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다카우지

무장, 쇼군, 막부 설립자, 일본 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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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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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쇼군, 막부 설립자, 일본 역사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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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한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 격동의 남북조 시대를 뛰어난 인간적 매력과 카리스마로 이끌며 일본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꾼 인물. - 때로는 예측 불가능하고 고뇌하는 모습도 보였으나 부하들에게 후한 은상을 베풀어 절대적인 지지를 얻음. - 일본 문화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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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

[아시카가 다카우지 탄생]

가마쿠라 막부 유력 고케닌 아시카가 사다우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태어날 때 산비둘기 두 마리가 날아와 어깨와 국자에 앉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명은 마타타로였다.

1319

[성인식, 고우지 개명]

15세에 성인식을 치르고 종5위하 치부대보에 임명되었다.

막부 싯켄 호조 다카토키의 이름 한 자를 받아 '다카우지(高氏)'로 개명하며 가문의 가독을 계승했다.

이는 그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결정이었다.

1331

[겐코의 난 참전 (막부)]

고다이고 천황의 두 번째 막부 타도 운동 '겐코의 난'이 발발했다.

다카우지는 막부의 명을 받아 천황의 거점 공격에 가담했다.

하지만, 처자를 인질로 삼아 파병을 강요받으면서 막부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1333

[천황 측으로 전향]

오키 제도에서 탈출한 고다이고 천황이 거병하자, 다카우지는 막부 진압군에 참여했다가 천황의 윤지를 받아 막부 타도군으로 전격 전향을 선언했다.

이 결정은 일본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가마쿠라 함락 & 아들 사망]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로 진격하여 막부를 멸망시키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이 혼란 속에서 다카우지의 아들 다케와카마루가 막부군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겪었다.

[겐무 신정, 존우지 개명]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1등 공신이 된 다카우지는 진주후쇼군 및 종4위하 좌병위독에 임명되고 30개 지역을 소령으로 받았다.

고다이고 천황의 이름에서 한 자를 받아 '다카우지(尊氏)'로 개명, 새로운 시대의 중추 인물이 되었다.

[로쿠하라 단다이 멸망]

단바 시노무라 하치만 궁에서 막부 타도를 기치로 거병한 다카우지는 상경군을 이끌고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를 공격해 막부 세력을 완전히 제거했다.

이로써 그는 막부 타도의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았다.

1334

[모리나가 친왕 유폐]

세이이타이쇼군 자리를 원했던 모리요시 친왕과 대립이 심화되자, 다카우지는 자신의 아들 쓰네요시 친왕의 황태자 책봉을 바라는 아노 야스코와 결탁하여 모리나가 친왕을 포박해 가마쿠라에 유폐시켰다.

정치적 갈등의 시작이었다.

1335

[모리나가 친왕 살해]

호조 가문 잔당이 호조 도키유키를 옹립해 가마쿠라를 점령하는 '나카센다이의 난'이 발생했다.

이 혼란 속에서 가마쿠라에 있던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독단으로 유폐된 모리나가 친왕을 살해했다.

[가마쿠라 독자 진군]

고다이고 천황에게 세이이타이쇼군 직위를 요청했으나 진척이 없자, 다카우지는 천황의 칙서 없이 독자적으로 가마쿠라로 진군하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천황은 이에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세이이타이쇼군 직위를 부여했다.

[가마쿠라 수복]

동생 다다요시의 병력과 합류하여 사가미 강 전투에서 호조 도키유키를 축출하고 가마쿠라를 수복했다.

이 승리로 그는 종2위에 위계되며 막강한 군사적 위용을 과시했다.

[겐무 정권에 반기]

가마쿠라에 정착해 독자적으로 은상을 내리며 천황의 상경 명령을 거부했다.

닛타 요시사다 토벌을 주청했으나 거부당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토벌 명령이 내려지자, 결국 겐무 정권에 반기를 들고 궐기했다.

[교토 진격, 히에이산 대치]

하코네·다케노시타 전투에서 닛타 군을 격파하고 교토로 진군했다.

지묘인 계통의 고곤 상황과 연락하여 교토 입경의 정당성을 확보했으며, 고다이고 천황을 히에이 산으로 쫓아냈다.

1336

[교토에서 일시 후퇴]

교토에 입경했으나, 오슈에서 상경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교토를 버리고 규슈로 일시적으로 하향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다타라하마 전투 승리]

규슈 하향 도중 쇼니 요리히사와 무나카타 우지노리의 지원을 받아 지쿠젠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고다이고 천황 측의 기쿠치 다케토시 군을 격파했다.

이를 통해 세력을 다시 결집하여 교토로 재진군할 발판을 마련했다.

[미나토가와 전투 대승]

닛타 요시사다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군을 격파하는 결정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남조 세력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으며, 다카우지의 군사적 역량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교토로 다시 입경]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카우지는 다시 교토로 입경했다.

그리고 히에이 산으로 도망친 고다이고 천황에게 화의를 요구하며 정세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건무식목 제정]

고다이고 천황이 고묘 천황에게 삼종의 신기를 양도한 직후, 다카우지는 '건무식목' 17조를 정하여 새로운 무가정권의 기본 방침을 만방에 선언했다.

이는 그의 통치 철학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서였다.

[남북조 시대 개막]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를 탈출해 요시노에 정주하며, 양도한 신기는 가짜라고 주장하고 자신이 진품을 가졌다고 선언하며 남조를 열었다.

이로써 일본은 북조와 남조가 대립하는 격동의 남북조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338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

고묘 천황으로부터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무가정권을 개창했다.

이로써 약 200년간 일본을 통치하게 될 무로마치 막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339

[덴류지, 덴류지부네 조성]

요시노에서 붕어한 고다이고 천황의 위령을 위해 덴류지를 조성했다.

또한, 막부의 재정 확보를 위해 무역선인 '덴류지부네'를 원나라에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무역 정책을 펼쳤다.

1349

[간노의 소란 발발]

막부 내에서 정무를 맡았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고 모로나오를 중심으로 한 세력 간의 대립이 격화되며 '간노의 소란'이라는 내분이 발발했다.

다카우지는 처음 중립을 표방했으나 이내 한쪽 편에 서게 되었다.

[다다요시 정계 은퇴]

반대파의 습격을 받은 다다요시가 다카우지의 저택으로 피신했으나, 고 모로나오의 병력이 저택을 포위하며 다다요시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는 압박을 가했다.

결국 다다요시는 출가하며 정계에서 물러났다.

1350

[다다요시, 남조 가담]

다카우지가 다다요시의 양아들인 다다후유 토벌을 위해 서국으로 원정을 떠나자, 다다요시는 이 기회를 틈타 교토를 탈출하여 남조 측에 가담했다.

이는 아시카가 가문 내부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건이었다.

[우치데노하마 전투 패배]

다다요시의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다카우지는 셋쓰 국 우치데노하마에서 다다요시에게 패배했다.

이 패전은 다카우지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막부의 권위를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1351

[다다요시 화친, 고 형제 암살]

다카우지는 고 모로나오, 고 모로야스 형제의 출가를 조건으로 다다요시와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호송 중 고 형제는 우에스기 요시노리에 의해 모살당하며, 간노의 소란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쇼헤이 일통 (남조 화의)]

다카우지는 남조 측과의 화친 교섭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쇼헤이 일통'이라 불리는 화의를 맺었다.

이로써 잠시나마 북조와 남조의 오랜 대립이 완화되고 평화의 기운이 감돌았다.

1352

[아시카가 다다요시 급사]

가마쿠라로 진격해 다다요시를 추포, 유폐시킨 후, 다다요시는 가마쿠라에서 급사했다.

《태평기》에서는 다카우지가 독살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이 사건은 후대에 큰 논란을 남겼다.

1354

[다다후유, 교토 점거]

남조와 협력한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규슈에서 군을 이끌고 교토를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카우지는 다시 한번 수도를 잃는 위기를 겪으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1355

[다다후유, 규슈 철퇴]

다카우지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아시카가 다다후유는 다음 해 교토에서 철퇴하고 규슈로 물러났다.

다카우지는 다다후유 토벌 계획을 세웠으나 끝내 실행하지는 못했다.

1358

[아시카가 다카우지 서거]

교토 저택에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고 임종했다.

사인은 다다후유와의 전투에서 화살에 피습당했던 등창으로 알려져 있으며, 향년 54세였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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