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내전

내전, 전쟁, 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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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발발 좌파 공화파 정부와 우파 프랑코 군부 간 처절한 내전. 파시즘 대 반파시즘의 이념 대결장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나치 독일 이탈리아가 프랑코를 소련과 국제여단이 공화파를 지원. 전쟁 후 프랑코의 잔혹한 독재와 보복으로 수십만 명 희생 스페인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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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8

[레콘키스타 시작]

이베리아반도 북부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하는 774년간의 레콘키스타가 시작되었다.

718년,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반도를 회복하는 대장정인 레콘키스타가 시작되었다. 이는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무어인을 상대로 770년간 전쟁을 벌인 역사적인 과정이다.

1492

[레콘키스타 완료]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이베리아반도를 회복하려는 774년간의 레콘키스타가 완료되었다.

718년에 시작된 레콘키스타가 1492년에 완료되었다. 스페인 왕국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교황으로부터 종교재판을 관할할 특혜를 얻었다.

1834

[스페인 종교재판 중지]

1834년 이사벨 2세에 의해 스페인 종교재판이 중지되어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던 오랜 역사가 막을 내렸다.

스페인 왕국은 교황에게서 국왕이 종교재판을 관할하는 특혜를 받아 중세부터 종교의 자유를 억압해왔다. 1834년 스페인의 이사벨 2세에 의해 스페인 종교재판이 중지되었다.

1873

[스페인 제1공화국 수립]

오랜 왕정 종식 요구 끝에 1873년 스페인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연방제를 표방했으나 분리 독립 운동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레콘키스타와 종교재판으로 봉건 군국주의 성격을 띤 스페인에서 왕정 종식의 요구가 이어졌고, 1873년에 스페인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1공화국은 분리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방제를 표방했으나 오히려 각 지역의 분리 독립 운동을 부추겼다.

1874

[파비아 장군의 군부 쿠데타]

쿠바 무장 독립 투쟁으로 군부가 세력을 키우던 중, 마드리드 군사 총독 파비아 장군이 의회를 해산시키며 스페인 제1공화국은 군부 독재로 변질되었다.

쿠바에서 무장 독립 투쟁이 발생하자 스페인 연방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 과정에서 군부가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1874년 1월 2일, 마드리드의 군사 총독 파비아 장군이 의회를 해산시키며 스페인 제1공화국은 군부 독재로 변질되었다.

[스페인 왕정복고]

제1공화국 군부의 내분 속에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알폰소 12세를 국왕으로 추대하며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스페인 제1공화국의 군부 독재 내부에서도 내분이 발생했다. 1874년 12월 19일,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이 이사벨 2세를 지지하던 각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알폰소 12세를 국왕으로 추대하며 스페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1876

[알폰소 12세 입헌군주제 헌법 제정]

왕정복고 후 알폰소 12세가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를 표방하였으나, 내정은 계급 갈등과 상호 보복이 계속되었다.

왕정복고 이후 알폰소 12세는 1876년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를 표방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정은 극심한 계급 간의 갈등과 상호 보복이 끊이지 않았고, 극좌파의 교회 파괴와 경찰의 노동자 탄압이 이어졌다.

1897

[스페인 사회노동당 결성]

바쿠닌의 아나키즘이 주도하던 스페인 노동조합 상황 속에서 1897년 마르크스주의를 강령으로 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었다.

스페인 제1공화국 해체 이후 주요 산업도시에 형성된 노동조합은 바쿠닌에서 비롯한 아나키즘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한편, 1897년 마르크스주의를 강령으로 하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결성되었고, 이후 러시아 혁명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도 증대하였다.

1909

[극좌파의 교회 공격과 지배계급의 보복]

알레한드로 레룩스 지지 노동자 일부가 교회를 불태우고 수녀 시신을 훼손하는 사건 발생. 이에 지배계급은 군대를 동원해 수백 명을 체포하고 처형하는 가혹한 보복을 감행했다.

1909년 7월, 알레한드로 레룩스를 지지하는 노동자 중 일부가 교회를 불태우고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의 시신을 파내 뒤에서 껴안고 춤을 추는 등 기독교의 존재와 윤리를 부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보복은 가혹하여 군대를 동원해 수백 명을 체포하고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처형시켰다.

1917

[스페인 총파업 투쟁]

제1차 세계대전 중립으로 인한 부의 소수 집중이 극심한 갈등을 초래, 아나르코생디칼리슴과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이 주도한 총파업 투쟁이 발생했으나 군대에 의해 진압되고 수백 명이 학살당했다.

알폰소 13세 친정 시기, 제1차 세계대전 중립으로 막대한 부가 소수 지배계급에 집중되면서 1917년 총파업 투쟁이 발생했다. 전국노동총연맹(아나르코생디칼리슴)과 노동자총연맹(마르크스주의)이 주도했으나, 결국 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백 명의 노동자가 학살당하며 막을 내렸다.

1923

[리베라 장군 군부 쿠데타]

1923년 리베라 장군이 극심한 사회 혼란을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가 되어 군부 독재를 시작했다. 그는 지주, 교회, 부르주아 등 기득권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1923년,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극심한 사회 혼란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총리가 되어 군부 독재를 시작했다. 그의 쿠데타는 지주, 교회, 부르주아와 같은 기득권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1930

[리베라 장군 사임]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군부 독재를 이끌던 리베라 장군이 1930년 스스로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리베라 장군의 군부 독재 체제는 1929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한계를 맞았다. 이로 인해 리베라 장군은 1930년 스스로 총리직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1931

[공화파 총선 승리]

리베라 사임 후 혼란 속에서 1931년 알폰소 13세가 약속한 총선에서 공화파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930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사임하자 스페인의 정국은 왕당파와 군부의 반목, 시민들의 민주주의 요구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에 알폰소 13세는 총선을 약속했고, 1931년 4월 12일 이루어진 총선 결과 공화파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알폰소 13세 망명 및 제2공화국 수립]

총선에서 공화파가 승리하자 알폰소 13세가 망명하고 1931년 4월 14일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31년 4월 12일 총선에서 공화파가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자, 4월 14일에 알폰소 13세는 망명한다. 공화주의자들은 스페인에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뭉쳤고, 온건 가톨릭교도이자 부르주아였던 니세토 알칼라사모라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마누엘 아사냐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참여했다. 제2공화국 헌법은 지방자치, 평화주의, 교회와 국가 분리, 여성 참정권 등을 명시했다.

1933

[아사냐 내각 퇴진과 우파 집권]

제2공화국의 아사냐 내각은 지지부진한 토지개혁과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위기로 좌우 양쪽에서 비난받아 1933년 퇴진했고, 이후 총선에서 우파가 집권했다.

공화국 정부의 최대 현안이었던 토지 개혁은 지주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항으로 지지부진했고, 대공황으로 양극화가 심화되어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아사냐 내각은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비난받아 1933년에 퇴진했으며, 이후 총선 결과 우파가 집권했으나 군대를 동원한 노동 운동 탄압으로 지지율이 급락했다.

1936

[독일의 '불의 마법' 작전 개시]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의 요청으로 히틀러가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한 첫 작전 '불의 마법'을 1936년 1월 말에 개시했다. 52척의 군함과 수송기, 전투기가 동원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가 히틀러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세 차례의 주요 작전을 수행했다. 그 첫 작전인 "불의 마법"은 1936년 1월 말에 진행되었으며 프랑코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52척의 군함과 20여기의 수송기 및 6대의 전투기를 동원했다.

[인민전선의 총선 승리]

1936년 2월 총선에서 스페인 사회노동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의회를 장악하고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1936년 2월에 치러진 총선 결과 스페인 사회노동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전선이 승리하여 473석 중 289석을 확보했다. 의회를 장악한 인민전선은 토지 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지주, 자본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프랑코 쿠데타와 스페인 내전 발발]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머물던 프랑코와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며 마누엘 아사냐 정부와 프랑코 쿠데타군 간의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1936년 2월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하고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자 스페인의 지주, 자본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심화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마침내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 머물던 프랑코와 스페인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며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형식상 지휘자는 호세 산후르호였으나, 핵심은 프랑코였다.

[반란군 사령관 산후르호 사망]

내전 발발 직후인 7월 20일, 반란군의 형식상 사령관이었던 호세 산후르호가 리스본 인근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여 반란군 지휘 체계가 양분되었다.

내전 발발 직후인 1936년 7월 20일, 반란군의 형식상 지휘자였던 호세 산후르호가 리스본 인근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반란군 측의 지휘 체계는 북방의 에밀리오 몰라와 남방의 프란시스코 프랑코로 양분되었다.

[반란군의 스페인 해군 기항 페롤 점령]

반란 시작 5일째인 1936년 7월 21일, 프랑코 쿠데타군은 스페인 해군의 주요 기항인 페롤을 점령하며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반란 5일째인 1936년 7월 21일, 반란군은 스페인 해군의 기항 페롤을 점령했다. 공화파 정부는 쿠데타 징후를 포착했으나 초동 진압에 실패하여 쿠데타군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독일의 '오토' 작전 개시]

히틀러는 프랑코 지원을 위해 두 번째 작전 '오토'를 1936년 9월에 개시, 프랑코군에게 24대 이상의 1호 전차를 제공했다.

히틀러는 1936년 9월 두 번째 작전 "오토"를 통해 프랑코에게 24대 이상의 1호 전차를 제공했다. 이는 반란군 프랑코파에 대한 독일의 주요 군사 지원 중 하나였다.

[반란군의 이룬 점령]

몰라 휘하 반란군은 스페인 북부 기푸스코아 주를 점령하던 중 9월 5일 격렬한 전투 끝에 프랑스인 공화파 군대가 지키던 이룬을 점령했다.

몰라 휘하에 있던 베오르레기 카네 대령은 1936년 7월부터 9월까지 스페인 북부의 기푸스코아 주를 점령해 나갔다. 9월 5일 격렬한 전투 끝에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공화파 군대가 지키던 이룬이 반란군 측에 점령당했다.

[반란군의 산 세바스티안 점령]

1936년 9월 13일, 바스크 지방의 주도 빌바오의 관문인 산 세바스티안이 반란군에게 항복하며 스페인 북부 지역의 공화군 저항이 약화되었다.

1936년 9월 13일, 바스크 지방의 주도 빌바오의 관문인 산 세바스티안이 반란군에게 항복하였다. 공화국 정부군은 9월 말까지 비즈카야에서 저항을 이어갔다.

[프랑코, 국민파 총사령관 추대]

1936년 9월 21일 살라망카에서 회합을 가진 반란군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산후르호를 대신하여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했다.

반란군의 형식상 사령관이었던 산후르호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후, 1936년 9월 21일 살라망카에서 회합을 가진 반란군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며 그의 권력 집중이 시작되었다.

[알카사르 공방전 프랑코군 승리]

1936년 9월 27일 톨레도에서 벌어진 알카사르 공방전에서 프랑코군이 승리하며 내전 전황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36년 9월 27일 톨레도에서 벌어진 알카사르 공방전이 프랑코군의 승리로 끝나자 반란군은 내전 전황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승리는 프랑코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독일군 스페인 내전 직접 참전]

1936년 10월, 히틀러는 세 번째 작전을 통해 600~800명의 독일군을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전시켰다. 이는 국제연맹 불간섭 조약 발효 이전이었다.

히틀러는 프랑코파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세 번째 작전을 개시했다. 1936년 10월, 600~800명의 독일군이 직접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는 이후 콘도르 군단 투입의 전초가 되었다.

[공화국 정부 발렌시아로 이전]

프랑코군이 마드리드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1936년 11월 6일 공화국 정부는 전투를 피해 수도를 발렌시아로 옮겼다.

1936년 10월이 되자 프랑코의 반란군은 마드리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공화국 정부는 전투를 피해 1936년 11월 6일 수도를 발렌시아로 옮겼다.

[마드리드 공방전 주요 전투 시작]

공화국 정부가 발렌시아로 이전한 지 이틀 후인 1936년 11월 8일, 마드리드를 둘러싼 주요 전투가 시작되었다.

공화국 정부가 발렌시아로 옮겨진 후, 1936년 11월 8일에 마드리드를 방어하기 위한 주요 전투가 시작되었다. 국제여단이 이끄는 공화파 병력은 마드리드를 사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프랑코군 마드리드 함락 실패]

1936년 11월 27일까지 프랑코 반란군은 국제여단이 지키는 마드리드를 맹공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프랑코는 전략을 바꿔 마드리드를 포위 폭격했다.

프랑코의 반란군은 1936년 11월 27일까지 3,000여 명의 국제 여단이 지키고 있는 마드리드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이에 프랑코는 전략을 바꿔 마드리드를 포위하여 고립시키고 전폭기를 동원하여 폭격하기 시작했다. 마드리드는 그 후로도 2년 동안 고립된 채 반란군과 싸웠다.

1937

[프랑코군의 마드리드 재공격 실패]

1937년 1월과 2월에 걸쳐 프랑코군은 마드리드를 다시 함락하고자 공격했으나 또다시 공화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

1937년 1월과 2월에 걸쳐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함락하고자 공격하였으나 또 다시 공화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프랑코군의 말라가 함락]

마드리드 함락에 실패한 프랑코군은 1937년 2월 8일 남부의 주요 도시인 말라가를 함락시키며 점령지를 확대했다.

1937년 2월 8일, 프랑코군에 의해 말라가가 함락되었다. 이는 마드리드 공격 실패 후 반란군이 점령지를 확대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국제연맹 불간섭 조약 발효]

스페인 내전의 확전을 우려한 국제연맹은 1937년 2월 21일 불간섭 조약을 발효, 각국의 군사 개입을 금지하고 파시스트 측 외국 병력 참전을 불법으로 간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은 유럽 각국은 스페인 내전이 또 다른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국제 연맹을 통하여 1937년 2월 21일 각 국의 군사 개입을 금지하는 불간섭 조약을 체결, 파시스트 측의 외국 병력 참전을 불법 교전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양측의 외부 지원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독일 콘도르 군단 파병]

국제연맹 불간섭 조약 발효에도 불구하고 1937년 3월 7일, 나치 독일은 의용군 명목으로 콘도르 군단을 스페인에 파병하고 하인켈 He 51 전폭기를 투입했다.

국제 연맹의 불간섭 조약이 발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37년 3월 7일 나치 독일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콘도르 군단을 파병하면서 하인켈 He 51 전폭기를 스페인에 투입하였다. 나치 자원병으로 구성된 콘도르 사단은 내전 기간 동안 총 19,000여 명이 투입되었다.

[독일 공군의 게르니카 폭격]

1937년 4월 26일, 독일 전폭기가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폭격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스페인 내전 중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1937년 4월 26일 독일의 전폭기는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폭격하여 수백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은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로도 유명해졌으며, 민간인 무차별 폭격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역사에 남았다.

[프랑코군의 게르니카 함락]

독일 공군의 폭격 이틀 뒤인 1937년 4월 28일, 프랑코군이 폐허가 된 게르니카를 함락했다.

독일 전폭기의 게르니카 폭격 이틀 뒤인 1937년 4월 28일, 프랑코군이 게르니카를 함락하였다. 게르니카 폭격 이후 공화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브루네테 전투 승리]

공화군은 마드리드 함락에 전력을 쏟던 프랑코군에 맞서 브루네테 전투에서 승리, 마드리드 포위를 분쇄하며 중요한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공화군은 마드리드 함락을 위해 전력을 쏟아붓는 프랑코군에 대적하기로 결심했다. 마드리드 근교에서 벌어진 브루네테 전투에서 공화군은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고, 이 전투의 결과 공화군은 마드리드 포위를 분쇄할 수 있었다.

[에밀리오 몰라 사살]

1937년 7월 3일, 공화군이 반란군의 부사령관이자 프랑코와 비슷한 세력을 구축했던 에밀리오 몰라를 사살했다. 이는 프랑코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 7월 3일 공화군은 반란군의 부사령관이었던 에밀리오 몰라를 사살했다. 몰라는 프랑코와 함께 반란군의 양대 지휘자 중 한 명으로, 그의 사망은 프랑코에 대한 권력 집중을 가속화시켰다.

[프랑코군의 아라곤 공격 및 산탄데르 점령]

마드리드 포위 분쇄 이후인 1937년 8월, 프랑코군은 아라곤 지방을 공격하고 산탄데르를 점령하며 북부 지역으로 점령지를 확대했다.

브루네테 전투로 마드리드 포위가 분쇄된 후, 1937년 8월이 되자 프랑코는 아라곤 지방을 공격하였으며 산탄데르를 점령했다.

[아스투리아스 지방 전투 및 바스크 공화군 항복]

1937년 8월 이후 두 달간 벌어진 아스투리아스 지방 전투에서 바스크 지방의 공화군이 결국 프랑코군에게 항복했다.

1937년 8월 프랑코군의 아라곤 공격과 산탄데르 점령 이후, 두 달간 벌어진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전투에서 바스크 지방의 공화군은 끝내 프랑코군에게 항복하였다.

[프랑코군의 발렌시아 진격과 공화국 정부 재이전]

스페인 북부 지역을 점령한 프랑코 군대가 1937년 11월 발렌시아로 진격해 오자, 공화파 정부는 수도를 바르셀로나로 다시 옮겼다.

프랑코의 군대는 스페인 북부지역을 점령해 나갔으며 1937년 11월에는 발렌시아로 진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결국 공화파 정부는 수도를 바르셀로나로 옮겨졌다.

1938

[공화군의 테루엘 점령]

1938년 1월, 오랫동안 반란군 강세 지역이었던 테루엘을 공화군이 점령하며 내전 상황에 잠시 변화를 주었다.

내전의 상황이 반란군 측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던 중, 1938년 1월 공화군은 오랫동안 반란군이 강세를 보이던 테루엘을 점령하였다. 이는 공화군에게 중요한 심리적 승리였다.

[프랑코군의 테루엘 재탈환]

공화군이 점령했던 테루엘을 프랑코군이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의 지원을 받아 무차별 폭격 끝에 1938년 2월 22일 다시 수중에 넣었다.

공화군이 점령한 테루엘을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군의 지원을 받아 공격했다. 1938년 2월 22일엔 피아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 끝에 테루엘은 다시 반란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프랑코군의 아라곤 공격]

1938년 3월 7일, 프랑코 측이 아라곤 지방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며 내전의 판세가 반란군에게 더욱 유리해졌다.

반란군의 군대가 테루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내전의 상황은 반란군 측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1938년 3월 7일 프랑코 측은 아라곤 공격을 감행하며 공화파를 압박했다.

[프랑코군 지중해 진격과 공화파 진영 양분]

1938년 4월 17일, 프랑코군의 지중해 연안 진격으로 공화파 정부 진영이 남북으로 완전히 양분되며 전략적 고립이 심화되었다.

1938년 4월 17일 프랑코파의 군대가 지중해 연안까지 진격함으로써 정부 진영은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이는 공화파에게 치명적인 전략적 손실이었다.

[공화국 정부의 강화 조약 요청 결렬]

1938년 5월, 전세가 불리해진 공화국 정부가 강화 조약을 요청했으나 프랑코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며 협상은 결렬되었다.

1938년 5월이 되자 정부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강화 조약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프랑코가 정부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고 프랑코군은 발렌시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에브로 전투 시작]

전세가 불리해진 공화국 정부가 대대적인 지원을 호소하며 1938년 7월 24일 에브로 전투를 시작, 4만 명의 프랑코군에 맞섰다.

공화국 정부는 에브로 전투가 진행 중이던 1938년 7월 24일부터 11월 26일까지 대대적인 지원 호소에 나섰다. 아프리카 군단이 주축이 된 4만 명의 프랑코파 군대를 상대로 공화군은 에브로 전투에서 분투했다.

[에브로 전투 공화군 패배]

1938년 11월 26일 에브로 전투에서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에 몰린 공화군이 결국 패배하며 전세가 국민파에게 완전히 기울었다.

1938년 11월 26일까지 진행된 에브로 전투에서 병력과 무기에서 절대적으로 수세에 몰려있던 공화군은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패배로 서방 세계의 연합에 의한 반파시스트 전선이라는 정부의 희망은 크게 흔들렸다.

[프랑코군의 카탈루냐 진격 시작]

에브로 전투 승리 후 신년 이틀 전인 1938년 12월 말, 프랑코는 군대를 카탈루냐 지방으로 진격시키기 시작하며 공화파의 마지막 거점을 압박했다.

에브로 전투에서 공화군이 패배한 후, 신년을 이틀 앞둔 세밑인 1938년 12월 30일, 프랑코는 군대를 카탈루냐 지방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1939

[프랑코군의 카탈루냐 지방 점령]

1939년 새해 두 달 만에 반란군은 카탈루냐 지방을 신속하게 점령하며 공화파의 주요 거점을 차례로 함락했다.

반란군은 신년이 시작된 두 달 동안 바람과 같이 카탈루냐 지방을 점령해 나갔다. 이로 인해 마드리드를 비롯한 몇몇 지역만이 공화군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영국-프랑스의 프랑코 체제 승인]

1939년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가 프랑코 체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국제 사회의 공화파 지원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1939년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 체제를 인정하였다. 이는 공화파에게 큰 타격이었으며, 국제 사회의 지원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공화파 정부 프랑스로 망명]

1939년 3월 5일, 카탈루냐 지방이 반란군에 점령된 후 공화파 정부는 프랑스로 망명하며 사실상 정부 기능을 상실했다.

카탈루냐 지방이 반란군의 공격을 받아 점령당하자, 1939년 3월 5일 공화파 정부는 프랑스로 망명하며 스페인 내전의 패배를 인정하는 수순을 밟았다.

[마드리드 공화파 내부 내란 발생]

1939년 3월 7일, 마드리드에서 공화파 내 비공산당 세력이 공산당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또 다른 내란이 발생하며 공화파의 마지막 저항을 약화시켰다.

공화파 정부가 프랑스로 망명한 후, 1939년 3월 7일에는 마드리드에서 공화파 내의 비 공산당 세력이 공산당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또 다른 내란이 발생했다. 이는 공화파 진영의 극심한 분열을 보여주었다.

[프랑코군의 마드리드 입성]

공화파 내부 갈등으로 혼란을 겪던 마드리드에 1939년 3월 28일 반란군이 입성하며 공화파의 마지막 주요 거점이 함락되었다.

공화파 정부가 망명하고 마드리드 공화파 내에서 내란이 발생하는 혼란 속에서, 1939년 3월 28일 반란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프랑코군의 발렌시아 점령]

마드리드 함락 다음 날인 1939년 3월 29일, 공화파의 또 다른 주요 거점인 발렌시아 역시 반란군에 점령되며 내전의 종말을 알렸다.

반란군의 마드리드 입성 다음 날인 1939년 3월 29일, 공화파의 임시 수도였던 발렌시아 역시 반란군에 점령되었다.

[프랑코 정권의 대규모 숙청 시작]

내전 종식 후 프랑코 정권은 공화파에 대한 잔혹한 보복을 시작, 수천 명의 공화군을 투옥하고 최소 3만 명에서 5만 명을 처형했으며 강제 노역과 영아 유괴까지 자행했다.

전쟁이 끝나고 프랑코가 집권하자 잔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수천 명의 공화군이 투옥되었고 최소 30,000명에서 5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노역을 해야만 하였고, 심지어는 영아를 조직적으로 유괴해 인신 매매까지 자행되었다.

[프랑코 승리 선언 및 내전 종식]

1939년 4월 1일,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항복과 국민파의 승리를 선언하며 3년간의 스페인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1939년 4월 1일, 프랑코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스페인 공화국 정부가 항복하였음을 선언하며 3년간의 스페인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이로써 국민파의 승리로 내전이 마무리되고 프랑코 정권이 시작되었다.

1944

[스페인 마퀴스 게릴라 결성]

프랑코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공화파 잔존 세력과 망명자들이 1944년 스페인 마퀴스 게릴라를 결성,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와 연대하여 나치에 맞섰으며 1950년대까지 활동했다.

전쟁 후 공화파의 상당수가 프랑스로 망명한 가운데, 1944년 프랑코에 대항하는 게릴라인 스페인 마퀴스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레지스탕스와 연대하여 나치에 맞섰으며, 1950년대까지 활약하였다.

1955

[스페인 유엔 가입]

제2차 세계대전 후 마셜 플랜 지원 등으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스페인이 1955년부터 유엔에 가입하며 국제 사회에 복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축축국과의 지나친 동맹을 우려한 미국에 의해 무역이 봉쇄되어 자급자족적 경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후 마셜 플랜에 따른 지원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며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55년부터 스페인은 유엔에도 가입하며 국제 사회에 복귀했다.

1975

[프랑코 사망과 부르봉 왕조 복고]

1975년 프랑코 총통이 사망하자 1931년 망명했던 부르봉 왕조가 복고하여 현재까지 스페인 왕실을 잇고 있다.

스페인의 총통이 된 프랑코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일인독재정치를 계속하였다. 프랑코의 사후, 1931년 망명했던 부르봉 왕조가 복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6

[스페인 인민전선 망명 정부 해체]

멕시코에서 1939년부터 존속해오던 인민전선파의 스페인 망명 정부가 프랑코 사망 후 1976년에 해체되었다.

프랑코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던 인민전선파의 스페인 망명 정부는 멕시코에서 1976년까지 존속했다. 이는 프랑코 사망 이후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과 맞물려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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