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레닌
혁명가, 정치인, 사상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3:49:49
- 러시아 혁명을 이끌고 볼셰비키 정권을 수립한 핵심 인물. -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 - 소비에트 연방의 초대 정부 수반으로서 전시 공산주의와 신경제정책을 주도. -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완고한 비타협심으로 러시아 공산화의 주역이 됨. - 수많은 지식인과 민중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20세기 역사에 큰 족적을 남김.
- 블라디미르 레닌 탄생
- 형의 죽음과 사상적 전환
- 대표 저서 출판
- '이스크라' 창간
- '무엇을 할 것인가' 발표
-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
- '피의 일요일' 이후 귀국
- 볼셰비키당 독립
- 제1차 세계 대전 반대
- 제국주의론 저술
- 2월 혁명 발발
- 혁명 전략 '4월 테제' 발표
- 혁명을 위해 귀국
- **세계 최초 사회주의 혁명 성공**
-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 수반**
- 제헌의회 해산
- 러시아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
- 암살 시도 중 피격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결성**
- 신경제정책(NEP) 추진
- 건강 악화와 권력 이양
- **소비에트 연방 수립**
- 스탈린에게 실권 이양
- 블라디미르 레닌 사망
- 스탈린의 권력 장악
1870
[블라디미르 레닌 탄생]
볼가강 연안의 심비르스크(현 울리야놉스크)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교육 수준이 높고 교양 있는 가정이었으며, 아버지 일리야는 농노의 아들로 교사이자 장학사를 지냈고 어머니 마리야는 독일계 러시아인 의사의 딸이었습니다.
1886
[아버지 사망]
레닌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사망하며,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이 시기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1887
[형의 죽음과 사상적 전환]
나로드니키 운동에 가담했던 맏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차르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처형당했습니다.
당시 17세였던 레닌은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마르크스주의와 반차르 운동, 혁명주의 세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카잔대학교 제적]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불법집회 참여를 이유로 제적되었습니다.
학교 측은 그가 불법집회의 주동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레닌의 형이 차르 암살 계획에 가담한 자'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1889
[마르크스주의자 선언]
대학교 재입학이 허용되지 않은 채, 같은 뜻을 가진 혁명세력가들과 어울리며 마르크스주의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탐독하며 정식으로 마르크스 원전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월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습니다.
1890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청강]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과에 정식 수강생은 아니지만, 청강생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1891
[사법시험 자격 획득]
청강생 신분으로 사법시험을 치를 수 있는 허가를 얻었습니다.
이후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으며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변호사 활동 시작]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1893년까지 가족이 살던 사마라에서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주로 토지 소유권 분쟁을 맡으며 농민과 지주에 대한 이해를 넓혔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의 참상을 목격하며 무료변론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895
[시베리아 유배 시작]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를 거쳐 슈센스케에서 5년간 유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약혼녀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레닌의 유배지까지 동행하여 헌신적으로 그를 도왔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연구]
마르크스 해석의 최고 권위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를 비롯한 러시아 망명가들을 만나기 위해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파리, 제네바, 취리히, 베를린 등을 방문하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벌였습니다.
공산주의 국가 건설에 대한 생각을 굳혔습니다.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조직]
상트페테르부르크 귀국 후, 마르크스주의 온건파 지도자 율리우스 L.
마르토프 등과 함께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조직했습니다.
파업 중인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전단을 작성하고 체포된 노동자들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체포 및 감옥 수감]
적극적인 혁명 활동으로 인해 '반차르운동'에 연루되어 제정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며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898
[유배지에서 결혼]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오랜 기간 헌신적으로 그를 도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결혼했습니다.
유배 생활 중 주요 저작인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했습니다.
[대표 저서 출판]
유배지에서 집필한 저서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블라디미르 일린'이라는 가명으로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농민 공동체를 급속히 와해시키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1900
[유배 석방]
서른 살이 된 레닌은 5년간의 시베리아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모스크바 남쪽 포돌스크로 이동했습니다.
[1차 해외 망명 시작]
러시아 내에서 반차르 운동을 계속하다가 5월에 서유럽으로 떠나면서 첫 번째 망명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스크라' 창간]
독일 뮌헨에서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등과 함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기관지인 '이스크라'(Iskra, 불꽃)를 창간하여 편집자로 활동했습니다.
이 신문은 러시아 지식인을 혁명운동으로 포섭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규합하는 목적을 가졌습니다.
1901
['레닌' 필명 사용]
레나강에서 이름을 딴 필명인 '레닌'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필명은 훗날 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1902
['무엇을 할 것인가' 발표]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써서 발표했습니다.
이 글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레닌을 혁명가 그룹의 문제적 인물로 부각시켰습니다.
1903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
런던과 제네바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당 대회에서 율리우스 마르토프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소수의 직업혁명가들이 지도하는 당을 주장한 레닌의 '볼셰비키'(다수파)와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을 주장한 마르토프의 '멘셰비키'(소수파)로 양분되어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레닌은 비밀경찰을 피하기 위해 소수의 직업혁명가들이 이끄는 중앙집권적인 당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마르토프는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처럼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조직을 선호했습니다. 이 노선 대립은 결국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두 개의 진영으로 완전히 나누게 되었습니다.
1905
['피의 일요일' 이후 귀국]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던 러시아로 귀국했습니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즉각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본격적인 혁명조직을 만들고 온건파 멘셰비키와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의 평화 시위를 제정 러시아 당국이 잔혹하게 진압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전국적인 항의와 파업을 촉발하며 러시아 혁명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1907
[2차 해외 망명 시작]
피의 일요일 사건이 누그러들 무렵, 러시아에서 친위 쿠데타가 발생하여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세력은 다시 해외 망명길에 올랐고, 이는 1917년까지 이어졌습니다.
1908
['유물론과 경험론' 발표]
기회주의자들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목적으로 '유물론과 경험론'을 발표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레닌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옹호하고 부르주아 철학의 관념론적 측면을 폭로했습니다.
1912
[볼셰비키당 독립]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의 당 대회를 소집하며 멘셰비키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고 볼셰비키당을 독립된 정당으로 만들었습니다.
['프라우다' 지도]
폴란드 크라코프로 이주하여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의 작업을 지도했습니다.
이는 망명 중에도 혁명적 선전 활동을 지속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914
[제1차 세계 대전 반대]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하게 반대하며, 제2인터내셔널 소속 유럽 공산주의 정당들이 자국 정부를 지원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국제인터내셔널 대신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창설을 호소했습니다.
1916
[제국주의론 저술]
스위스 망명 중 《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를 저술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제국주의 단계에 적응시키려 했습니다.
이 책은 전쟁의 실질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폭력혁명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이는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습니다..
레닌은 이 연구를 통해 제1차 세계 대전의 실질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개량주의자들이 왜 전쟁을 지원했으며, 왜 혁명만이 정당하고 민주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설명했습니다. 이 저서는 레닌주의의 핵심 이론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1917
[2월 혁명 발발]
굶주림과 추위, 전쟁에 지친 러시아 민중이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니콜라이 2세 황제를 몰아냈습니다.
이로써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케렌스키를 내각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혁명 전략 '4월 테제' 발표]
페트로그라드 도착 직후, 10개항으로 구성된 '4월 테제'를 발표하며 자신의 향후 구상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넘어 즉각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케렌스키 임시 정부 타도와 모든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을 촉구했습니다.
레닌의 '4월 테제'는 '우리는 혁명의 첫 번째 단계에 도달했으며, 이제 두 번째 단계로 도약할 때가 왔다. 2월혁명으로 수립된 공화국은 우리의 공화국이 아니며, 이 정부가 수행하는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자유주의 국가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필요하지 않다.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 이외에 그 어떤 정부도 필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무산층)독재'뿐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볼셰비키 내부에서조차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여겨졌습니다.
[혁명을 위해 귀국]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 중이던 레닌은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아 '봉인 열차'를 타고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습니다.
2월 혁명 소식을 예상치 못했던 그는 즉시 혁명의 흐름에 합류했습니다.
[핀란드 재망명]
볼셰비키의 무력시위가 케렌스키 임시 정부에 의해 진압된 후, 레닌은 '독일 제국의 스파이'로 수배되어 변장한 채 핀란드로 도피 망명했습니다.
은신처에서 '국가와 혁명'을 집필하며 무장봉기를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이 시기 레닌은 자본주의 발달이 더딘 러시아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로 구성된 전위당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며 마르크스 이론을 러시아 현실에 맞게 이론화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세계 최초 사회주의 혁명 성공]
볼셰비키 '적위대' 1,000여 명의 급습으로 케렌스키 임시 정부 타도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민심은 임시정부를 외면했고, 볼셰비키의 무혈 혁명은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레닌은 '모든 권세가 소비에트로 넘어왔음'을 선포하며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했습니다..
9월 들어 평화, 토지, 빵을 요구하는 볼셰비키의 주장이 전국적인 지지를 얻었고, 레닌은 비밀리에 페트로그라드에 잠입하여 무장봉기를 주장했습니다. 트로츠키의 협력을 얻어 조직된 적위대의 활약으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10월 혁명을 성공시켰습니다.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 수반]
10월 혁명 직후 열린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인 소브나르콤(인민위원평의회)이 탄생했습니다.
레닌은 평의회의 갈채 속에 인민위원 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정부 수반이 되었습니다..
레닌은 연설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실현되었고, 우리는 공산주의 체제 건설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10월 24일, 10월 25일의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었다.'고 선언하며 각종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1918
[제헌의회 해산]
자신의 집권을 바랐던 제헌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참패하자, 레닌은 두마(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일련의 조치 중 하나였습니다.
[러시아 공산당 개칭]
이듬해 레닌의 주도 하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위한 당의 정체성 확립을 의미했습니다.
[러시아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
구체제 장군들과 귀족들로 구성된 백군과 트로츠키가 지휘하는 볼셰비키 '적군' 간의 내전이 발발하여 소비에트 정권이 심각하게 위협받았습니다.
레닌은 내전 승리를 위해 '전시 공산주의'를 실행, 토지개혁과 공장, 은행, 철도 국유화 등 공산주의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서구 열강 세력의 지원을 받는 백군은 볼셰비키 정권을 위협했지만, 백군이 뚜렷한 제도나 정책 없이 '구체제'로의 회귀만을 목표로 하자 농민과 노동자들은 적군에 가담했습니다. 볼셰비키는 레닌의 지도 하에 국내외 반혁명 세력에 맞서 싸워 소비에트 국가를 지켜냈습니다.
[암살 시도 중 피격]
사회혁명당(SR) 좌익 세력 봉기가 한창이던 시기, 사회혁명당(SR) 당원인 파니 카플란이 쏜 총에 턱과 팔을 맞아 크게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부상 후유증은 그의 이후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볼셰비키의 숙청과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레닌은 총상 후유증과 누적된 과로로 말년에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주변의 반대 여론을 물리치고 독일 제국과 비밀리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퇴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발트3국, 핀란드 등을 독일에 양도해야 하는 치명적인 대가를 치렀습니다.
1919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발발]
신생 독립국가인 폴란드와 소비에트 연방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1921년 3월까지 이어졌습니다.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결성]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된 '제2인터내셔널'을 대신하여, 레닌은 '전쟁을 혁명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30여 개국 대표가 모인 모스크바에서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제3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을 결성했습니다. 이는 약소국 식민지 국가들의 무장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코민테른은 1920년 제2회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언하고, 비합법 조직의 병행, 식민지 독립 지원 등 구체적인 가입 조건을 규정하며 '세계 혁명'을 목표로 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최초이자 가장 강력한 연대 조직이었습니다.
1920
[코민테른 제2회 대회]
코민테른 제2회 대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언하고, 비합법 조직의 병행, 군대·농촌·노동자 조직, 의회에서의 활동, 식민지 독립, 민주적 집권주의 확립 등 구체적인 가입 조건을 규정하며 '세계 혁명'을 목표로 운동을 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921
[신경제정책(NEP) 추진]
폴란드와의 전쟁과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전시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신경제정책(NEP)을 추진했습니다.
공산화 정책을 완화하고 자본주의적 생산 방법을 일부 인정하여 시장 경제를 제한적으로 도입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 정책으로 토지 자유 거래와 민영회사의 설립, 남녀평등이 이루어졌으며, 농업 산출량은 크게 증대되어 10월 혁명 이전 수준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공업 분야의 회복은 상대적으로 더뎌 공산품 가격이 상승하는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한국 독립운동 지원]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국인 공산주의 지도자 한형권, 김립 등을 면담했습니다.
레닌은 그들에게 조선인들이 공산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민족주의 운동부터 한 다음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조언하며 200만 루블(당시 약 8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이 자금은 상하이 공산당의 이동휘가 보낸 한형권과 김립에 의해 분할 운송되었으나, 자금 분배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게 지불되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는 이들이 레닌에게 지원받은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김립을 사살했습니다.
[폴란드 전쟁 종전]
폴란드-소비에트 연방 전쟁이 '리가 평화조약'을 통해 종전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영토가 줄어들고 폴란드는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얻었습니다.
1922
[건강 악화와 권력 이양]
총상 후유증과 누적된 과로로 인해 고혈압이 발병하여 점차 권력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체카, GPU로 개칭]
볼셰비키 정권의 체제 수호와 공안을 책임지는 주된 무력 기관이었던 체카가 '국가정치부'(GPU)로 이름을 바꾸고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내무인민위원평의회(NKVD) 산하 조직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수립]
레닌의 창도 아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연방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혁명적 이상이 현실화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23
[스탈린에게 실권 이양]
잔병치레가 심화되면서 국정 관련 실권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전격 부여하고, 자신은 상징적인 소련 국가 원수 직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로써 스탈린이 약 1년간 국정 실권을 잡게 됩니다.
1924
[블라디미르 레닌 사망]
고혈압과 실어증이 겹치며 병상에 지내다가 뇌일혈로 향년 54세에 사망했습니다.
사망 전 스탈린의 해임을 명령했으나, 이 유언은 당 중앙위원회에서만 낭독되고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1927
[스탈린의 권력 장악]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당에서 추방하고 레닌을 우상화하여 자신이 정당한 지도자임을 확고히 했습니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초기부터 갈등이 있었고, 10월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에 가담했기 때문에 고참 볼셰비키들로부터 정통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이론이 레닌의 주장을 계승한 것이라고 강조하며 스탈린의 '타락한 관료주의 발로'를 비판했으나, 당내 권력 투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스탈린은 레닌의 시신을 보존 처리하여 붉은 광장에 전시하며 레닌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1943
[코민테른 해산]
레닌이 결성했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상징인 코민테른이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해산되었습니다.
이는 소련의 대외 정책 변화와 관련이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