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독일 철학자, 비관주의 철학, 동양 철학, 윤리학, 인식론

num_of_likes 92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26:42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연혁 피인용 수 1
독일 철학자, 비관주의 철학, 동양 철학, 윤리학, 인식론
report
Edit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19세기 독일 비관주의 철학자로 칸트 사상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헤겔 등 주류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로 인간의 의지를 중심에 둔 독창적 철학을 제시했으며 이는 철학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서양 최초로 동양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소개하여 후대 니체 바그너 톨스토이 프로이트 등 예술과 학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고독 속 진리 추구의 매력적인 사상가입니다.

연관 연혁
  1. 등록된 연관연혁이 없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1788

[단치히에서 태어난 철학자]

미래의 위대한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유럽의 항구 도시 단치히에서 상인 아버지와 소설가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탄생은 훗날 서양 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한 인물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와 소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생했습니다.

1793

[함부르크로 가족 이주]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합병되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다섯 살 쇼펜하우어의 가족은 함부르크로 보금자리를 옮겼습니다.

그의 유년 시절은 이러한 환경 변화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합병되자 가족이 함부르크로 이주했습니다.

1797

[프랑스어 습득의 시작]

여동생 아델레의 출생 후, 쇼펜하우어는 아버지가 마련한 프랑스 르아브르에서의 2년간 체류를 통해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익혔습니다.

이는 훗날 다양한 언어 습득 능력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여동생 아델레가 출생했습니다. 아버지가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친구 집에 쇼펜하우어를 맡겼고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2년 간 지내며 프랑스어를 익혔습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프랑스어를 확실히 익히길 원했고 결과에 만족스러워했습니다.

1799

[상인의 길에 들어서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11세의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인 양성기관인 룽게 박사의 사립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사업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상인 양성기관인 룽게 박사의 사립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4년 간 공부했습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1803

[유럽 여행과 영어 학습]

상인이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온 가족과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여행 중 런던에서 신부 랭카스터의 집에 머물며 영어를 익혔는데, 이는 그의 언어 능력 확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상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온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했습니다. 이 여행은 상인이 되기 싫어하는 쇼펜하우어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런던에 도착하여 신부 랭카스터의 집에서 머물며 영어를 익혔습니다.

1804

[사색하는 청년 쇼펜하우어]

프랑스 등 유럽을 여행하며 사색과 일기 쓰기에 몰두했습니다.

상인 실습에는 무관심한 채 아버지 서재에서 문학, 수학, 역사를 독학하며 점차 학문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습니다.

프랑스를 여행했으며 다시 스위스, 빈, 드레스덴, 베를린을 거쳐 돌아왔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여행 도중에 사색하며 많은 일기를 썼는데 진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단치히에서 상인 실습을 시작했으나 무관심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아버지의 서재에 드나들며 문학, 수학, 역사 등을 독학했습니다.

1805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자살로 추정되는 이 죽음은 쇼펜하우어의 삶과 철학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자살한 걸로 추정됩니다.

1807

[학문의 길로 전환]

어머니의 권유로 상인 실습을 중단하고 김나지움에 입학,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열정적으로 학습했습니다.

뛰어난 고전학자가 될 것이라는 칭찬을 들었으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자퇴하며 독자적인 학문 탐구의 길을 모색했습니다.

어머니의 권유로 상인 실습을 중단한 후에 고타에 있는 김나지움에 입학했습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엄청난 열정으로 학습했습니다. 고전어를 가르친 교사들은 쇼펜하우어가 미래에 뛰어난 고전학자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1년도 못가 김나지움을 자퇴했습니다.

1809

[괴팅겐대 입학, 철학에 눈뜨다]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했지만, 곧 철학에 더 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화학, 물리학,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며 자연과학적 지식을 철학적 사유의 토대로 삼는 독창적인 길을 걸었습니다.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함. 한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에 더 흥미를 두었습니다. 대학에서 화학, 물리학, 천문학, 수학, 언어학, 법학, 역사 등 여러 강의에 적극 참여해서 공부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습득한 당대의 자연과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1810

[플라톤과 칸트 연구의 시작]

철학자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의 강의를 듣고 플라톤과 칸트 철학을 깊이 연구하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여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철학자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Gottlob Ernst Schulze)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슐체에게 특히 플라톤과 칸트를 깊이 연구해보라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스승 슐체의 진지한 조언은 쇼펜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811

[베를린에서의 학문 탐구]

어머니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베를린대학교로 전학하여 본격적인 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피히테, 셸링 등 당대 주류 철학자들의 사상에 회의를 느끼고 맹렬히 비판했습니다.

이는 그의 독자적인 사유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당시 독일 문학계의 거장인 크리스토프 빌란트에게 쇼펜하우어가 철학 전공을 못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부탁함. 78세인 빌란트는 23세의 쇼펜하우어와 만나서 설득은커녕 쇼펜하우어의 태도에 감명받아 자상한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제대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함. 가을에 베를린대학교로 전학했습니다. 피히테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당대의 유명 학자였던 셸링, 피히테의 사상을 공부했으나 회의를 품고 이들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대놓고 드러내었고 일기에도 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특히 피히테에 대해서는 '대중 앞에서 웅변을 토해내며 진지한 표정으로 심오한 사상가인 척하는 사기꾼' 정도로 평가했습니다. 반면에 스승과 제자로서 서로 잘 통한 일도 있었는데 바로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의 강의였습니다.

1813

[첫 박사 논문과 괴테와의 만남]

25세의 젊은 나이에 학위 논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하고 예나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논문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기초이자 철학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논문을 괴테에게 증정하며 그의 지지를 얻었고, 괴테와 교제하며 색채론을 연구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아시아 관련 잡지를 탐구하며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연합군과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사이에 전쟁이 재발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을 떠나서 루돌슈타트에서 학위 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를 완성했습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기초가 되는 책이며 철학(인식론)의 고전이 되었습니다. 이 논문을 예나의 튀링겐 주립대학교에 제출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얻었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증정했습니다. 괴테는 이 논문을 보고나서부터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지지하였습니다. 수개월 동안 괴테와 교제하며 색채론에 관해서 연구하고 토론했고 괴테는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아시아 관련 잡지를 읽고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814

[동양 사상에 깊이 빠지다]

바이마르 공공도서관에서 고대 인도 철학서 <우파니샤드>의 라틴어 번역본을 탐구했습니다.

이 깊이 있는 연구는 그가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 철학의 세련된 사상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선구자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어머니와 심각한 갈등을 겪으며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우파니샤드>의 라틴어 번역본 <우프네카트>를 읽고 탐구했습니다. 어머니와 쇼펜하우어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이 일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나 편지교류는 가끔했습니다.

1816

[색채론 연구 발표]

괴테와의 교류를 통해 얻은 색채론 연구의 결실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를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자신의 실험을 토대로 뉴턴과 괴테의 색채론을 비판하며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괴테와 색채론에 관해 교류하여 얻은 결실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논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실험을 토대로 뉴턴의 색채론과 괴테의 색채론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괴테는 제자에게 비판받은 이 일을 베를린의 친구 슐츠에게 편지로 알렸고 약간 언짢았으나 쇼펜하우어를 대견스러워했습니다.

1818

[최고의 걸작, 세상에 나오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정수이자 일생의 역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책의 역사적 의의를 확신했으나, 출간 초기 1년간 100권밖에 팔리지 않아 당대 학자들의 무관심에 큰 증오심을 느꼈습니다.

이후 책 출판을 기념하며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일생의 역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습니다. 자신의 책이 역사적 의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던 쇼펜하우어는 1년 동안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자신의 책을 몰라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동시대 교수들에 대한 증오심이 차올랐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며느리(오틸리에)와 친분이 있던 자기 여동생의 편지를 통해 괴테가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직접적으로 칭찬하지는 않았습니다. 책 출판을 기념삼아 이탈리아로 여행했습니다. 1819년 봄에는 나폴리를 방문했습니다. 나폴리에서는 영국 청년들과 교류했습니다.

1819

[강사직 지원과 헤겔 대결]

베를린대학교 강사직에 지원하며 당시 최고 인기 학자였던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을 희망했습니다.

이는 헤겔과의 정면 대결을 의미하며, 그의 강단 철학에 대한 도전 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때 어머니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귀국하여 도움을 주었습니다.

베를린대학교에 강사직을 지원했습니다.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희망했습니다. 어머니가 파산위기에 처하자 속히 귀국하여 도와주웠으나 어머니는 쇼펜하우어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낭패를 겪고 말았습니다.

1820

[헤겔과의 격렬한 대립]

베를린대학교 시범 강의를 통과했으나, 당시 50세의 헤겔과 논쟁을 벌인 후 그의 강의는 인기가 없어 한 학기 만에 종료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쇼펜하우어가 헤겔을 '사기꾼', '대학교수 패거리의 두목' 등으로 맹렬히 비난하며 강단 철학 자체를 경멸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채용 여부가 결정되는 시범 강의에서 통과했습니다. 당시 50살이었던 노련한 헤겔이 쇼펜하우어와 강의 중에 약간 논쟁했습니다. 강의 계획은 1820~1822, 1826~1831년까지 수립돼 있었지만 인기가 없어서 한 학기만에 끝났습니다. 이후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 피히테같은 강단학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몽상적인 이론을 퍼트려서 대중을 속여먹는 저열한 사기꾼, 대중들의 두뇌를 해치는 넌센스 삼류작가, '철저히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리'의 두목이라며 비난했습니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어는 자기 책에서 독일 젊은이들과 자기 세대 사람들이 헤겔의 이론을 공부하느라 두뇌를 손상시켰고 인생을 허비했다며 매우 한탄하고 있습니다.

1831

[프랑크푸르트로 이주, 정착]

베를린에 콜레라가 만연하자, 도시를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독자적인 연구 활동에 전념하며 그의 철학이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유행 지난 옷차림과 애완견 '아트만'과의 산책은 프랑크푸르트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이 해에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베를린을 떠나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에 제대로 정착함. 유행이 지난 옷을 항상 입고 다녔으며 애완견을 데리고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했고 혼잣말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민들의 희한한 구경거리가 됨.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 이 쯤에 쇼펜하우어는 여동생과 어머니와 편지교류를 했고 작품활동으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1836

[자연과학과 철학의 연결]

자연과학적 연구 성과와 자신의 철학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당대 자연과학의 성과를 철학과 연결시킨 최초의 책으로 평가받으며, 꾸준한 학문 매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연과학이 증명해낸 것과 자신의 학설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출판. 매우 꾸준히 학문에 매진했습니다.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이나 프리드리히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합니다.

1839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 수상]

현상 논문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를 통해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수상을 했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성과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중요한 사건으로, 오랜 무관심 속에서 빛을 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상논문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를 가지고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수상했습니다.

1840

[덴마크 학술원 탈락과 반박]

현상 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로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단독 지원했으나 낙선했습니다.

학술원은 그가 헤겔 등 '위대한 철학자들'을 비난했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를 '하찮은 판정'이라며 강하게 반박하고 논문에 반론을 추가하여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현상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를 가지고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단독으로 지원했지만, 학술원은 '이 시대의 대단한 철학자들'인 헤겔, 피히테 등을 비난했다는 등의 이유로 부당한 판정을 했고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쇼펜하우어는 '하찮은 판정'이라 취급했고 이 판정에 반론하는 글을 추가하여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헤겔을 심각하게 비난한 것은 인정하지만 헤겔이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841

[윤리학 연구의 집대성]

이전에 제출했던 두 현상 논문을 묶어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적 사유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담아냈습니다.

두 현상논문을 묶어서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출판했습니다.

1844

[<의지 표상 세계> 제2판 출간]

초판 출간 26년 만에 그의 기념비적인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판이 완성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사상을 더욱 심화하고 다듬은 결과물이자, 오랫동안 저평가되었던 작품이 다시금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판이 완성됨. 제1판의 재판과 함께 출판했습니다.

1851

[대중적 성공, <여록과 보유>]

수년간 집필한 끝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여록과 보유>를 출간했습니다.

출판사의 암울한 예상과 달리 이 작품은 쇼펜하우어의 책들 중 가장 인기를 끌며 많이 팔려나가, 그를 단숨에 유명 인사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젊은 독자층에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록'이라 할 수 있는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수 년간 집필한 끝에 출간했습니다. 출판사의 암울한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은 얼마못가 쇼펜하우어의 책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고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습니다.

1853

[영국에 쇼펜하우어 최초 소개]

영국의 독일어책 번역가 존 옥센포드가 '웨스트 민스터 리뷰'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소개하며 그를 최초로 영국에 알렸습니다.

이 기사는 독일 언론에 다시 번역되어 발표되며 그의 철학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독일어책 번역가인 존 옥센포드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웨스트 민스터 리뷰'에 소개하여 최초로 영국에 쇼펜하우어를 알렸습니다. 독일의 여성 언론인 린트나가 이를 다시 독일어로 번역하여 베를린의 포스신문에 발표하였습니다.

1854

[바그너와의 인연 시작]

그가 '가장 하찮은 철학교수'라 비판했던 셸링이 사망했습니다.

같은 해, 대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자신의 대작 '니벨룽겐의 반지' 헌정본을 보내며 쇼펜하우어와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에게 혹평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고 그의 사상에 심취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가장 하찮은 철학교수라 불렀던 셸링이 사망했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니벨룽겐의 반지'의 헌정본을 보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바그너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에게 혹평을 받고 냉대받았으나 개의치 않고 기뻐했습니다. 친구이자 시인인 게오르그 헤르베크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들고 바그너를 찾아가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천해주었습니다.

1855

[대학가 쇼펜하우어 연구 활성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쇼펜하우어 철학 원리에 대한 해명과 비판'이라는 현상 과제가 제시되었고, 여러 대학에서 그의 사상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가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인정받고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전환점이었습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과가 '쇼펜하우어 철학 원리에 대한 해명과 비판'이라는 현상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여러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했습니다.

1858

[70세 생일, 명성의 정점]

쇼펜하우어의 70세 생일 파티가 성대하게 열리고 신문에도 보도되며 그의 명성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베를린 왕립학술원의 뒤늦은 회원 추대 제안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변함없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습니다.

쇼펜하우어 70살 생일 파티가 열렸고 신문 기사에도 생일파티 소식이 실렸습니다. 유럽 각지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베를린 왕립학술원에서 쇼펜하우어를 뒤늦게 회원으로 추대하고자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독일 작가 테오도어 폰타네의 절친 빈케라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에게 은으로 만든 잔을 생일 선물로 주었습니다. 괴테의 며느리였던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에게 책 출판에 대한 축하 편지를 썼습니다.

1860

[위대한 철학자의 마지막]

1860년 9월 21일 금요일 아침, 폐렴 증상을 겪던 쇼펜하우어는 프랑크푸르트 자택 소파에 앉아 차분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철학적 거장의 마지막을 알렸습니다.

평생 고독을 택했던 그는 유언에 따라 이름만 새겨진 평평한 화강암 묘비 아래 프랑크푸르트에 안장되었습니다.

1860년 9월 21일 금요일 아침, 폐렴 증상을 겪었고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9월 26일 쇼펜하우어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 앞에서 거행된 장례식의 참가인원은 별로 없었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모였습니다. 쇼펜하우어는 평평한 화강암을 이용해 묘비를 만들어 줄 것을 생전에 희망했고 묘비에다가 자신의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적지마라고 말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댓글 게시판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