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포위전
전쟁, 포위전, 보스니아 전쟁, 내전, 현대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36:10
현대 역사상 가장 긴 1 425일의 포위전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가 세르비아계 군대에 의해 약 3년 10개월간 고립되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기간 동안 민간인 5천 명 이상을 포함 약 1만 4천 명이 사망했으며 도시는 심각한 파괴를 겪고 인구가 급감했습니다. UN과 NATO의 개입이 포위전 종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전범 재판을 통해 책임자들이 처벌받았습니다. 스탈린그라드와 레닌그라드 포위전보다 긴 기록을 세우며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 독립 국민투표 실시
- 사라예보 결혼식 공격
- 보스니아 독립 선포 및 세르비아계 바리케이드
- 보스니아 전쟁 시작
- EU 보스니아 독립 인정 및 시위대 총격
- 사라예보 포격 시작
- 현대사 최장 포위전 시작
- 부수상 하키야 투라일리치 암살
- 사라예보 도시 파괴 상황
- 1차 마르칼레 학살 발생
- UN, NATO에 공습 공식 요구
- NATO 사라예보 주변 공습 명령
- NATO 팔레 탄약고 폭격
- 브르바냐 다리 전투
- 2차 마르칼레 학살 발생
- NATO 공습 작전 시작
- 세르비아군 중무기 철수 수락
-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 종료
- 정전 협정 체결
- 데이턴 협정 체결
- 사라예보 트램 공격
- 사라예보 포위전 공식 종료
- ICTY 갈리치 유죄 판결
1980
[요시프 티토 사망]
유고슬라비아를 억압적으로 통치하며 민족주의를 억제했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은 이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와 민족주의 갈등을 촉발하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1990
[보스니아 총선 실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최초의 다당제 총선이 열렸습니다.
공산당이 축출되고 세 민족 기반의 정당이 의회를 장악하며, 이는 민족 간 긴장 심화의 서막이 됩니다.
2차 선거는 11월 25일에 열렸다.
1991
[보스니아 자주권 선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위한 자주권 선언을 했습니다.
이는 세르비아계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내부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세르비아계 의원 국회 탈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인 민주당 소속 국회 의원들이 사라예보 국민의회를 탈퇴하고 독자적인 '세르비아계 의회'로 합류했습니다.
이는 3개 민족 연합 통치의 붕괴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92
[스릅스카 공화국 선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계 의회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계 공화국'으로 전환되며 사실상 세르비아계의 독립 국가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이후 8월에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독립합니다.
[독립 국민투표 실시]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독립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3월 1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대다수 세르비아인이 보이콧했음에도 63.4%의 투표율과 99.7%의 찬성으로 독립이 확정되었습니다.
[사라예보 결혼식 공격]
사라예보 시내에서 진행되던 세르비아인 결혼식이 공격을 받아 신랑의 아버지 니콜라 가르도비치가 사망했습니다.
이는 사라예보 포위전의 직접적인 도화선 중 하나로 꼽힙니다.
공격자가 무슬림이라는 소문과 결혼식 손님이 세르비아 국기를 흔든 것에 자극받아 공격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보스니아 독립 선포 및 세르비아계 바리케이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같은 날, 사라예보 의회 건물 근처에 세르비아 민병대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격수를 배치했으나 수천 명의 시민 시위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보스니아 전국에서 세르비아군과 정부군 사이에 산발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보스니아 전쟁 시작]
세르비아 준군사가 카프리냐 주위의 보스니아인-크로아티아인 마을을 공격하며 보스니아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브로드, 고라주데 등으로 공격이 확대됩니다.
[사라예보 경찰서 공격]
세르비아 민족 경찰관이 사라예보 경찰서를 공격한 후 내무부 사관학교를 공격하여 장교 2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도시 내 무력 충돌이 격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U 보스니아 독립 인정 및 시위대 총격]
유럽연합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독립국으로 공식 인정했습니다.
같은 날, 의회 건물로 행진하던 대규모 시위대에 무장 괴한이 총격을 가해 수아다 딜베로비치와 올가 수치치 두 젊은 여성이 사망했습니다.
이들은 포위전 최초 사망자로 기록됩니다.
미국은 그 다음날인 4월 7일에 독립국으로 인정했다. 이 사건 이후 그들이 살해당한 브라바냐 다리는 이후 그들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바뀌었다.
[사라예보 포격 시작]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사라예보 브라세의 사관학교 훈련소를 공격하고 박격포, 대포, 전차를 동원하여 시내 중앙과 구시가지를 무차별 포격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사라예보 공항도 점령했습니다.
보스니아 정부는 독립국으로 인정한 이후 국제사회가 평화유지군을 파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전쟁이 보스니아 전역으로 확대될 때까지 군사는 파견되지 않았다.
[공화국 의회 평화 집회 와해]
공화국 의회 건물 앞에서 평화 집회가 열렸지만, 할리데이 호텔에서의 총격으로 인해 집회가 와해되었습니다.
이는 평화적 해결 노력이 좌절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현대사 최장 포위전 시작]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군이 사라예보 도시 봉쇄를 시작했습니다.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식량, 의약품, 전기, 물, 난방 공급을 모두 막아버렸으며, 이로써 현대 역사상 가장 긴 1,425일간의 포위전이 막을 올렸습니다.
세르비아군은 사라예보 주변 고지대에 주둔하며 대포, 박격포, 전차, 대공포, 중기관총, 로켓 발사기, 지대공미사일, 저격총 등 다양한 무기로 도시를 공격했다.
[JNA 병사 공격 및 보복]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이 사라예보 도브로보랴츠카 거리에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병사를 공격해 최소 6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전날 보스니아 대통령이 유고슬라비아 경찰에 억류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추정됩니다.
[유엔 사라예보 공항 안전 지역 지정 요구]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포위전을 견제하기 위해 사라예보 국제공항을 안전 지역으로 편입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6월 말부터 유엔의 공수 물품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시민들의 생명줄이 되었습니다.
[사라예보 시장 포격]
사라예보 서쪽의 붐비는 시장에서 세르비아군이 포격하여 15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993
[부수상 하키야 투라일리치 암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부수상 하키야 투라일리치가 터키 대표단을 맞이하러 사라예보 공항에 가는 길에 세르비아계 군인에게 암살당했습니다.
UN 기갑 차량에 타고 있었음에도 살해당해 국제적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를 태운 UN 기갑 차량이 세르비아군에게 가로막히자, 세르비아군 장교가 그를 UN군에게 넘기라고 요구한 뒤 자동소총 7발을 발사하여 사망했다.
[축구 경기장 박격포 공격]
사라예보에서 열리던 축구 경기 도중 세르비아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11명이 사망하고 133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계속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물 보급 민간인 학살]
물 보급을 기다리던 민간인 12명이 세르비아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생필품을 구하려는 민간인까지 표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사라예보 도시 파괴 상황]
사라예보의 거의 모든 건물이 손상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약 35,000채의 건물이 붕괴되었고, 병원, 미디어 센터, 국립 대학 도서관 등 중요한 문화재와 시설도 포격으로 불에 타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국립 대학 도서관의 포격으로 기원전에 작성된 필사본 원고 700권 가량이 사라졌으며, 19세기 보스니아 문화 부흥 기간의 연속간행물 모음집도 소실되었다.
1994
[1차 마르칼레 학살 발생]
사라예보 시장에서 발생한 포격으로 민간인 68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당했습니다.
이는 단일 공격 사상 최대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국제 사회의 강력한 비판과 개입 요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UN, NATO에 공습 공식 요구]
1차 마르칼레 학살 직후,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는 NATO에 정식으로 공습 작전을 즉시 수행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는 국제 사회의 적극적인 개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NATO 사라예보 주변 공습 명령]
유엔의 요청에 따라 NATO 북대서양 위원회가 사라예보 주변 지역의 포병과 박격포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국가에 중무기 철수 최후 통첩도 보냈습니다.
그리스 한 국가만 폭격 지원을 거부했지만 폭격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사라예보 첫 사상자 없는 날]
NATO의 최후 통첩 이후, 사라예보에는 1992년 4월 이후 22개월 만에 처음으로 단 하루 사상자가 없는 날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국제 사회의 압박이 효과를 보였음을 시사합니다.
[VRS 무기 압수 및 NATO 대응]
스릅스카 공화국군(VRS)이 일리지야 지역의 무기 저장소에서 중무기를 압수하고 UNPROFOR 평화유지군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이에 NATO 미군 A-10 전투기 2대가 출격하여 세르비아군 표적에 기총 사격을 가했습니다.
[세르비아군 전차 대열 파괴]
세르비아군이 프랑스군의 병력 수송 장갑차를 공격하자 UNPROFOR은 NATO에 폭격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영국군의 재규어 전투기 2대가 출격하여 세르비아군의 전차 대열을 파괴했습니다.
1995
[NATO 팔레 탄약고 폭격]
보스니아 무슬림 세력의 공세에 대응하여 세르비아계가 유엔 무기 저장소에서 중무기를 약탈해 사라예보를 포격하자, NATO가 팔레 근처 세르비아군 탄약 저장소를 폭격하여 파괴했습니다.
이 작전에서 레이저 유도탄으로 무장한 미 공군의 F-16기와 에스파냐 공군의 EF-18기가 출격했다.
[브르바냐 다리 전투]
세르비아군이 수아다-올가 다리(브르바냐 다리)의 UN 관측 초소 프랑스군을 포로로 잡고 인간 방패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프랑스군이 다리 북쪽 끝을 기습하여 격렬한 교전이 발생, 양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프랑스군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세르비아군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 이후 세르비아군은 다리 남쪽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2차 마르칼레 학살 발생]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두 번째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포격으로 37명이 사망하고 90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NATO의 전면적인 군사 개입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NATO 공습 작전 시작]
2차 마르칼레 학살 직후, NATO 사무총장이 UNPROFOR 신속반응군 포병 공격을 지원하기 위한 공습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이는 대규모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같은 날, 프랑스군의 다소 미라주 2000이 팔레의 세르비아계군 지대공미사일(SAM)에 격추당했다.
[NATO-UN 세르비아군 최후통첩]
NATO와 UN이 사라예보 주변의 중무기 배타 지역에서 세르비아군에게 즉시 중무기를 철수시키고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9월 4일까지의 시한이 주어졌으나, 세르비아군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은 일시 중지되었다.
[NATO 재폭격 실시]
세르비아계 군이 최후통첩 기한까지 중무기 철수를 이행하지 않자, NATO는 사라예보의 세르비아계 군과 팔레 근처의 세르비아계군 지휘소를 다시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세르비아군 중무기 철수 수락]
세르비아계 군이 NATO와 UN의 요구에 따라 중무기 배타 지역의 중무기 철수를 포함한 모든 세르비아군의 철수 요구를 수락했습니다.
이는 포위전 종결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 종료]
세르비아계 군이 유엔의 명령을 이행할 것이라는 합의에 따라, NATO의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이는 보스니아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는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군 장군 베르나드 안토니오(UNPROFOR 지휘관) 및 미군 제독 레이튼 W. 스미스 주니어(CINCSOUTH)가 합의했다.
[정전 협정 체결]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이 연합하여 공세를 시작하고 세르비아군이 철수하면서, 포위전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도시의 전기, 난방, 물 공급이 재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데이턴 협정 체결]
보스니아 전쟁의 평화를 가져온 데이턴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는 사라예보 포위전의 실질적인 종결을 의미하며, 긴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996
[세르비아계 주민 대거 이주]
포위전 종료 후, 사라예보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 7만 명 이상이 무슬림 장악 지구에서 벗어나 소지품을 모두 가진 채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대거 이주했습니다.
이는 사라예보의 인구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노보사라예보 지역은 현 이스토치노사라예보가 되어 피난 간 대부분의 세르비아계인이 이곳에 살게 되었다.
[사라예보 트램 공격]
스릅스카 공화국군이 트램에 로켓 추진형 유탄(RPG)을 발사하여 55세 여성 1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는 사라예보 포위전 기간 중 마지막 충돌로 기록되었습니다.
동시에 세르비아군이 점유하고 있던 그르바비차에서도 수류탄이 투척된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평화이행군이 수색했으나 범인을 찾지 못했다.
[사라예보 포위전 공식 종료]
보스니아 정부가 세르비아계 군의 도시 완전 철수 후 사라예보 포위전의 공식 종료를 선언했습니다.
이로써 현대 역사상 가장 긴 1,425일간의 포위전이 마침내 종결되었습니다.
포위전 기간 동안 민간인 5,434명을 포함하여 총 13,952명이 사망했다. 포위전이 끝난 이후 사라예보 내의 생존자들은 300,000명에서 380,000명까지 줄어들었다.
2003
[ICTY 갈리치 유죄 판결]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가 사라예보-로마니아 군단의 초대 사령관 스타니슬라브 갈리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종신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는 사라예보 민간인 대상 테러 및 저격 작전 지시 혐의를 받았습니다.
갈리치는 포위 공격 기간 중 벌인 행위에 대해 인도에 반한 죄로 기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