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르케고르

철학자, 신학자, 실존주의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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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5: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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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렌 키르케고르
철학자, 신학자, 실존주의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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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철학자 신학자 시인 사회비평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헤겔의 관념론과 당시 덴마크 루터교회의 형식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신앙의 본질 기독교 윤리 그리고 개인이 삶에서 직면하는 실존적 문제를 주로 다루었으며 다양한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했다. 그의 사상은 현대 철학 신학 심리학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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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

[쇠렌 키르케고르 탄생]

덴마크 코펜하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우울하고 종교심이 깊었으며, 어머니는 겸손하고 평범한 성격이었다.

1831

[코펜하겐 대학교 입학]

18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형의 권유를 받아 코펜하겐 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했다.

입학 후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며 '기독교는 광기'라고 말할 정도로 신앙에서 멀어졌다.

1834

[어머니 아네 사망]

어머니 아네 쇠렌다테르 룬 키르케고르가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그의 후기 저작에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836

[자살 미수와 내적 안정]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던 중 자살 미수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렀으나, 이 사건 이후 점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1837

[운명의 여인 레기네 조우]

레기네 올센을 만나 즉각적인 매력에 이끌렸다.

그녀는 훗날 그의 저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뮤즈'이자 평생의 사랑으로 남게 된다.

정확한 연도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레기네 올센과의 관계가 시작된 시기로 추정된다.

1838

[아버지 미카엘 사망]

아버지 미카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가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아버지는 깊은 우울감과 종교심, 그리고 총명함을 지닌 인물로, 쇠렌의 암울한 성격과 평생의 문제의식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의 유산 기록]

아버지의 사망 이틀 후 일기장에 "나는 그분에게서 모든 것을 물려받았고, 나는 그분의 모든 것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합쳐진 존재"라고 적으며 깊은 영향과 존경을 표현했다.

1839

[레기네 향한 사랑 기록]

일기장에 레기네 올센을 향한 깊은 사랑을 기록하며, 그녀가 자신의 영혼을 채운 "알 수 없는 신성"이자 "뮤즈"라고 고백했다.

이 사랑은 그의 많은 저작에 영감을 주었다.

1840

[레기네 올센에게 청혼]

사랑하던 레기네 올센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곧 결혼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우울해하기 시작했다.

1841

[첫 주요 작품 출간]

그의 첫 번째 탁월한 작품으로 꼽히는 대학 논문 《아이러니의 개념-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두고》를 출간했다.

이 논문은 대학 심사 교수들로부터 뛰어난 평가를 받았다.

[레기네 올센과 파혼]

청혼 1년 만에 레기네 올센과 파혼했다.

그는 자신의 "우울함"이 결혼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일기장에 남겼으나, 정확한 파혼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여겨지지만, 결혼 후에도 그 사랑이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슐레겔 부부가 코펜하겐을 떠나 총독으로 임명된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날 수 없었다.

[철학 박사학위 취득]

코펜하겐 대학교에서 논문 〈아이러니의 개념-소크라테스를 염두에 두고〉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으며 학업을 마쳤다.

1842

[《이것이냐, 저것이냐》 완성]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대부분을 저술하고 가을에 완성했다.

이 작품은 그의 독특한 글쓰기 형식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며 초기 글쓰기의 성숙도를 드러낸다.

1843

[초기 대표작들 발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비롯하여 《공포와 전율(두려움과 떨림)》, 《반복》 등 레기네 올센과의 파혼에 깊은 영향을 받은 초기 대표작들을 잇달아 출간했다.

이 시기에 쓴 다른 여러 저서들도 키르케고르와 레기네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으며,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하고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을 형성하는 데 집중했다.

1845

[《해적선》 논쟁 시작]

비평가 페테르 루드비히 묄러가 그의 저서 《인생길의 여러 단계》를 형편없이 비평한 글을 발표하며, 유명 인사를 풍자하는 잡지 《해적선》과의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사상을 지키기 위해 응답하는 글을 썼고, 《해적선》과 편집장 마이르 아아론 골드슈미츠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몇 달 동안 《해적선》은 키르케고르의 외모, 목소리, 습관을 우스갯소리로 만들어 세상에 퍼뜨렸다.

1846

[《두 시대》 비평 출간]

《두 시대:문학적 감상문》을 출간하며 기독교계의 위선 비판과 함께 대중의 무관심하고 열정 없는 태도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필명 사용 중단 선언]

《해적선》 사건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간접적으로 필명을 쓰는 의사소통 방식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일기에 기록하며, 작가로서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1847

[후손에 대한 기대 기록]

자신의 일기장에 "일반 대중과 맺고 있는 관계에 관해서 보면, 나는 다시 한 번 후손들을 나의 신뢰할 수 있는 친구로 삼아야만 한다"고 기록하며 당대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미래 세대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1848

[덴마크 국교회 비판]

《기독교의 실천》, 《자기반성을 위하여》 등을 통해 덴마크 국교회의 위선과 세속화를 본격적으로 공격하며,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을 설명하려 노력했다.

1849

[《죽음에 이르는 병》 발표]

실존적인 절망의 본성을 탁월하게 분석한 그의 가장 대중적인 작품 중 하나인 《죽음에 이르는 병》을 출간했다.

이 책은 후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사후 영향력 예견]

일기장에 "지금 내가 죽는다면, 나의 삶이 남긴 결과는 비범한 것이 될 것이다.

일기들에서 부주의하게 간단히 몇 작 적어둔 많은 것이, 매우 큰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고, 엄청난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라고 기록하며 자신의 사후 영향력을 정확히 예견했다.

1854

[교회 비판활동 전개]

말년에 이르러 《조국》 신문에 기사를 쓰고, 직접 잡지 《순간》을 발간하는 등 덴마크 국교회의 위선과 타락을 비판하는 활동에 집중했다.

1855

[쓰러져 입원, 성만찬 거부]

《순간》 제10호 출간 전 거리에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중 공무원으로 여겼던 목사의 성만찬을 거부하며 교회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고수했다.

그는 병원에 한 달도 넘게 입원해 있으면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에밀 뵈센 목사와 대화하며 자신의 삶이 엄청나고 알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했다고 언급했다.

[장례식 소동 발생]

장례식에서 그의 조카 헨리크 룬트가 키르케고르가 평생 비판했던 덴마크 국교회가 그를 묻는 것에 반발하며 소란을 일으켰다.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 아시스텐스 묘지에 묻혔다.

[쇠렌 키르케고르 사망]

프레데리크 병원에서 척추 결핵으로 42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사상이 '폭탄'처럼 터져 현대 실존주의와 변증법적 신학에 불을 댕길 것이라고 예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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