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보들레르

시인, 비평가, 상징주의, 퇴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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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4: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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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보들레르
시인, 비평가, 상징주의, 퇴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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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비평가. 《악의 꽃》으로 문학계에 파란을 일으키며 상징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음. 퇴폐적이고 파격적인 주제로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으나 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고독 빚 질병 속에서도 끊임없이 창작하며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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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

[프랑스 파리에서 샤를 보들레르 출생]

프랑스 파리에서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환속한 사제이자 아마추어 화가였습니다.

1821년 4월 9일,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환속한 사제이며 아마추어 화가였고, 어머니 카롤린 뒤페는 아버지보다 34살 어린 고아 출신이었습니다.

1827

[아버지 사망과 유산 상속]

보들레르가 6살 때,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사망했습니다. 보들레르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보들레르가 6살 되던 해인 1827년,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사망했습니다. 어린 보들레르를 위해 가족 내에서 유산 관리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로 인해 보들레르는 평생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1828

[어머니의 재혼]

아버지가 사망한 이듬해, 어머니 카롤린 뒤페가 권위 의식이 강한 오픽 소령과 재혼했습니다. 이로 인해 보들레르와 어머니의 관계는 복잡해졌습니다.

1828년, 보들레르의 어머니 카롤린 뒤페는 남편보다 34살 어렸던 고아 출신으로 알려진 보들레르의 어머니 카롤린 뒤페가 권위 의식이 몸에 밴 오픽 소령과 재혼했습니다. 보들레르와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가깝고도 복잡한 것이었고, 이 관계가 그의 삶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1841

[인도 여행 실패와 열대 풍경 경험]

의붓아버지가 보들레르를 환락가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인도로 보냈으나, 그는 레위니옹 섬까지만 갔다가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이 여정에서 열대 풍경에 매료되어 훗날 시의 소재로 삼았습니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 보들레르를 환락가에서 건져내 새사람으로 만들려는 희망에서 그를 인도의 콜카타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고된 여행은 문학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보들레르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고, 삶에 대한 태도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결국 보들레르는 레위니옹 섬의 생드니까지만 갔다가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이 여정에서 그는 열대의 강렬한 풍경에 매료되고 이는 후에 그의 시의 소재가 됩니다.

1843

[댄디로서의 명성과 유산 탕진 시작]

아직 작품을 출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술계에서 책, 예술 작품, 골동품을 사들이는 댄디로 명성을 얻었으며 유산의 절반가량을 탕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843년, 보들레르는 아직 어떤 글도 출판하지 않았지만 예술계에서 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책과 예술 작품, 골동품들을 사들이는 댄디로 통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십만 프랑이 넘는 상당량의 재산과 4군데의 땅을 상속받았으나, 25개월 만에 절반 가량을 탕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844

[유산 절반 탕진과 《악의 꽃》 집필 시작]

친아버지의 유산 절반 가량을 탕진하고, 이 시기에 오노레 드 발자크를 만났습니다. 또한 훗날 대표작이 될 《악의 꽃》의 시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844년쯤, 보들레르는 친아버지의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였고, 정기적으로 어머니를 찾아가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돈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오노레 드 발자크를 만났고 후에 《악의 꽃》에 나타날 시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845

[첫 비평 출판 및 자살 시도]

첫 출판작인 예술 비평 《1845년의 살롱》을 발표하여 대담성으로 주목받았습니다. 또한 쌓이는 빚과 외로움으로 절망하여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1845년, 보들레르의 첫 출판작은 《1845년의 살롱》이라는 예술 비평이었고 그 대담성 때문에 이 책은 출판 직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들라크루아를 높이 사는 것과 같은 그의 비평들은 그 당시에 새로운 것이었으나 그때부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에 그의 얼마 안 되는 연금과 쌓이는 빚, 외로움, 불투명한 미래에 절망하여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의지를 잃어 칼로 자신을 상처냈을 뿐입니다.

1846

[두 번째 살롱 평론으로 비평가 명성 확고]

두 번째 살롱 평론을 발표하며 낭만주의의 변호사이자 비평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특히 들라크루아를 낭만주의 예술의 선두주자로 지지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846년, 보들레르는 그의 두 번째 살롱 평론을 쓰고 낭만주의의 변호사와 비평가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가 낭만주의 예술가의 선두주자로서 들라크루아를 지지한 것은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1847

[소설 《라 팡파를로》 출간]

소설 《라 팡파를로》가 출간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보들레르의 소설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847년 이듬해, 보들레르의 소설인 《라 팡파를로》가 출간되었습니다.

1848

[1848년 혁명 참가]

프랑스에서 일어난 1848년 혁명에 직접 참가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확고한 신념보다는 감정적인 상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무정부주의로 선회하기도 했습니다.

보들레르는 1848년 혁명에 참가했습니다. 몇 년 동안 그는 공화당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의 정치적인 성향은 확고한 확신이기보다는 감정적인 상태였기에 프루동의 무정부주의로 돌아섰습니다. 그의 의붓아버지 역시 혁명에서 잡혔으나 교수형에서 살아남았습니다.

1850

[에드거 앨런 포 작품 번역 완료]

악화된 건강과 많은 빚에 시달리면서도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번역을 성공적으로 끝마쳤습니다. 포의 괴기 소설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1850년, 보들레르는 악화된 건강과 많은 빚, 비정기적인 창작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감당하기 힘든 많은 작업을 떠맡았으나 에드거 앨런 포의 책 번역을 끝마쳤습니다. 보들레르는 어린 시절에 영어를 배웠고 포의 단편과 같은 괴기 소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 중 하나이며, 포우의 단편 소설들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1857

[대표작 《악의 꽃》 출판 및 풍기문란죄 고소]

샤를 보들레르의 첫 시집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악의 꽃》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시집은 섹스와 죽음, 레즈비언 관계 등 파격적인 주제로 큰 논란을 일으켜 풍기문란죄로 고소당했습니다.

1857년, 보들레르의 첫 시집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시집은 섹스와 죽음, 레즈비언 관계, 성스럽고 불경한 사랑, 변형, 우울, 도시의 붕괴, 사라진 순수성, 삶의 억압성 등의 주제를 다뤘습니다. 그러나 이 시집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그 시대의 주류 비평가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되었고, 보들레르와 그의 출판업자들은 풍기문란죄로 고소당해 벌금을 물게 되었습니다.

1858

[옹플뢰르 정착 시도 실패]

파리를 떠나 바닷가의 옹플뢰르에 정착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1858년, 보들레르는 파리를 떠나 바닷가의 옹플뢰르에 정착하려 하나 잘 되지 않습니다.

1859

[애인 잔 뒤발과 동거 시작]

애인 잔 뒤발이 중풍 발작으로 반신불수가 되자 그녀를 보살피기 위해 동거하기 시작했습니다.

1859년, 잔 뒤발이 중풍 발작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되자 보들레르는 그녀를 보살피기 위해 그녀와 동거합니다.

1860

[포우 번역 및 평론 활동 지속]

에드거 앨런 포의 《고든 핌의 모험》 번역을 포함해 <테오필 고티에>, <리하르트 바그너와 탄호이저> 등의 평론을 쓰는 등 활발한 작문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860년까지 보들레르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인 《고든 핌의 모험》을 번역하고, 작가론 <테오필 고티에>와 <리하르트 바그너와 탄호이저>라는 평론 한 편을 쓰는 등 작문 활동을 계속합니다.

1861

[애인과의 결별, 개인적 위기, 《악의 꽃》 증보판 출판, 아카데미 입후보 시도]

애인 잔 뒤발이 다른 애인과 동거하자 그녀를 떠났습니다. 매독 재발, 자존심 상실, 창작욕 좌절 등으로 자살 충동을 느꼈으며, 빚을 갚기 위해 미발표작 저작권까지 모두 팔아버렸습니다. 또한 삭제된 6편의 시가 첨가된 《악의 꽃》 증보판을 출판했습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입후보를 시도했으나 비난 속에 철회했습니다.

1861년, 잔 뒤발의 또다른 애인이 그들의 집에서 동거하게 되자 그는 뒤발을 떠납니다. 그는 이런 상황과 매독의 재발, 상처받은 자존심과 좌절된 창작욕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고, 빚을 갚기 위해 발표되지 않은 작품의 저작권까지 모두 팔아버립니다. 같은 해, 삭제된 6편의 시가 첨가되어 《악의 꽃》의 또다른 판본이 출판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진정한 문인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명예'라며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후보하려고 시도했으나, 당대 문단의 실세였던 비평가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의 맹비난을 받고 결국 철회했습니다.

1863

[《현대 생활의 화가》 집필]

《현대 생활의 화가》를 집필하는 등 작문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1863년, 보들레르는 《현대 생활의 화가》를 쓰는 등 작문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프레스 지에 《파리의 우울》에 담길 그의 산문시들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864

[브뤼셀 활동 및 상징주의 아버지로 추앙받기 시작]

빚에 쪼들려 브뤼셀에 가서 책을 출판하고 강연을 하려 했으나 출판업계는 그에게 냉담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베를렌 등이 그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며 상징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기 시작했습니다.

1864년, 빚에 쪼들리던 보들레르는 브뤼셀에 가서 책을 출판하고 강연을 하려 했으나 출판업계는 그에게 냉담했습니다. 이 시기에 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베를렌이 보들레르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며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이를 반기지 않고 되려 경계하며 귀찮아했습니다.

1867

[프랑스 파리에서 샤를 보들레르 사망]

계속되는 성병과 중풍으로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요양원에서 지내다 파리로 돌아온 후 사망했습니다.

1867년 8월 31일, 보들레르는 이미 계속되는 성병과 중풍으로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으며 여전히 빚에 쪼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요양원에 지내다 파리로 돌아오게 되고 사망했습니다.

1949

1949.05.11 사후 82년

[《악의 꽃》 삭제 시 무죄 판결 및 재출판]

《악의 꽃》에서 삭제되었던 6편의 시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고 프랑스에서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이는 보들레르의 작품이 사후 약 100년 만에 재평가받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거의 100년이 지나서 1949년 5월 11일, 보들레르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고 그의 삭제된 6편의 시가 프랑스에서 다시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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