인 '스타바트 마테르'가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1883년 런던 공연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며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혔다.
1884
[영국 방문과 명예 박사 학위]
영국을 방문하여 '유령의 신부'와 '교향곡 제7번 D단조'를 런던에 헌정했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드보르자크는 영국을 총 9번이나 방문하며 자신의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는 국제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체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빈 이주 제안을 거절하는 등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었다.
1890
[러시아 공연 지휘]
러시아를 방문하여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직접 공연을 지휘하며 국제적인 활동 범위를 넓혔다.
같은 해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여러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91
[프라하 음악원 교수 임명]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로 정식 임명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그의 가르침은 체코 음악의 미래를 이끌어갈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2
[미국 국립 음악원 원장, 신세계 교향곡 탄생]
뉴욕 미국 국립 음악원의 총장 자넷 서버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 프라하에서 받던 연봉의 25배에 달하는 15,000달러(2020년 기준 43만 달러)를 제안받아 세계적인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미국 체류 중 그의 대표작인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작곡하여 전 세계에 명성을 널리 알렸다.
그는 미국 체류 중 슬라브풍 음악에 흑인과 인디언의 멜로디를 조화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첼로 협주곡' 또한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1893
[미국 휴가 중 '아메리칸' 작곡]
여름 휴가 동안 아이오와주 스필빌로 이주했다.
이곳은 대부분 체코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어 고향 보헤미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며, '현악 사중주 12번 아메리칸'을 작곡했다.
1894
[불후의 명곡 '유머레스크' 작곡]
여름 휴가차 귀국하여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머레스크'를 작곡했다.
특히 7번째 곡은 바이올린으로 편곡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895
[고향 보헤미아로 귀국]
향수병과 경제 위기로 인한 임금 감소를 겪던 드보르자크는 미국 국립 음악원과의 계약을 중도 파기하고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그의 창작력은 도미 직전 수년간에 그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된다.
1901
[오페라 '루살카' 초연, 최고의 영예]
오페라 '루살카'를 초연하며 오페라 장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빈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귀족이 되었고,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면서 독립 전 체코 문화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1904
[체코 민족 음악의 거장 서거]
심장마비와 뇌졸중으로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체코 민족 음악을 세계에 알린 위대한 작곡가로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