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비 제국

제국, 왕조, 근세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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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제국은 1501년부터 1736년까지 페르시아를 통치한 근세 이란 제국입니다. 7세기 무슬림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 가장 거대한 이란 제국 중 하나였으며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여 현대 이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화약 무기로 무장한 군사력 유럽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화적 경제적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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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

[사파비야 교단 창립]

사파비 제국의 기원이 되는 수피즘 종파 '사파비야'가 사피 앗딘 아르다빌리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아르다빌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사피 앗딘은 길란 지방의 수피교 교단을 흡수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사파비야를 창시했습니다.

사피 앗딘 아르다빌리는 어릴 적부터 영특하여 스승을 찾아 떠돌았고, 길란 지방에서 자히드 길라니를 만나 그의 딸과 결혼하며 후계자가 됩니다. 그가 교단을 개명하자 아르다빌 주민 대부분이 그의 추종자가 될 만큼 강력한 종교정치세력이었습니다.

1447

[셰이크 주나이드, 세속 권력 추구]

이브라힘의 아들 셰이크 주나이드가 사파비야의 수장 자리에 오르면서 교단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바뀝니다.

그는 단순한 영적 권위에 만족하지 않고 세속적인 권력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하며, 사파비야를 정치 및 군사 세력으로 변모시켰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강국이었던 카라 코윤루 왕조의 자한 샤는 성장하는 사파비야를 경계하여 주나이드를 추방했습니다. 주나이드는 카라 코윤루의 경쟁국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에게 망명하고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동맹을 공고히 했습니다.

1488

[셰이크 하이다르 살해, 이스마일에게 계승]

아크 코윤루의 야쿱이 사파비야의 영향력 확대를 위협으로 느끼고 시르반샤와 동맹을 맺어 셰이크 하이다르를 살해했습니다.

하이다르의 사망 이후 그의 어린 아들 이스마일에게 사파비야의 수장 자리가 계승되며, 훗날 사파비 제국의 기반이 마련됩니다.

하이다르의 삼촌인 우준 하산은 흑양 왕조를 멸망시킨 후 사파비야의 본거지 아르다빌을 하이다르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아르다빌을 회복한 사파비야는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며 빠르게 세력을 키웠고, 하이다르는 동로마 황족의 피가 섞인 알람샤 베굼과 결혼했습니다.

1499

[이스마일, 키질바시 재소집]

형 알리 미르자가 살해당한 후, 7세의 어린 나이에 사파비야의 수장이 된 이스마일은 길란 지방에 은신하여 5년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12세가 되던 해 아르다빌로 귀환하여 키질바시들을 재소집, 카자르, 아프샤르 부족 등으로 구성된 수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게 됩니다.

당시 이란은 티무르 제국 쇠퇴 후 정치적, 종교적으로 분열되어 여러 세력들이 난립하는 혼란기였습니다. 이스마일이 이끌던 사파비야 교단도 그중 하나로, 이스마일은 시아파 이슬람에 대한 강렬한 믿음과 카리스마로 부족민들을 통합했습니다.

1501

[페르시아 통일 및 대확장]

사파비 제국은 건국과 동시에 폭발적인 확장을 시작했습니다.

10년 만에 페르시아 전역을 통일하고 '이란의 파디샤' 칭호를 겸했습니다.

1511년에는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이끄는 우즈베크인들을 물리치고 옥수스 너머로 쫓아내는 데 성공하며 동쪽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사산 제국 멸망 이후 가장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스마일 1세는 1501년에 아제르바이잔, 시르반, 다게스탄 남부, 아르메니아 고원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1502년 하마단, 에르주룸, 에르진잔, 1503년 시라즈와 케르만, 1504년 디야르바크르, 나자프, 카르발라, 1508년 반, 1509년 바그다드와 헤라트, 1510년 호라산을 정복하며 영토를 급속도로 확장했습니다. 인접한 조지아의 카르틀리 왕국과 카헤티 왕국은 이미 1503년에 사파비 제국에 복속했습니다.

[사파비 제국 건국, 시아파 국교화]

12세의 어린 이스마일 1세는 부친을 살해한 시르반샤를 침공하고 바쿠를 정복했습니다.

이어 수적으로 4배나 우세했던 아크 코윤루를 꺾는 경이로운 승리를 거둔 뒤, 그해 7월 타브리즈에 입성하여 스스로 '샤한샤(왕 중의 왕)'를 칭하며 사파비 제국을 건국했습니다.

그는 시아파 이슬람의 열두이맘파를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며 이슬람 역사에 한 획을 긋습니다.

페르시아의 영웅으로 떠오른 이스마일 1세는 자신을 이맘의 자손이자 신성한 혈통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열두이맘파가 국교로 확립되자 페르시아 영내 수많은 수피즘 교단들이 이를 지지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즉시 시아파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바그다드에 입성하자 아바스조 칼리파와 수니파 이맘 아부 하니파 알 누만, 수피파 압둘 카디르 길라니 등의 무덤을 파괴하며 중동에 종교적 긴장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514

[찰디란 전투 참패]

시아파 대제국 건설을 꿈꾸던 이스마일 1세의 야심은 수니파 강대국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오스만 술탄 셀림 1세는 시아파 튀르크멘 부족들을 빼앗아가는 사파비 제국을 응징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 인근 찰디란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파비 군대는 오스만 군대의 압도적인 화약 무기 앞에 참패했고, 수도 타브리즈까지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오스만 군대는 사파비 군대보다 2배 이상 많았으며, 대포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마일 1세는 수적으로 열세인 전통적인 냉병기 위주의 군대로 맞섰다가 처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이 패배는 이스마일이 쌓아 올렸던 '무적 신화'를 산산이 깨뜨렸고, 그의 권위는 실추되어 정치에 흥미를 잃고 재상에게 국정을 맡기게 됩니다. 심지어 부인과 후궁, 첩들까지 모두 셀림 1세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찰디란 전투는 오스만-페르시아 간 300년이 넘는 전쟁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1524

[어린 타흐마스프 즉위, 키질바시 내전]

이스마일 1세 사망 후 10세의 어린 타흐마스프 1세가 즉위했지만, 찰디란 전투 패배로 인한 황제의 권위 실추와 어린 나이로 인해 키질바시 부족들 간의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습니다.

섭정을 자처하는 부족들 사이에서 내전이 발발하며 제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10여 년간의 내전 끝에 타흐마스프 1세가 직접 국정을 통치하기 시작하며 키질바시의 영향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초대 섭정이었던 룸루 부족 출신의 디브 술탄 룸루를 타칼루 부족과 우스타줄루 부족이 견제하며 삼두정치를 제안했지만 곧 붕괴되었습니다. 내전 도중 우즈베크인들이 동부를 약탈하자 디브 술탄은 처형당했고, 타칼루 부족의 추하 술탄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으나 그 역시 암살당했습니다. 결국 17세가 된 타흐마스프 1세가 호세인 칸 샴루를 숙청하며 길었던 내전이 종결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타칼루 부족은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1532

[오스만의 재침, 청야전술로 방어]

타흐마스프 1세의 치세 동안 우즈베크인들이 동부 호라산을 다섯 차례나 습격했지만, 사파비 제국은 찰디란 전투 이후 도입된 화약 무기를 사용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서쪽의 오스만 제국 쉴레이만 1세가 본격적으로 페르시아 침공을 재개하며 제국은 다시 위협에 처했습니다.

사파비 제국은 청야전술로 맞서며 장기적인 대치 상황에 돌입했습니다.

쉴레이만 1세는 재위 초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전쟁으로 사파비 제국을 신경 쓸 틈이 없었으나, 1530년대부터 페르시아를 공격했습니다. 1532년 타칼루 부족 출신 망명객들이 이끄는 오스만 군대가 타브리즈와 쿠르디스탄을 점령했습니다. 1534년에는 쉴레이만 1세가 직접 친정을 감행하여 바그다드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습니다. 타흐마스프 1세는 점령지 대부분을 수복하고 오스만 군대의 후방을 위협하여 퇴각시켰습니다.

1540

[조지아 침공, 대규모 포로 획득]

타흐마스프 1세는 내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우스타줄루 부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지아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는 '지하드(성전)'를 명분 삼아 1540년부터 1553년 사이에 조지아 지역을 수 차례 침공하여 수도 트빌리시를 약탈하고 조지아인들을 대규모로 포로로 잡아 페르시아로 끌고 왔습니다.

첫 침공에서 사파비 군대는 트빌리시를 약탈하고 귀족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두 번째 침공에서는 조지아 농장들이 파괴되고 카헤티의 왕 레반이 복속했습니다. 아마시아 조약 체결 직전인 1554년에는 3만 명에 달하는 조지아인들이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1543

[무굴 황자 후마윤 망명]

당시 인도의 무굴 제국 2대 황제 후마윤은 이복형제들에게 쫓겨 방랑하다가 1543년 사파비 궁정에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에게 황제의 격을 갖춘 대우를 해주며, 그가 시아파로 개종하고 칸다하르를 사파비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전폭적인 군사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의 증조부 시대에 집필된 사디의 굴리스탄 삽화본을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1545년 사파비-무굴 연합군은 칸다하르와 카불을 점령했으며, 이는 훗날 남아시아에서 사파비 제국을 능가할 또 다른 대제국이 성장하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1555

[오스만과 아마시아 조약 체결]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은 수십 년간 이어진 전쟁을 멈추고 아마시아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사파비 제국은 메소포타미아와 쿠르디스탄 영토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시아파의 전통적인 수니파 칼리파 저주를 중단하는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그 대가로 페르시아 순례자들이 메카 등 시아파 성지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도록 허용받았습니다.

내부를 겨우 안정시킨 타흐마스프 1세에게 이 조약은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고 병력과 자원을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비록 영토 일부를 상실했지만, 오스만이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다는 방증이기도 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조지아 동부는 사파비 제국에게, 조지아 서부는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갔습니다.

1559

[오스만 황자 바예지드 망명]

오스만 제국 술레이만 1세의 아들 바예지드가 후계자 분쟁에서 밀려 1559년 페르시아로 망명하자, 타흐마스프 1세는 그를 환대했습니다.

그러나 쉴레이만의 귀환 협상과 바예지드의 음모 소식을 들은 타흐마스프는 1561년 그를 구금하고 오스만 대사에게 넘겨주었고, 바예지드는 결국 오스만이 보낸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바예지드는 오스만에 반기를 든 후 사파비 제국으로 피신했습니다. 타흐마스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스만 제국과 외교적 협상을 벌였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오스만-사파비 관계의 복잡성을 잘 보여줍니다.

1576

[타흐마스프 사망, 이스마일 2세 즉위]

타흐마스프 1세 사망 후,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아들들 사이에 다시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1556년부터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이스마일 왕자가 대다수 키질바시 부족과 귀족 가문의 지지를 받아 1576년 8월 22일 '이스마일 2세'로 즉위합니다.

최대 경쟁자였던 하이다르는 즉시 참수당했습니다.

이스마일 2세는 14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제위를 위협할 만한 황족들을 모조리 숙청하는 잔혹함을 보였습니다. 심지어 장님이었던 무함마드 호다반다와 그의 세 아들만 살려두었는데, 그 역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였습니다.

1577

[이스마일 2세의 독살]

이스마일 2세는 시아파 교단들의 세가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거나, 혹은 아버지 타흐마스프 1세에 대한 반발로 시아파를 탄압하고 수니파 정통주의를 재도입하려 시도하는 급진적인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의 기행은 결국 누이 파리 칸 카눔 공주에 의해 아편 독살이라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스마일 2세는 재위 중 약물 사용으로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의 잔인한 숙청과 급진적인 종교 정책은 결국 내부의 반발을 샀고, 누이 파리 칸 카눔은 그가 피우는 아편에 독을 넣어 그를 살해했습니다.

1578

[외세 침공, 제국 위기]

무함마드 호다반다의 무능으로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우즈베크인들이 1578년에 대대적으로 국경을 넘어 침입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오스만 제국이 아마시아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재개했다는 점입니다.

오스만 군대는 조지아와 시르반을 침공하며 사파비 제국의 서부 영토 상당 부분을 점령했습니다.

오스만 군대는 1585년에는 사파비 제국의 옛 수도였던 타브리즈까지 함락시키는 등 위협이 가중되었습니다. 제국 서북부 영토는 완전히 오스만에게 넘어갔고, 동부의 호라산 영토 절반은 우즈베크인들의 약탈에 시달리는 등 사파비 제국은 멸망의 기로에 섰습니다.

[장님 황제 호다반다 즉위]

이스마일 2세 사후, 장님이었던 무함마드 호다반다가 1578년 2월 11일 제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치세에는 황권이 극도로 약화되어 황후 마흐드 이 울야가 대재상 미르자 살만 자베리와 공모하여 파리 칸 카눔을 암살하고 국정을 장악하는 등 황실 내부의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습니다.

마흐드 이 울야는 황실 신하들과 고위 관료들을 매일 아침 여성용 아파트 입구에 모아 명령을 내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키질바시들의 반발로 인해 그녀 역시 크림 칸국의 동생과의 간통 혐의로 1579년 목이 졸라 살해당했습니다.

1581

[아바스 미르자 반란]

외세의 위협이 가중되자 호라산에서는 무함마드 호다반다의 둘째 아들 아바스 미르자를 내세운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1581년 4월, 이스마일 2세의 신하 알리 쿨리 칸과 샴루 부족이 아바스를 샤로 선포하며 지지를 천명했고, 우스타줄루 부족도 합류하여 반란군의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이듬해 반란 진압을 위해 출정한 대재상 미르자 살만과 황세자 함자 미르자(황후의 총애를 받던 아들)가 이끄는 키질바시 충성파와 아바스 미르자 휘하의 연합군이 호라산에서 대립했습니다. 진압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미르자 살만이 처형되는 등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1588

[아바스 1세, 위기에 즉위]

오스만 제국에게 타브리즈를 빼앗기고 우즈베크인들이 동부를 약탈하는 등 사파비 제국이 멸망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황세자 함자 미르자마저 살해당했습니다.

기회를 노리던 무르시드 쿨리 칸이 수도 카즈빈으로 진격하자, 무함마드 호다반다는 반강제로 아들 아바스 미르자에게 양위했습니다.

아바스 미르자는 1588년 10월 1일 '아바스 1세'로 즉위하며 제국의 위기를 해결할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아바스 1세 즉위 당시 사파비 제국의 서북부 영토는 오스만에게 완전히 넘어갔고, 동부 호라산 영토 절반은 우즈베크인들의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친보다 훨씬 키질바시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1589

[굴욕적 평화와 개혁 시작]

아바스 1세는 즉위 직후, 당장 급한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압력을 해결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와 아제르바이잔 등 서북부 영토를 모두 오스만에게 넘겨주는 굴욕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후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섭정 무르시드 쿨리 칸을 직접 암살하고, 느슨한 부족 연맹체였던 사파비 제국을 중앙집권적 제국으로 변화시키는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아바스 1세는 키질바시 족장들에게 분봉되던 '마말리크' 제도를 폐지하고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총독 제도를 신설, 징세권을 중앙 정부에 귀속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길란 및 마잔다란 등 주요 경제권역의 수입이 폭증하여 황권이 강화되고 키질바시의 권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1598

[동부 국경 안정, 호라산 탈환]

군 개혁을 성공적으로 마친 아바스 1세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대외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1598~1599년 사이에 우즈베크인들을 공격하여 호라산의 주요 도시 마슈하드 및 헤라트를 탈환하고 동쪽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이는 오스만 제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습니다.

아바스 1세는 사브제바르, 파라, 니사 등을 점령하며 우즈베크인들의 침략을 막아냈습니다. 그의 개혁으로 탄생한 새로운 군대는 기존의 키질바시 전사들에게만 의존하던 한계를 넘어섰고, 화약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강력한 상비군으로 재탄생했습니다.

1599

[유럽에 첫 외교 사절단 파견]

아바스 1세는 기독교도에 대한 관용을 베풀고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구축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려 했습니다.

1599년, 그는 유럽에 첫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모스크바, 노르웨이, 독일을 거쳐 로마 교황 클레멘스 8세의 환대를 받았고, 스페인에 도착하며 페르시아와 유럽 간의 중요한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아바스 1세는 '가장 낮은 기독교인의 신발 밑창 먼지가 오스만 제국 최고위층보다 낫다'고 언급할 정도로 유럽과의 동맹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인들은 페르시아 문화에 매료되었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도 '소피(페르시아 샤한샤)'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이후 유럽과 페르시아 간 사절단의 수와 규모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1603

[오스만과의 전면전 개시]

아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 사절의 무례한 요구에 수염을 깎아 돌려보내며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는 1603년부터 대대적으로 오스만과의 전쟁에 돌입하여 나하반드를 탈환하고 오스만의 대(對)페르시아 전진 요새들을 파괴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아제르바이잔으로 진격해 옛 수도 타브리즈와 예레반을 함락시키며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아바스 1세의 개혁 덕분에 사파비 군대는 화약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오스만 술탄 아흐메드 1세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어 점령지 청야전술 후 본국으로 회군했습니다. 1605년 11월 6일, 아바스 1세는 타브리즈 인근 수피얀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결정적인 대승을 거두며 카프카스 남부까지 진격했습니다.

1609

[쿠르드 반란 진압과 강제 이주]

1609년부터 1610년까지 쿠르드 부족들과 사파비 제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사파비 제국의 대재상 하템 베그가 이끄는 군대는 잔혹하고 긴 포위전 끝에 쿠르드족의 거점 딤딤을 함락시켰습니다.

아바스 1세는 쿠르드인들을 학살하고 그 지역에 튀르크계 아프샤르족을 정착시키도록 명령했으며, 살아남은 쿠르드인들은 호라산으로 강제 추방당했습니다.

이 강제 이주로 오늘날 호라산에는 이때 이주당한 쿠르드인들의 후손이 대략 170만 명 정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 이동 정책은 사파비 제국의 통치 강화와 국경 지역 안정화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612

[카프카스 수복, 오스만 재격파]

오스만 제국은 계속되는 패배 끝에 1612년 나수흐 파샤 조약을 체결하여 카프카스 대부분 지역에 대한 사파비 제국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1618년 오스만이 다시 페르시아 침공을 준비하자, 아바스 1세는 타브리즈 주민을 대피시키고 아르다빌에 불을 지른 뒤 내륙으로 후퇴하는 척하는 함정으로 오스만 군대를 유인, 급습하여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스만의 대재상 다마트 할릴 파샤가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타브리즈를 점령했으나, 아바스 1세의 함정에 걸려들었습니다. 도중에 매복해 있던 4만 명의 사파비 군대는 진격하던 오스만 군대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이는 사파비 제국의 군사적 위상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1614

[조지아 반란 진압, 대규모 학살]

오스만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614~1616년 사이에, 아바스 1세는 조지아인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습니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조지아의 군주들을 초대한 연회에 불참하자 격노하여 조지아를 정벌했습니다.

이 원정으로 조지아 동부에 대한 사파비 제국의 영향력은 완전히 회복되었고, 조지아인 13만~20만 명이 페르시아로 끌려오거나 학살당했습니다.

아바스 1세는 친페르시아 성향의 시아파 무슬림 이예시(이사 칸)를 카르틀리의 왕으로 봉했습니다. 그러나 루아르사브 2세는 이슬람 개종을 거부하다 처형당했고, 조지아 여왕 케테반 역시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고문 끝에 사망했습니다. 이 파괴적인 정벌로 카헤티 왕국 인구의 3분의 2가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은 훗날 사파비 제국 쇠퇴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1615

[장남 처형, 후계자 비극]

아바스 1세는 가정사에서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는 아들 5명 중 2명이 요절했으며, 아들들이 제위를 찬탈할까 극도로 염려했습니다.

처음 아꼈던 장남 모하마드 바케르(사피 미르자)와의 갈등이 커지다가 결국 1615년 그를 처형했습니다.

이후 다른 두 아들마저 실명시키고 감옥에 가두어, 1629년 사망 당시 제국에는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는 비극적인 상황이 초래되었습니다.

아바스 1세는 차남 모하메드 미르자를 1621년에, 삼남 콜리 아마놀라 미르자를 1627년에 실명시킨 뒤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조치는 그의 불안정한 가정사와 후계자 문제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을 보여줍니다.

1622

[영국과 협력, 호르무즈 탈환]

아바스 1세는 유럽과의 동맹을 모색했지만, 스페인과의 호르무즈 영유권 문제로 협상이 결렬되었습니다.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는 1622년에 4척의 전함을 파견하여 아바스 1세가 포르투갈로부터 호르무즈를 탈환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이는 사파비 제국의 해상 무역과 서양과의 교류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직접적인 전쟁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페르시아와의 외교 및 무역 관계에는 적극적이었습니다. 영국의 셜리 형제는 아바스 1세의 군대 개혁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로버트 셜리는 두 번째 페르시아 유럽 사절단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1623

[메소포타미아 수복 대승]

아바스 1세는 조부 타흐마스프 1세가 오스만 제국에게 양도했던 메소포타미아를 되찾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침 오스만 제국에서 새로운 술탄 무라트 4세의 즉위를 둘러싼 혼란이 일자, 그는 곧바로 진격하여 카르발라, 나자프, 바그다드를 잇달아 점령하며 메소포타미아 중남부를 수복했습니다.

이듬해 오스만 군대가 바그다드를 포위했으나, 아바스 1세가 친히 구원에 나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624년 기오르기 사카제가 조지아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잠시 주위가 분산되기도 했지만, 아바스 1세는 오스만 군대를 크게 물리쳤습니다. 아바스 1세 치하의 사파비 제국은 이란, 이라크,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다게스탄, 카바르디노발카르, 바레인,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튀르키예 등 수많은 국가에 걸친 대제국으로 성장하며 최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1629

[아바스 1세 사망, 후계 부재]

사파비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아바스 1세가 1629년 1월 사망했습니다.

그의 치세 동안 키질바시의 권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수십만 명의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유입되며 새로운 군사 계층을 형성했습니다.

수백 년간 분열되었던 페르시아를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로 변모시키며 황권을 유례없이 강화했지만, 후계자 부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남겼습니다.

아바스 1세의 가정사 비극으로 인해 그의 손자 사피가 '사피 샤'로 즉위했습니다. 사피는 국정에 무관심하고 개인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무능한 군주였으며, 이로 인해 제국은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의 치세부터 사파비 제국은 외부의 위협에 취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1630

[사피 샤의 실정, 바그다드 상실]

사피 샤가 무능하다는 것을 알아챈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4세는 1630년대 초부터 사파비 제국을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638년에는 오스만이 바그다드를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재탈환했고, 이듬해 주하브 조약을 체결하여 아바스 1세가 수복했던 메소포타미아와 아나톨리아 동부 영토를 다시 상실했습니다.

사피 샤는 국정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포도주와 아편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자신의 황권에 위협이 되는 친족들을 처형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동쪽에서는 우즈베크인들과 튀르크멘이 지속적으로 약탈을 일삼았고, 무굴 제국은 칸다하르를 무단 점령하는 등 사방에서 위협이 가중되었습니다. 1642년 사피는 과음으로 사망했습니다.

1642

[아바스 2세 즉위, 중흥기 도래]

사피 샤 사망 후, 그의 9살 아들 무함마드 미르자가 '아바스 2세'로 즉위했습니다.

재위 초기에는 재상 사루 타키 등 섭정들이 국정을 이끌었으나, 1646년 재상이 암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아바스 2세는 15세의 나이에 대규모 숙청 작업을 단행하며 직접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조부와 같이 뛰어난 능력으로 혼란에 빠질 뻔한 사파비 제국에 중흥기를 가져왔습니다.

아바스 2세는 1649년 무굴 제국에게 빼앗겼던 칸다하르 지방을 재탈환하고 아우랑제브를 물러가게 만들며 동부 지역을 안정시켰습니다. 1651년 러시아와의 국경 문제도 현명하게 해결했고, 1659년 카헤티 왕국 반란도 성공적으로 진압했습니다. 그는 현명하고 품위 있는 군주로 기록되었으며, 여러 건축물을 건립하며 아바스 1세 시대의 전성기를 유지하는 듯 보였습니다.

1666

[쉴레이만 1세의 실정과 쇠퇴]

아바스 2세 사망 후, 샘 미르자가 '사피 2세'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대관식 직후부터 가뭄, 기근, 대지진 등 재앙이 잇달아 발생하고 우크라이나 코사크족이 카스피해를 넘어 약탈하는 등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궁정의 요청으로 1668년 '쉴레이만 1세'로 재즉위했으나, 그는 황실 하렘에 틀어박혀 쾌락만을 추구하며 국정을 신하들에게 떠넘겼습니다..

쉴레이만 1세는 '쿠루크'라 불리는 호화로운 여행을 즐기며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의 무관심 속에서 궁정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습니다. 1689년 우즈베크와 발루치스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1692년에는 쿠르디스탄, 케르만, 칸다하르 등 여러 지역에서 잇달아 반란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혼란은 제국의 붕괴 징조를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1694

[술탄 후사인 즉위, 샤리아 강화]

쉴레이만 1세 사망 전, 신하들은 제국의 안위를 위해 유약한 성품의 후사인 왕자를 선택했고, 그는 1694년 8월 7일 '술탄 후사인'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대관식에서 이스파한의 최고위 이슬람 성직자에게 주관을 맡기고 샤리아를 제국 전역에 엄격히 시행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이로 인해 술 제조 및 음용, 여성의 자유로운 외출 제한 등 강력한 시아파 정책이 펼쳐졌습니다.

이 대관식은 엄청나게 호화로웠으며, 수도 이스파한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짜 음식이 제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샤리아 강화 정책은 시르반, 다게스탄, 쿠르디스탄 등 수니파 지역의 불만을 키웠고, 이들은 오스만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켜 1721년 시르반의 중심 도시 샤만키를 함락시키는 등 제국의 통제력을 약화시켰습니다.

1699

[발루치인 침공, 아프간 문제 심화]

술탄 후사인의 무능과 강력한 시아파 정책으로 인해 각지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습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그 너머의 건조 지대에서는 호전적인 발루치인들이 사파비 제국과 무굴 제국 모두의 통제를 벗어나 활개 쳤습니다.

1699년, 발루치인들은 케르만 지역을 대대적으로 침공하고 약탈했습니다.

술탄 후사인은 조지아 출신의 기오르기 11세(고르긴 칸)를 케르만 총독으로 임명하여 발루치인들을 물리치게 했습니다. 기오르기 11세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발루치인들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방어해냈습니다. 그러나 1703년 아프간인들이 동부에서 다시 문제를 일으키자, 기오르기 11세는 칸다하르와 조지아의 총독 겸 동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아프간 문제에 개입하게 됩니다.

1709

[미르와이스 호타크의 대반란]

칸다하르 총독 기오르기 11세의 잔혹한 통치에 분노한 아프간인들은 미르와이스 호타크를 중심으로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미르와이스는 메카 순례 중 페르시아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칙령(파트와)을 얻어냈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709년 4월, 아프간인들은 기오르기 11세를 살해하고 칸다하르를 장악했습니다.

기오르기 11세의 사파비 군대는 도적질과 아프간 여성 납치, 세금 인상, 시아파 강요 등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미르와이스는 술탄 후사인의 무능함을 간파하고 반란을 준비했으며, 사파비 정부는 무능하게도 단 두 명의 특사를 보내는 것으로만 대응했습니다.

1711

[사파비 진압군 전멸]

술탄 후사인은 기오르기 11세의 조카 호스로우 칸을 아프간 방면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호스로우 칸은 궁정 내 방해와 재정 부족으로 군대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년간의 전쟁 끝에 칸다하르를 포위했지만, 더위, 전염병, 보급품 부족으로 철군하던 중 아프간 반란군의 공격을 받아 사파비 진압군이 전멸했습니다.

이후에도 파견된 진압대 역시 계속 패배했습니다.

호스로우 칸은 겨우 군대를 꾸려 칸다하르를 포위했지만, 길자이족의 위장 평화 호소에 속아 넘어가면서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아프간인들은 완전 항복 요구에도 계속 싸웠고, 결국 사파비 군대는 보급 문제로 철군하다가 매복 공격을 받아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1722

[이스파한 포위, 굴나바드 참패]

1715년 미르와이스 사망 후 즉위한 마흐무드 호타크는 사파비 제국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아프간인들은 1720년 페르시아 심장부의 케르만을 함락시키고 1721년 시르반의 샤만키를 불태웠습니다.

마흐무드 호타크는 마침내 사파비 제국의 수도 이스파한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했고, 1722년 3월 8일 굴나바드 전투에서 사파비 군대를 처참히 격파했습니다.

술탄 후사인은 수도에서 포위 공격에 대비하는 대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요격에 나섰다가 대패했습니다. 그의 아들이자 왕세자인 타흐마스프만이 지방으로 탈출하여 군대를 모집하려 했습니다. 마흐무드의 이스파한 포위 공격은 1722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간 이어졌습니다.

[술탄 후사인, 항복하다]

마흐무드 호타크의 이스파한 포위 공격이 7개월간 지속되면서, 술탄 후사인의 무능력과 기근, 식량 부족으로 인한 폭동으로 도시 내부에서까지 반대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도시 주민 8만 명이 사망하는 지경에 이르자, 1722년 10월 23일 술탄 후사인은 성문을 열어 항복하고 마흐무드 호타크를 페르시아의 새로운 황제로 인정했습니다.

이는 사파비 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의미했습니다.

마흐무드는 처음에는 항복한 술탄 후사인을 호의적으로 대했지만, 곧 그가 왕위를 되찾으려 할까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마흐무드는 그를 제외한 모든 사파비 왕족 남성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술탄 후사인은 부상까지 입어가며 2명의 어린 왕자들만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1724

[러시아-오스만의 페르시아 분할]

페르시아가 아프간의 침공으로 혼란한 틈을 타, 북쪽의 러시아 제국과 서쪽의 오스만 제국은 1724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조지아, 아르메니아, 카프카스 지역을 서로 분할 점령했습니다.

이는 사파비 제국의 쇠퇴와 주변 강대국들의 개입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마흐무드 호타크는 이스파한 점령 후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다가 1723년 4월 25일 사망했고, 그의 아들 아쉬라프 호타크가 즉위했습니다. 아쉬라프는 오스만 제국의 '사파비 황실에게 페르시아를 돌려주라'는 서한에 격분하여 1726년 11월 15일 술탄 후사인의 목을 잘라 돌려주며 페르시아의 정당한 지배자가 자신임을 주장했습니다.

1729

[나디르 샤, 아프간 세력 축출]

아프간인들이 세운 호타키 왕조가 페르시아를 약 7년간 통치하던 중, 사파비 왕조에 복속한 튀르크계 아프샤르족의 군사 지도자 나디르 샤가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군사 전술로 러시아와 오스만 등 외세를 몰아내고, 1729년 담간 전투에서 호타키 군대를 궤멸시킴으로써 아프간 세력을 페르시아에서 완전히 축출했습니다.

나디르 샤는 1732년 레흐트 조약과 1735년 간자 조약을 체결하여 오스만과 러시아 사이에 분할되었던 페르시아 영토를 성공적으로 수복했습니다. 그는 사파비 제국과 그 영토가 재건된 1738년에 칸다하르의 호타키 왕조 마지막 거점을 정복했으며, 훗날 인도의 무굴 제국까지 침공하여 막대한 부를 약탈했습니다.

1736

[사파비 제국 멸망, 아프샤르 개창]

나디르 샤는 타흐마스프 2세와 아바스 3세 시기에 섭정을 겸하며 사실상의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영토를 수복하고 외세를 물리치며 제국을 재건했지만, 결국 이름만 남아있던 사파비 제국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페르시아의 황제 자리에 올라 아프샤르 제국을 개창했습니다.

이로써 225년간 지속되었던 사파비 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나디르 샤의 성공적인 원정은 그의 개인적인 명성과 아프샤르 제국의 기반을 굳건히 했습니다. 그의 치세 동안 아프샤르 제국은 동방의 대제국으로 성장했으나, 이는 사파비 왕조의 이름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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