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시대
일본사 시대, 고대 국가, 문화 시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42:15
아스카 시대는 일본 고대 국가의 기틀이 다져진 중요한 시기. 한반도에서 전래된 불교와 유교 등 선진 문화를 수용하며 아스카 문화 개화. 쇼토쿠 태자의 개혁과 다이카 개신으로 중앙집권적 율령 체제 확립. 일본이라는 국호 공식 사용 시작.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국가들과 밀접한 문화 교류 및 정치적 대립 경험.
587
[정미의 난 발발]
불교 수용을 둘러싼 대립 끝에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가 배불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멸망시키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소가 가문이 약 반세기 동안 일본 정계의 실세로 군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세기 중반 백제 성왕이 석가불상과 경론을 조정에 보내 불교가 전해진 후, 587년 천황이 불교에 귀의하자 배불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가 대립했습니다. 쇼토쿠 태자는 소가씨 편에 서서 모노노베씨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사건 이후 소가씨는 대신으로서 권력을 잡았습니다.
588
[호코지 건설 시작]
소가노 우마코의 후원으로 일본 최초의 불교 사찰인 호코지(훗날 아스카데라) 건설이 시작되었습니다.
백제 승려와 장인들이 참여하여 일본 불교 문화의 시초를 놓은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모노노베 씨를 멸망시킨 이후 소가노 우마코는 588년에 아스카에 호코지(법흥사)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596년에 나라에 세워진 아스카데라(호코지)는 일본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소가노 우마코가 후원하여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이 지었습니다.
592
[스가노 우마코의 전횡]
소가노 우마코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스슌 천황을 암살하고, 자신의 질녀인 도요미케가시히야히메 황후를 스이코 천황으로 옹립했습니다.
이는 아스카 시대 정치의 혼란스러운 시작을 알렸습니다.
592년 소가노 우마코는 야마토노아야노 코마에게 스슌 천황을 암살하게 하고, 여제 스이코 천황을 옹립했습니다. 스슌 천황이 소가노 우마코의 전횡에 불만을 느끼자 소가노 우마코는 심복 야마토아야노아타이 고마를 시켜 천황을 암살했습니다. 30대 비다쓰천황의 부인이자 자신의 질녀인 도요미케가시히야히메 황후를 즉위시켰는데, 그녀가 제33세 스이코 여제입니다.
593
[쇼토쿠 태자 섭정 시작]
우마야도 황자, 즉 쇼토쿠 태자가 황태자로 세워져 스이코 천황의 섭정으로 국정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불교를 후원하며 관위12계와 십칠조헌법을 제정하는 등 천황 중심 국가 체제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소가노 우마코는 2차 불교 전쟁에 적극 가담했던 우마야도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습니다.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뻘이었던 우마야도 황자가 그 유명한 쇼토쿠 태자였습니다. 스이코 천황은 아스카쿄의 풍포궁에서 즉위하여 궁도가 아스카로 옮겨졌습니다. 스이코 천황은 소가노 우마코의 협력을 얻어 국정을 이끌어 갔습니다. 우선 불교에 의한 국내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불교 흥륭의 조를 공포했습니다.
604
[개혁의 시작]
쇼토쿠 태자가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 관직을 부여하는 '관위12계'를 제정하고, 유교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통치 이념인 '십칠조헌법'을 만들어 천황 중심의 이상적인 국가 체제를 확립하려 했습니다.
일본 역사상 매우 중요한 개혁이었습니다.
스이코 천황은 관위 12계를 제정하여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서 지위를 정하고 그 상징으로서 색과 장식에 의해 등급을 표시한 관을 수여했습니다. 유교의 덕목인 덕·인·예·의·지를 취하여 이를 대소로 나눠 12계로 했습니다. 쇼토쿠 태자가 십칠조헌법을 만들어 불교의 번성에 힘을 쏟는 등, 천황 중심의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세우는 초석을 쌓았습니다.
607
[수나라와 대등한 외교]
쇼토쿠 태자는 오노노 이모코를 견수사로 수나라에 파견하며 '동쪽의 천자'로서 수나라에 안부를 묻는 파격적인 외교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는 일본이 대외적으로 독자적인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607년, 오노노 이모코가 견수사로 파견되었고 당시 쇼토쿠 태자는 동쪽의 천자로서 수나라에 안부를 물었습니다.
622
[쇼토쿠 태자 사망]
일본 고대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아스카 문화의 꽃을 피웠던 쇼토쿠 태자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소가 가문의 권력 남용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622년에 쇼토쿠 태자가 죽자, 소가노 에미시는 자신이 추대한 조메이 천황을 억지로 즉위시킨 후, 병사로 하여금 자신의 저택을 지키게 하고 자기의 묘를 만드는 데 전국의 백성을 사적으로 부리며 그것을 ‘미사사기(원래 덴노의 묘를 부르는 말)’로 부르게 하는 등 신하로서의 도를 넘는 파행이 눈에 띄었습니다.
628
[스이코 천황 서거]
여제 스이코 천황이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쇼토쿠 태자와 함께 일본 고대 국가의 중요한 초석을 놓았습니다.
사망 이후 소가 가문의 전횡이 극에 달했습니다.
628년에 스이코 천황이 죽자, 소가노 에미시는 자신이 추대한 조메이 천황을 억지로 즉위시킨 후, 병사로 하여금 자신의 저택을 지키게 하고 자기의 묘를 만드는 데 전국의 백성을 사적으로 부리며 그것을 ‘미사사기(원래 덴노의 묘를 부르는 말)’로 부르게 하는 등 신하로서의 도를 넘는 파행이 눈에 띄었습니다.
643
[소가씨의 왕실 위협]
소가노 에미시가 쇼토쿠 태자의 아들인 야마시로대형왕 일가를 멸족시키며 소가 가문의 전횡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는 왕실을 위협하는 소가씨에 대한 반감을 키웠습니다.
게다가 소가노 에미시가 스스로 국정을 집전하고 보라색 관을 착용하였으며, 643년에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이자 상궁왕가인 야마시로대형왕을 멸족시키는 등 소가씨의 전횡이 심해졌습니다.
645
[다이카 개신 선포]
을사의 변 직후 고토쿠 천황이 즉위하고 나카노오에 황자가 황태자가 되었습니다.
일본 최초의 연호인 '다이카'를 제정하고 대규모 정치 개혁인 '다이카 개신'을 선포하며 중앙집권적 국가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그 다음날 고교쿠 천황의 양위에 따라 고교쿠 천황의 동모제(同母弟)를 고토쿠 천황(재위 645~654년)으로 옹립하고, 나카노오에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일본 최초로 연호를 다이카(大化)로 정하고 개혁을 실행했습니다. 고토쿠 천황은, 일본에서 최초의 연호인 다이카를 제정하는 등 차례차례로 개혁을 진행해 갔습니다. 이를 다이카 개신이라 합니다.
[을사의 변 발생]
나카노오에 황태자(훗날 덴지 천황)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등이 고교쿠 천황 앞에서 당시 권신이었던 소가노 이루카를 참살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다음 날 그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도 자결하며 소가 가문의 전횡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고교쿠 천황 4년(645년) 음력 6월 12일(양력 7월 10일)에, 나카노오에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와 모의해, 당시의 권신이었던 소가노 이루카를 고교쿠 천황이 보는 앞에서 참살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루카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는 이루카가 참살당한 다음 날에 자결하였습니다.
[수도 나니와 이전]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토쿠 천황은 수도를 나니와나가라토요사키노미야로 옮겼습니다.
이는 다이카 개신의 일환으로, 새로운 중앙집권 체제를 상징하는 조치였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45년(다이카 원년) 12월에는 도읍을 나니와나가라토요사키노미야으로 옮겼습니다.
646
[다이카 개신 조서]
다이카 개신에 관한 조칙이 공포되었습니다.
기존 소가씨 중심의 중앙 관제를 좌대신, 우대신, 내대신의 3대신 체제로 개편하고, 호적과 전답 조사를 명하는 등 국가 통치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혁을 알렸습니다.
이듬해인 646년(다이카 2년) 정월에는 개신의 조서를 선포하고 정치체제를 개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로, 당시까지 소가씨의 대신 1명뿐인 중앙 관제를 좌대신·우대신·내대신의 3대신 체재로 개편하였습니다. 또한 국사를 통해 호적과 전답을 조사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647
[신라 김춘추 왜국 방문]
백제를 고립시키기 위해 신라의 실세 김춘추가 직접 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용모와 시원시원한 말솜씨'로 왜 귀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신라와 왜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신라의 실력자였던 김춘추도 직접 왜로 건너가 왜 조정과 교섭하면서, 왜의 귀족들에게 '용모가 아름답고 말이 시원시원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습니다(647년). 백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신라로서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651
[신라 당풍화에 대한 반감]
신라 사찬 지만이 당나라 관복을 입고 왜국에 오자, 왜의 대신들은 이를 '불쾌하게' 여기며 신라 정벌을 진언했습니다.
이는 신라의 급속한 당풍화에 대한 왜의 불안감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하쿠치(白雉) 2년(651년)에 신라에서 왜에 파견한 사찬 지만이 당의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왜의 좌대신 코세노 토쿠타가 왜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나카노오에 황자(후의 덴지 천황)에게 신라 정벌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55
[사이메이 천황 재즉위]
고토쿠 천황 사망 후, 전임 고교쿠 천황이 사이메이 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즉위했습니다.
실권은 나카노오에 황자가 쥐고 있었습니다.
고토쿠 천황이 사망한 뒤, 고토쿠 천황의 전임이었던 고교쿠 천황이 사이메이 천황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즉위했습니다. 허나 실권은 을사의 변 이후 사이메이 천황의 아들인 나카노오에 황자가 잡고 있었습니다.
660
[백제 멸망]
한반도에서 일본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대외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올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시기 한반도에서는 660년에 백제가 신라·당 연합군에게 패하여 수도가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였으며, 왕족과 대신들이 당에 포로로 끌려가는 가운데, 복신·도침을 중심으로 한 백제부흥운동 세력은 당시 왜 조정에 체류하고 있던 옛 백제의 왕자 풍장(부여풍)을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해 왔다.
661
[나카노오에 칭제 시작]
백제 부흥군 지원을 위해 노력하던 사이메이 천황이 사망한 뒤, 나카노오에 황자는 공식 즉위 없이 칭제(稱制) 형태로 국정을 맡아보며 백제 부흥 운동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직접 츠쿠시(筑紫)까지 나아가 백제 부흥군 지원을 위한 원병 파병에 힘쓰던 사이메이(齊明) 천황이 재위 7년만인 661년 음력 7월 24일(양력 8월 24일)에 죽은 뒤 나카노오에는 황태자로서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즉위식을 치르지 않고 오랫동안 칭제(군주가 사망한 뒤 차기 군주가 될 사람이나 선대 군주의 왕비가 즉위하지 않은 상태로 정무를 맡아보는 것)의 형식으로 국정을 맡아보면서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하였다.
663
[백강 전투 대패]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된 왜-백제 연합군이 백강 어귀에서 신라-당 연합군에게 처참하게 궤멸되었습니다.
이 전투로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백제에 파병한 구원군은 덴지 2년(663년) 음력 7월 20일(양력 8월 28일)에 백강(白江) 어귀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처참하게 궤멸되고 백제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64
[신라 침략 대비]
백강 전투 패배 후 신라의 침략에 대한 공포로 일본은 쓰쿠시국에 다자이후를 지키는 미즈키를 만들고 쓰시마섬, 오키 제도 등 한반도 방면에 사키모리와 봉화를 설치하는 등 대대적인 방위 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백강 전투는 일본의 내정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의 지배층은 신라가 백제를 쫒아 침략해올 것이라는 근심을 품게 되었고, 각지에 방위시설을 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664년 쓰쿠시국에 다자이후를 지키는 미즈키(水城)를 만들고 쓰시마섬·오키 제도·쓰쿠시 등 한반도 방면에 사키모리와 봉화을 설치했습니다.
665
[신라와의 화해 시도]
일본은 백강 전투 이후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신라 문무왕과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신라와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외교적 안정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왜는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왜의 중신이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서서 신라의 문무왕과 함께 신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태대각간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667
[오미오쓰 천도]
방어에 유리한 오미오쓰노미야로 도성을 옮겼습니다.
이는 백강 전투 이후 신라 침략에 대한 불안감이 증대되면서 방위 강화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조치였습니다.
667년 도성도 방어에 유리한 오미오쓰노미야로 옮겼습니다.
668
[덴지 천황 즉위]
칭제로 국정을 이끌던 나카노오에 황자가 공식적으로 덴지 천황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호적을 만들고 방위 시설을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확립에 힘썼습니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668년에 칭제를 그만두고 덴지 천황으로 즉위했습니다.
670
[일본 최초 전국 호적]
덴지 천황이 전국에 걸쳐 호적(경오년적)을 만들고 국민의 수를 파악했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체계적으로 지배하고 통치하기 위한 일본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670년에 전국에 호적(경오년적)을 만들고 국민의 수를 파악했으며, 아즈마국에 목책을 정비했습니다.
672
[진신의 난 발발]
덴지 천황 사망 후 동생인 오오아마 황자와 아들인 오오토모 황자 사이에 황위 계승을 둘러싼 대규모 내전인 '진신의 난'이 발생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오오아마 황자가 승리하며 덴무 천황으로 즉위했습니다.
덴지 천황이 사망하자 덴지 천황의 동생인 오오아마(大海人)황자와 아들인 오오토모(大友)황자(메이지 시대에 고분 천황으로 추숭됨)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672년 일어난 진신의 난입니다. 결국 오오아마황자가 승리하여 덴무 천황으로 즉위했습니다.
681
[율령 편찬 착수]
덴무 천황이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의 핵심인 율령(법전) 편찬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당나라의 율령을 기반으로 일본식 율령을 만들려는 장기적인 계획의 시작이었습니다.
덴무 천황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의 정비에 힘썼습니다. 681년에는 율령의 편찬을 시작했습니다.
689
[아스카정어원령 시행]
덴무 천황 사망 후 황후인 지토 천황 대에 율령 편찬의 첫 결실인 전 22권의 '아스카정어원령'이 제정되어 반포되었습니다.
이는 일본의 고대 국가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중요한 법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689년에는 전 22권으로 구성된 아스카정어원령이 제정되어 반포되었습니다.
694
[일본 최초 본격 도성]
지토 천황 8년에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도성인 후지와라쿄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이는 당나라 장안성을 모델로 한 계획도시로, 중앙집권적 율령 국가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694년(지통천황 8년)에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도성인 후지와라쿄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701
['일본' 국호 확립]
몬무 천황 대에 '다이호 율령'이 반포되며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관료 중심의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때 공식적인 국호를 '왜국'에서 '일본'으로 변경하며 고대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율령제도를 기본으로 율과 영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실시하기 위해 700년부터 율조를 찬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701년(다이호 원년)에 다이호 율령을 반포하여 공식적인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는 등 그 첫 결실을 거둡니다. 이로써 천황을 정점으로 한 귀족·관료에 의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완성되고, 국민의 이름이 정부에 기재되었다. 일본사학계에서는 이로써 일단의 고대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
710
[수도 헤이안쿄 이전]
문무 천황 사후 그의 어머니인 겐메이 천황이 즉위했으며, 710년에 헤이안쿄로 천도하며 아스카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는 나라 시대로의 전환점이 됩니다.
문무천황 사후 그 어머니가 겐메이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710년에 헤이안쿄로 천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