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쇤베르크
작곡가, 음악이론가, 교육가, 화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7:07:01
- 20세기 전반 서양 음악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혁신가. - 장조와 단조 기반의 조성을 해체하고 세계 최초로 12음 기법을 확립한 선구자. - 음렬주의 음악을 발전시켜 수많은 현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침. - 음악 이론가이자 교육자로서도 명성을 쌓았으며 화가로서도 활동한 다재다능한 예술가. -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꾸준히 새로운 음악 세계를 탐구한 불굴의 예술가.
1874
[아르놀트 쇤베르크 탄생]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무엘 쇤베르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헝가리계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9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빈에 기반을 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며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탐구했습니다.
1889
[가장으로서의 책임]
부친 사망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은행의 직원 연수 과정에 참여하며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 했던 경험은 그의 삶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895
[멘토와의 운명적 만남]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폴리휨니아에 첼리스트로 입단하며 지휘자 알렉산더 젬린스키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젬린스키는 그의 재능을 간파하고 작곡 수업을 제공하며 초기 음악적 기반을 다져주었습니다.
쇤베르크는 대가들의 작품 연구를 통해 대부분의 지식을 얻었다고 주장했지만, 젬린스키와의 만남은 그의 초기 작품 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음악적 성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899
[《정화된 밤》 발표]
낭만주의적 경향이 짙은 현악 6중주 《정화된 밤》을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은 후에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현재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오페레타의 관현악 편곡으로 돈을 벌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정화된 밤》은 그의 초기 음악 세계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01
[대가들의 극찬]
대규모 칸타타 《구레의 노래》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작품을 접하고 쇤베르크의 천재성을 인정했으며, 구스타프 말러는 그를 '성자'로 여길 정도로 아꼈습니다.
《구레의 노래》는 1911년에 완성되었으며, 낭만주의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당대 최고 작곡가들의 인정은 쇤베르크의 초기 경력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06
[조성음악 해체의 시작]
이 시기부터 기존 조성음악의 해체에 기여하기 시작하며, 장조와 단조에 기반한 조성 개념에서 벗어나려는 급진적인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이는 서양 음악사의 거대한 변화를 예고했습니다.
쇤베르크는 1906년과 1909년 사이에 조성 해체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는 '평범한'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새로운 음악적 언어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1907
[청중의 냉담한 반응]
《실내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되었으나,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기존의 아름다운 선율에 익숙했던 청중에게 그의 파격적인 음악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이 사건은 쇤베르크가 추구하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대중의 저항을 보여주는 첫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1909
[무조음악의 본격화]
독백극 《기대》 작품번호 17을 작곡하며 무조음악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었습니다.
이 시기 그의 음악은 누구보다도 급격하게 변화하며 새로운 음악적 시대를 열었습니다.
《3개의 피아노 소품》 작품번호 11 등 이 시기 작품들은 전통 화성에서 벗어나 불협화음의 독립적인 사용을 시도했습니다. 이는 서양 음악사에서 전례 없는 파격으로, 많은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1912
[혁신적 성악 기법 도입]
가곡 《달에 홀린 피에로》 작품번호 21을 발표하며 '슈프레슈티메'라는 독특한 성악 기법을 선보였습니다.
이는 말하는 듯 노래하는 듯한 중간 형태의 발성으로, 음악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작품은 쇤베르크의 표현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당시 지식인들이 새로운 사상의 흐름을 모색하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음악적 혁신을 향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13
[음악회 난동 사태]
《실내 교향곡 제1번》이 알반 베르크 등 제자들의 곡과 함께 재연되었으나, 청중의 비난과 난동으로 인해 경찰이 출동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그의 음악이 당시 사회에 준 충격을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입니다.
쇤베르크의 음악은 전통적인 조성을 해체했기에 극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음악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았지만, 평론가들은 여전히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1914
[전쟁 속의 고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군에 복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곡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어 미완성 작품만 남기는 등 큰 고비를 겪었습니다.
전쟁은 쇤베르크의 삶과 창작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음악의 질감을 단순화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1921
[12음 기법의 탄생]
전쟁 후 음악의 질감을 단순화할 방법을 찾던 중, 세계 최초로 12음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나는 오늘 독일 음악의 우위를 100년 동안 지속시킬 발견을 했다네”라고 말하며 음악사적 혁신을 선언했습니다.
12음 기법은 음렬주의 음악으로 발전하여 현대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이 기법을 받아들여 '2차 빈 음악파'를 결성했습니다. 이는 모차르트나 바흐처럼 되고 싶었던 쇤베르크의 야망이 담긴 혁신이었습니다.
1933
[나치 박해와 망명]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정권을 획득하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유럽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는 결국 미국으로 도피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쇤베르크의 유대인 혈통은 당시 유럽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큰 위협이 되었고, 이는 그의 삶과 창작 활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1941
[미국 귀화 및 정착]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전통화성은 쓰지 않았지만) 전통적인 화음으로 다시 돌아오는 작품들을 쓰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의 삶은 그에게 새로운 창작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는 자신의 음악이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1951
[아르놀트 쇤베르크 서거]
로스앤젤레스에서 76세를 넘기기 두 달 전, 77번째 생일을 맞이하지 못하고 별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13일에 태어난 것을 불길하게 여겼고, 7+6=13이 되는 76세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생전 13 공포증이 심했던 쇤베르크는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제목을 'Moses und Aaron' 대신 'Moses und Aron'으로 표기하여 철자 개수를 13개가 아닌 12개로 맞추기도 했습니다. 그의 죽음마저 13과 엮인 일화는 그의 예민하고 독특한 성격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