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

작가, 시인, 소설가, 극작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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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3: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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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
작가, 시인, 소설가, 극작가,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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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 소설가 극작가이자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 《레 미제라블》 《파리의 노트르담》 등 불후의 걸작을 남김. • 정치적 망명 중에도 창작에 매진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 정의를 노래. •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격동 속에서 변화를 주도한 선구적인 지성. • 말년에는 공화주의 옹호자로 국민적 영웅 대우를 받으며 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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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

[위대한 작가의 탄생]

프랑스 브장송에서 나폴레옹 군 고급 장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와 시 창작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10대 초반에는 '나는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프랑스 문학사의 거장이 될 것을 예고했다.

1822

[첫 시집과 결혼]

첫 시집 《송가집과 잡영집》을 간행하며 문단에 발을 들였고, 같은 해 결혼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 등 열정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1825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

프랑스 왕실로부터 작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시기부터 그는 문학 평론과 고전주의-낭만주의 논쟁에 적극 참여하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다.

1827

[낭만주의의 선언]

희곡 《크롬웰》의 서문을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며 낭만주의 작가들을 선도했다.

이 서문은 낭만주의 연극 이론의 선언서로 유명하며, 이후 《동방시집》, 《사형수 최후의 날》 등을 발표하며 자유주의적 경향을 뚜렷이 드러냈다.

이 시기,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지배하던 의고전파와 대립하며 낭만주의 운동에 참여, 자택에 젊은 작가와 화가를 모아 낭만파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낭만주의극은 영혼과 육체, 하늘과 땅, 숭고함과 그로테스크 사이의 대화를 극의 진수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존의 삼일치 법칙 폐지 등을 역설했다.

1830

[에르나니 논쟁 승리]

희곡 《에르나니》 초연을 둘러싸고 낭만파와 고전파 간에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싸움'이 벌어졌다.

위고는 고전파의 방해에 대비해 동지들을 동원했고, 테오필 고티에가 빨간 조끼를 입고 앞장선 이 일화는 유명하다.

이 싸움에서 낭만주의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이후 문단을 압도하게 되었다.

1831

[파리의 노트르담]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을 발표하며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며, 이후 《가을낙엽》, 《황혼의 노래》 등 다수의 시집과 희곡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841

[아카데미 프랑세즈 입성]

오랫동안 대망하던 프랑스 최고 권위의 기관,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다.

이는 그의 문학적 성취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1843

[절망의 시기]

희곡 《성주들》이 대중의 냉담한 반응으로 실패하고, 더욱이 신혼이던 맏딸 레오폴딘 부부가 보트 전복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로 인해 위고는 6개월간 펜을 들지 못할 정도로 깊은 좌절에 빠졌고, 이후 10여 년간 작품 활동을 거의 멈추고 정치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1848

[혁명과 인도주의]

프랑스 2월 혁명 등 격변하는 주위 정세에 자극받아 인도주의적 경향을 더욱 굳혔다.

이는 그의 후기 작품 세계와 정치적 신념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51

[정치적 망명 시작]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발하다 국외로 추방되어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에서 약 19년간의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이 힘든 시기는 오히려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징벌》, 《명상시집》 등 그의 걸작들이 탄생했다.

특히,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은 위대한 소설 《레 미제라블》(1862), 《바다의 노동자》(1866) 등 위고의 대표작 대부분이 이 망명 기간 동안 집필되었다.

1862

[세계적 걸작 《레 미제라블》]

전 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은 위대한 소설 《레 미제라블》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프랑스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역설하며, 출간 즉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위고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1870

[국민적 영웅의 귀환]

보불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자,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약 19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마치고 국민적 시인으로서 영예로운 만년을 보내게 되었다.

1881

[강렬한 유언]

죽음을 앞두고 '신과 영혼, 책임감'을 강조하며 교회의 기도를 거부하는 강렬한 유언장을 작성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남기며, 종교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었다.

위고는 그의 대표작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 미제라블》 등에서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아 그의 작품들은 한때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는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라며 자신만의 종교관을 피력했다.

1885

[위대한 거장의 영면]

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가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국장의 예를 받았고, 유해는 프랑스의 위인들이 잠든 팡테옹에 안장되며 그가 국가와 국민에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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