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화가, 미술가, 탈인상주의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45:53
불운했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 평생 가난과 정신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단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생전에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으나 사후 그의 작품은 세계 최고가를 경신하며 시대를 초월한 예술혼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격정적인 삶과 예술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 빈센트 반 고흐 출생
- 동생 테오 출생
- 학교 자퇴
- 구필 화랑 헤이그 취직
- 런던 지점 전근 및 사랑 실패
- 파리 전근 및 해고
- 선교사 파견
- 보리나주 선교사 활동
- 화가의 길 시작
- 코넬리아 보스 청혼 거절
- 시엔 호르니크와 동거
- 시엔과 자녀 떠남
- 뉘넌 부모님께 합류
- 마고 베흐만 결혼 실패
- 아버지 테오도로스 사망
- 《감자 먹는 사람들》 완성
- 안트베르펜 이사 및 채색 연구
- 미술 아카데미 입학 마찰
- 파리 이사 및 예술가 교류
- 아니에르쉬르센 이사
- 폴 고갱과 친구 됨
- 파리 떠나 아를 이주
- 왼쪽 귀 일부 절단
- 생레미 정신병원 이송
- 밀밭에서 총격 자살 시도
- 라부 여인숙에서 사망
- 사후 파리 전시회 성공
- 아이리스 세계 최고가 경신
- 가셰 박사 초상 세계 최고가
1853
[빈센트 반 고흐 출생]
네덜란드 쥔더르트에서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년 전 사산된 형의 이름인 '빈센트 빌럼'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는 목사였고,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튀스는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빈센트'라는 이름은 미술상이었던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진 가문의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1857
[동생 테오 출생]
빈센트에게 평생 정신적, 경제적 후원자가 될 동생 테오도뤼스 테오가 태어났습니다.
빈센트는 여러 형제자매 중 테오와만 지속적으로 교류했습니다.
테오는 빈센트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이자 친구였습니다.
1860
[쥔더르트 학교 입학]
200여 명의 아이들이 다니는 쥔더르트 마을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빈센트는 어린 시절부터 진지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1861
1864
1866
[틸뷔르흐 중학교 전학]
제벤베르헌 학교를 졸업한 후 틸뷔르흐의 중학교로 보내졌습니다.
이곳에서 파리에서 성공한 예술가 콘스탄트 하위스만스에게 미술을 배웠습니다.
하위스만스는 기술보다 대상의 인상을 포착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으며, 어머니도 빈센트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권유했습니다.
1868
[학교 자퇴]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빈센트는 자신의 학창시절이 '엄숙하고 차갑고, 무균적'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1869
[구필 화랑 헤이그 취직]
큰아버지의 주선으로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 취직했습니다.
화랑에서 미술 교육을 받으며 상인의 길을 시작했습니다.
1873
[런던 지점 전근 및 사랑 실패]
런던 사우샘프턴가의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전근했습니다.
스무 살에 아버지보다 많은 돈을 벌 정도로 일에서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하숙집 딸 외제니 로이어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후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빈센트의 제수인 조 반 고흐 봉거는 이때가 빈센트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1875
[파리 전근 및 해고]
파리로 전근했으나, 미술상들이 미술품을 지나치게 상품화하는 것에 분개하여 결국 이듬해 해고되었습니다.
상인의 길과 맞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1876
[무급 교사 및 선교 시작]
영국으로 돌아가 램스게이트의 작은 기숙학교에서 무급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이후 선교단체에서 감리회 목사 조수로 일하며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설교도 진행했습니다.
빈센트는 이때도 적응하지 못하고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도르드레흐트 서점 취직]
집으로 돌아와 큰아버지 주선으로 도르드레흐트 서점에 취직했습니다.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낙서를 하거나 성경 구절을 번역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기독교에 몰두하며 수도승과 같은 경건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1877
[신학 입학 시험 준비]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족의 지원을 받아 암스테르담에서 이모부 요한네스 스트릭커의 지도 아래 신학 입학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1878
[선교사 파견]
신학 입학 시험에 실패하고 이모부의 집을 떠났습니다.
이후 브뤼셀 근교 라켄의 개신교 선교 학교 3개월 과정에 등록했지만, 전도사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벨기에 탄광지대 보리나주로 파견되었습니다.
1879
[보리나주 선교사 활동]
벨기에 보리나주 광산촌 쁘띠와스메스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활동했습니다.
가난한 신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하숙집을 노숙자에게 내어주고 작은 오두막으로 이사하여 짚을 침대 삼아 잠을 자는 등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선교 단체 시찰단은 빈센트의 생활 모습을 보고 성직자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며 해고했습니다. 빈센트는 브뤼셀까지 75km를 걸어 중재를 요청했고, 무급으로 선교를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
1880
[에텐으로 귀가]
부모님의 압력에 굴복하여 에텐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족은 빈센트의 정신 상태를 걱정했고, 아버지는 정신병원 입원을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화가의 길 시작]
다시 퀴엠으로 돌아가 10월까지 광부들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부터 성직보다 미술에 더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동생 테오의 제안에 따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장면에 대한 관심이 그림으로 이어졌습니다.
[미술 아카데미 입학]
테오의 권유에 따라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해부학, 소묘, 원근법을 배웠습니다.
빈센트는 원래 학교 교육을 싫어했지만, 테오의 설득에 응했습니다.
1881
[코넬리아 보스 청혼 거절]
이모부의 딸이자 미망인이 된 코넬리아 키 보스스트릭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했으나, '아니, 안돼, 절대'라는 단호한 거절을 당했습니다.
[격렬한 청혼]
코넬리아를 만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떠났습니다.
이모부는 빈센트의 집요함에 역겨움을 표했고, 절망한 빈센트는 '불꽃 속에서 내 손을 유지할 수 있는 동안만이라도 만나게 해달라'며 램프에 왼손을 집어넣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이모부는 빈센트의 경제력을 지적하며 코넬리아의 선택을 존중해달라고 했습니다.
[마우베에게 수채화 학습]
헤이그로 돌아와 외사촌 안톤 마우베에게 수채화를 배웠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갔지만, 교회에 가지 않겠다며 아버지와 크게 다툰 후 다시 헤이그로 떠났습니다.
마우베는 빈센트가 갈망했던 성공한 예술가였습니다.
1882
[화실 설립 및 마우베 불화]
유화를 배우고 화실을 세웠으나, 한 달도 안 되어 마우베와 불화가 생겼습니다.
마우베는 석고상을 모델로 삼으려 했지만, 빈센트는 돈이 없어 거리에서 사람들을 즉석으로 불러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엔 호르니크와 동거]
다섯 살 딸을 가졌고 임신 중이던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 클라시나 마리아 '시엔' 호르니크와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마우베는 빈센트와 연락을 끊었습니다.
빈센트는 시엔에게 이미 죽은 아이가 두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임질 발작 및 첫 유화]
임질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서 3주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후 테오에게 빌린 돈으로 첫 유화를 그렸고, 작품에 큰 만족감을 표현했습니다.
1883
빌럼은 훗날 빈센트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믿었지만, 만난 시기를 고려할 때 생부는 될 수 없었습니다.
[뉘넌 부모님께 합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노르트브라반트주 뉘넌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합류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림에만 몰두하며 직조공과 시골집에 대한 작품들을 완성했습니다.
1884
[마고 베흐만 결혼 실패]
이웃 마르호트 베흐만이 빈센트에게 구애하여 둘은 결혼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양가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자 마고는 독극물 음독자살을 시도했고, 빈센트가 급히 병원으로 데려가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수채화 여러 점과 유화 200점을 남겼으며, 주로 음침한 흙빛을 사용했습니다.
1885
[아버지 테오도로스 사망]
아버지 테오도로스가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습니다.
아버지 사망 이후 빈센트는 여러 정물화를 남겼습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 완성]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하고 수년간 작업한 농민 그림 여러 점을 파리의 테오에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판매가 잘 되지 않아 테오와 갈등을 겪었고, 테오는 빈센트의 그림이 너무 어둡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그림은 소박한 식사를 하는 농부 가족의 모습을 통해 시골 사람들의 가혹한 삶을 묘사하고자 한, 이 시기 가장 야심차고 유명한 작품입니다. 빈센트는 이 작품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첫 전시회 개최]
헤이그의 상인 루르스 가게 창문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습니다.
이는 빈센트의 첫 번째 작품 전시회였습니다.
[모델 소녀 임신 용의자]
빈센트의 그림 모델로 참여한 마을 농가 소녀 중 한 명이 혼외임신을 하자, 빈센트가 용의자로 지목되었습니다.
마을의 전임 성직자는 주민들에게 더 이상 빈센트의 그림 모델이 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안트베르펜 이사 및 채색 연구]
안트베르펜으로 이사하여 회화용품점 위의 집을 빌려 생활했습니다.
생활비는 빠듯했지만, 미술관에서 루벤스의 그림을 감상하며 채색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부둣가에서 일본의 우키요에 목판화를 구입하며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 시기 폭음을 시작했고, 이가 흔들릴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1886
[미술 아카데미 입학 마찰]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 아카데미 고등부에 입학했으나, 파격적인 화풍과 정규 교육에 대한 반골 성향으로 인해 샤를 베를라, 프란츠 빙크, 외젠 시베르트 교수와 연달아 마찰을 빚었습니다.
특히 밀로의 비너스 수업 중 플랑드르 농부의 벌거벗은 상체를 그리려다 시베르트 교수의 캔버스 훼손에 격렬히 분노하며 학교를 떠났습니다.
이후 교수진은 빈센트를 포함한 17명의 학생들을 유급시켰습니다. 시베르트가 고흐를 추방했다는 이야기는 낭설입니다.
[과로 등으로 입원]
과로, 부실한 식사, 과한 흡연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습니다.
매독 치료도 함께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파리 이사 및 예술가 교류]
아카데미를 떠나 파리로 이사했습니다.
몽마르트르에 있는 동생 테오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페르낭 코르몽 화실에서 공부했습니다.
이곳에서 존 러셀,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크탱,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등 당대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예술 사조를 접했습니다.
줄리앙 탕기 미술용품점에서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점묘화와 신인상주의 작품을 접했으며, 일본 우키요에 목판화를 수백 점 수집해 작업실 벽을 장식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아파트 이사]
빈센트와 테오는 르삑 54번지에 더 큰 아파트를 얻어 이사했습니다.
빈센트는 파리에 살면서 친구와 지인들의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1887
[아니에르쉬르센 이사]
동생 테오와 갈등을 겪다가 화해했습니다.
이후 파리 북서쪽 교외 아니에르쉬르센으로 이사하여 폴 시냐크를 알게 되었고, 점묘법을 채택하기 시작했습니다.
들라리바렛 미술관에서 아돌프 몽티셀리의 초상화를 본 후 더 밝은 색채와 대담한 붓질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폴 고갱과 친구 됨]
파리에 막 도착한 폴 고갱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해 말 베르나르, 앙크탱, 툴루즈로트레크와 함께 몽마르트르에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곳에서 베르나르와 앙크탱은 처음으로 그림을 판매했고, 빈센트는 폴 고갱과 작품을 교환했습니다.
카미유 피사로,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등 유명 화가들도 전시회를 방문하여 예술과 사회에 대한 논의에 참여했습니다.
1888
[파리 떠나 아를 이주]
2년 동안 2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리며 열정적으로 작업한 파리를 떠났습니다.
출발 몇 시간 전, 동생 테오와 함께 쇠라의 화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습니다.
남부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며 눈부신 색채에 대한 희망을 품었습니다.
[왼쪽 귀 일부 절단]
아를의 사창가에서 일하는 라헬(본명 : 가브리엘 베를라티에)에게 자신의 왼쪽 귀 조각을 건네주는 기이한 행동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빈센트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상징하는 유명한 일화가 되었습니다.
훗날 이 사건의 명칭을 딴 스페인 음악 그룹 '라 오레하 데 반 고흐'가 결성되기도 했습니다.
사창가 여성 라헬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피투성이가 된 고흐를 발견해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과다 출혈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그를 두고, 룸메이트였던 고갱은 동생 테오에게 전보를 치고는 황급히 아를을 떠났습니다. 아를 시립 병원(Hôtel-Dieu)으로 이송됨. 고갱은 고흐가 깨어나기 전에 떠났으며, 이후 두 사람은 영영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1889
[아를 주민들의 청원과 '노란 집' 폐쇄]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며 환각에 시달리자, 공포를 느낀 마을 주민들이 경찰에 청원서를 제출해 그를 강제 격리시켰습니다. 경찰은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노란 집'을 폐쇄했고, 고흐는 이웃들에게서 철저히 배척당했습니다.
약 30명의 주민이 서명한 청원서에는 고흐를 '위험한 광인'으로 규정하고 감금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김.
[생레미 정신병원 이송]
주민들의 냉대와 재발하는 발작 속에서 고흐는 스스로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정신 질환과 싸우면서도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걸작들을 탄생시켰습니다.
1890
[밀밭에서 총격 자살 시도]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밀밭에서 자신에게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미완성인 《나무 뿌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라부 여인숙에서 사망]
총격 후 이틀 만에 라부 여인숙에서 동생 테오 곁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사망 원인이 정말 자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1901
[사후 파리 전시회 성공]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이 전시된 이후, 그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는 사후에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87
[아이리스 세계 최고가 경신]
반 고흐의 그림 《아이리스》가 뉴욕 소더비즈에서 무려 5,390만 미국 달러에 팔리며 당시 세계 최고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위대한 가치를 지니는지 세상에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1990
[가셰 박사 초상 세계 최고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가셰 박사의 초상》 (첫 번째 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당시 약 580억원)에 일본 수집가에게 팔리며, 다시 한번 새로운 세계 최고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당시 낙찰가 7,500만 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었습니다.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습니다.
2020
[《봄 뉘넌 목사관 정원》 도난]
뉘넌 시기 작품인 《봄 뉘넌의 목사관 정원》이 싱어 라런 미술관에서 도난당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빈센트 반 고흐 작품의 지속적인 가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예술품 도난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