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말칼덴 전쟁
종교전쟁, 유럽사, 신성로마제국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39:04
- 16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천주교 통합 야망에 맞선 루터교 제후들의 종교전쟁. - 황제군의 압도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루터교를 뿌리 뽑는 데 실패 오히려 종교개혁 확산 계기 마련. - 황제의 제국 통일 꿈을 좌절시키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종교의 자유가 공식 인정된 역사적 전환점.
1521
[루터 파문, 개혁 탄압]
카를 5세 황제가 루터교를 억압하려 보름스 의회를 열고 마르틴 루터를 소환해 파문했습니다.
그의 저술을 모두 금서로 지정하며 강력한 탄압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종교개혁 불씨를 더 크게 지폈습니다.
1529
[루터교 제후, 황제에 저항]
황제의 종교 탄압에 맞서 루터교 제후들이 슈파이어 의회에서 ‘항의’를 결의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반대를 넘어, 황실 권위에 대한 영방국가들의 정치적 저항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530
[종교 갈등 최고조]
루터교 제후들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통해 신앙을 공식화했으나, 카를 5세 황제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신구 양 종파 간의 긴장이 극에 달하며 언제든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1531
[반황제 루터교 동맹]
황제의 거부에 맞서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필리프 1세를 중심으로 유력 루터교 제후들이 슈말칼덴에 모여 반황제파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며 황제의 권력 강화에 대항할 강력한 군사적 연합체를 만들었습니다.
1544
[카를 5세, 독일 집중]
카를 5세 황제가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를 꺾고 크레피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승리로 황제는 오랜 외교적 군사적 부담을 덜고, 마침내 제국 내 루터교 문제에 전적으로 집중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루터교 제후들에겐 불길한 예고였습니다.
1546
[동맹, 예방전쟁 모의]
카를 5세 황제가 군사를 소집하자, 슈말칼덴 동맹 맹주들은 이히터샤우젠에 모여 황제가 용병을 충분히 모으기 전에 선제공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황제의 압도적인 군세에 맞서기 위한 필사적인 전략이었습니다.
[종교 전쟁의 서막]
루터교 제국 자유시들이 슈바벤에서 군대를 모아 아우크스부르크 주교후의 영지를 점령하며 슈말칼덴 전쟁이 마침내 시작되었습니다.
카를 5세 황제의 천주교 제국 복원 야망과 루터교 제후들의 신앙 자유 수호 의지가 충돌한 거대한 종교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맹주 파문, 동맹 흔들]
황제는 슈말칼덴 동맹의 주요 맹주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필리프 1세를 국외파문 조치했습니다.
이는 동맹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황제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려는 교활한 전략이었습니다.
1547
[황제군, 전력 강화]
카를 5세 황제가 보헤미아에서 동생 페르디난트 1세의 군대와 합류하며 압도적인 병력을 확보했습니다.
보헤미아 루터교도들이 동맹군을 돕지 않으면서, 전세는 황제 측에 더욱 유리해져 동맹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동맹군 궤멸, 맹주 포로]
뮐베르크 전투에서 슈말칼덴 동맹군은 카를 5세 황제의 막강한 근황군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동맹의 맹주인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포로로 잡히며 동맹의 사실상 몰락을 알렸습니다.
맹주들의 지리멸렬한 전략 부재가 결정적인 패배를 불렀습니다.
[맹주, 사형 면하고 항복]
뮐베르크 전투에서 포로가 된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사형 선고를 피하기 위해 비텐베르크 조건부 항복에 조인했습니다.
그는 선제후 작위와 영토 일부를 빼앗겼고, 이는 황제에게 붙었던 사촌 모리츠에게 넘어가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북독일, 끝까지 저항]
브레멘 자유시가 에리히 2세의 공성에도 끈질기게 저항하는 동안, 슈말칼덴 동맹군은 드라켄부르크 전투에서 헝가리군에게 극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 승리로 근황군은 북독일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동맹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배신자, 새 선제후 되다]
황제 편에 서서 사촌을 배신했던 모리츠가 마침내 새로운 작센 선제후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는 황제에게 충성한 대가로 요한 프리드리히 1세에게서 빼앗긴 작위와 영토를 차지하며 권력을 얻었지만, 이로 인해 그의 명예에는 큰 오점이 남았습니다.
1548
[강제 개종 시도]
카를 5세 황제는 슈말칼덴 동맹을 분쇄한 승리에 도취, 아우크스부르크 가협정을 발표해 루터교도들을 다시 천주교로 재개종시키려 했습니다.
황제의 종교적 통일 야망의 절정이었지만, 이는 루터교 제후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또 다른 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1552
[제후전쟁, 황제 배신]
카를 5세 황제의 무자비한 정책에 분노한 루터교 제후들이 모리츠 폰 작센 선제후를 중심으로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황제를 배신한 모리츠가 이끈 이 제후전쟁에서, 황제는 오히려 루터교 동맹군에게 압도당하며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황제, 루터교에 양보]
제2차 슈말칼덴 전쟁에서 패배한 카를 5세 황제는 결국 파사우 화의를 맺고 루터교 맹주들을 석방해야 했습니다.
이는 황제의 천주교 제국 복원 꿈이 좌절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중대한 정치적 양보였습니다.
1555
[루터교, 신앙의 자유]
마침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며 루터교의 신앙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허락되었습니다.
"영주의 종교가 곧 그 영지의 종교"라는 원칙이 확립되자, 카를 5세 황제의 통일된 천주교 제국 건설 꿈은 완전히 좌절되었고, 그는 실의에 빠져 제위를 양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