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공국
공국, 중세 국가, 유럽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34:14
부르고뉴 공국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부르군트족에서 유래한 중세 프랑스 동부 공국입니다. 14세기부터 15세기 발루아부르고뉴가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프랑스 동부에서 독일 서부에 이르는 거대한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백년 전쟁의 승패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중앙 집권적 국가 기구를 갖춰 부르고뉴 국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유럽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던 강력한 공국이었습니다.
- 부르군트 왕국 멸망
- 보소, 부르고뉴 왕 선포
- 카페 가문, 부르고뉴 지배
- 두 부르고뉴 통일
- 카페 왕조 단절 및 공국 병합
- 필리프 2세, 부르고뉴 공국 하사
- 필리프 2세 결혼, 동군 연합 성립
- 샤를 6세 즉위와 숙부들의 통치
- 필리프 2세의 영지 상속
- 백년 전쟁 일시 휴전
- 필리프 2세 사망, 부르고뉴파 형성
- 오를레앙 공작 루이 암살
- 오를레앙파, 아르마냐크파로 재편
- 아쟁쿠르 전투, 프랑스 대패
- 용맹공 장 암살
- 앵글로-부르기뇽 동맹 체결
- 트루아 조약 체결
- 오를레앙 포위전
- 황금양모 기사단 창설
- 잔 다르크 체포
- 잔 다르크 화형
- 아라스 조약 체결
- 샤를 1세, 공위 계승
- 용담공 샤를 1세 전사
- 마리 여공, 대특허장 용인
- 긴가트 전투에서 프랑스군 격퇴
- 마리 여공 급사
- 아라스 조약 체결
- 프랑스의 부르고뉴 합병
- 프랑스 혁명, 부르고뉴 지방 재편
8
[카를 마르텔의 영토 편입]
샤를마뉴의 할아버지인 카를 마르텔에 의해 부르군트 왕국 영토가 프랑크 오스트라시아의 일부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써 부르고뉴 지역은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8세기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며 정확한 연월일은 불확실합니다.
534
[부르군트 왕국 멸망]
게르만 일파인 부르군트족이 세운 부르군트 왕국이 프랑크족의 침입으로 멸망했습니다.
이는 이후 부르고뉴 공국의 기반이 되는 지역의 초기 역사에 중요한 사건입니다.
561
[프랑크 왕국 분할]
프랑크 왕 클로타르 1세 사망 후,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면서 그의 아들 군트람이 옛 부르군트 왕국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879
[보소, 부르고뉴 왕 선포]
비엔누아의 통치자 보소가 오툉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부르고뉴 전 지역을 복속시키고 자신을 부르고뉴의 왕으로 선포하며 지역 독립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888
[루돌프 1세, 상부 부르고뉴 왕]
독일 벨프 가문의 루돌프 1세가 상부 부르고뉴의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이 왕국은 당시 현재의 스위스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923
[라울, 프랑스 왕으로 선출]
보소의 동생 리샤르의 아들 라울이 프랑스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지역의 인물이 프랑스 왕실의 중요한 자리에 오르게 된 사건입니다.
931
[루돌프 2세, 부르고뉴 지배]
루돌프 1세의 아들 루돌프 2세가 보소의 아들 맹인왕 루이와 조약을 맺어 손 강 서쪽 일부 지역을 제외한 부르고뉴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933
[프로방스 지배권 유지]
보소와 그의 후계자들이 프로방스 왕국(하부 부르고뉴)의 지배권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지역의 분할된 권력 구조를 보여줍니다.
936
[루이 4세, 부르고뉴 분할]
프랑스 왕 라울이 사망하자 카롤링거 계열의 루이 4세가 부르고뉴의 상스, 트루아, 랑그르 지역을 일시적으로 분할하여 통치했습니다.
1031
[카페 가문, 부르고뉴 지배]
프랑스 왕국의 일부가 된 부르고뉴 공국을 카페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 가문이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왕실의 강력한 동맹 세력이 되었습니다.
1032
[콘라트 2세, 부르고뉴 획득]
통일되었던 상부 부르고뉴와 하부 부르고뉴가 독일왕이자 황제인 콘라트 2세에게 넘어가며 부르고뉴의 지배권이 변경되었습니다.
1335
[두 부르고뉴 통일]
부르고뉴 공국과 시스쥐라 부르고뉴(프랑슈콩테)가 일시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이 통일은 훗날 다시 분리되지만, 잠시나마 부르고뉴의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1336
[잉글랜드 양모 수출입 금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와의 양모 수출입을 금지했습니다.
이는 플랑드르 경제에 큰 타격을 주어 반란의 원인이 되었고, 백년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1338
1345
[야코프 판 아르테벨더 사망]
플랑드르 반란의 주역이었던 야코프 판 아르테벨더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가 플랑드르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1346
[크레시 전투, 루이 1세 전사]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왕의 봉신이자 플랑드르 백작인 루이 1세가 전사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왕실과 플랑드르 백국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356
[필리프 2세, 푸아티에 전투 활약]
백년 전쟁 중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왕 장 2세의 막내아들 필리프 2세가 뛰어난 용맹을 보였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훗날 부르고뉴 공국을 하사받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합니다.
1361
[카페 왕조 단절 및 공국 병합]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요절하면서 카페 왕조의 부르고뉴 가문이 단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국왕의 직할령으로 병합되었습니다.
1363
[필리프 2세, 부르고뉴 공국 하사]
프랑스 왕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공로를 치하하여 막내아들 필리프 2세에게 부르고뉴 공국을 왕자령으로 하사했습니다.
이는 훗날 왕실과 부르고뉴 간의 갈등을 낳는 중요한 실책이 되었습니다.
1369
[필리프 2세 결혼, 동군 연합 성립]
부르고뉴 공 필리프 2세가 시스쥐라 부르고뉴(프랑슈콩테)와 플랑드르의 상속녀 마르가레트 3세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광활한 동군 연합이 성립되어 부르고뉴 세력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380
[샤를 6세 즉위와 숙부들의 통치]
11세의 광인왕 샤를 6세가 즉위하자, 호담공 필리프 2세를 비롯한 왕의 숙부들이 협동 통치 맹약을 맺고 프랑스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384
[필리프 2세의 영지 상속]
필리프 2세는 장인 사망 후 느베르, 르텔, 아르투아, 플랑드르, 프랑슈콩테 등 광대한 영지를 상속받았습니다.
이로써 부르고뉴는 프랑스 동부에서 네덜란드까지 이르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1385
[캉브레 이중 결혼]
필리프 2세의 장남 장과 딸 마르그리트가 바이에른 공작의 자녀들과 혼인하는 '캉브레 이중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의 외교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388
[샤를 6세 친정 시작]
샤를 6세가 친정을 시작하고 왕제 루이 등을 중용하면서, 호담공 필리프 2세와의 권력 대립이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392
[샤를 6세 정신장애 발작]
샤를 6세가 정신장애(유리 망상)로 발작을 일으키며 국왕의 통치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왕비 이자보와 왕제 오를레앙 공작 루이 등 오를레앙파가 세력을 키우게 됩니다.
1396
[백년 전쟁 일시 휴전]
파리에서 1426년까지의 전면 정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백년 전쟁이 일시적으로 휴전 상태에 들어섰습니다.
이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긴장 완화에 기여했습니다.
1404
[필리프 2세 사망, 부르고뉴파 형성]
호담공 필리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용맹공 장 1세가 부르고뉴를 계승하며 강력한 '부르고뉴파'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왕국 내의 새로운 권력 구도를 예고했습니다.
1407
[오를레앙 공작 루이 암살]
부르고뉴파가 정적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를 암살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왕국 내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파(아르마냐크파) 간의 내란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411
[오를레앙파, 아르마냐크파로 재편]
오를레앙파는 루이의 아들 샤를을 맹주로, 샤를의 장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를 중심으로 '아르마냐크파'로 이름을 바꾸고 무력 행사를 포함한 내란 양상으로 발전했습니다.
1413
[헨리 5세 즉위]
잉글랜드 왕 헨리 4세가 승하하고, 야심가 헨리 5세가 즉위했습니다.
헨리 5세는 이후 프랑스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백년 전쟁을 재점화합니다.
1415
[아쟁쿠르 전투, 프랑스 대패]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침공으로 아쟁쿠르 전투가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대패하며 오를레앙 공 샤를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프랑스 왕국 내 아르마냐크파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1418
[용맹공 장, 파리 입성]
용맹공 장이 파리에 입성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친잉글랜드 정책을 취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왕실의 권위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1419
[퐁투아즈 함락]
잉글랜드의 진격으로 부르고뉴파의 퐁투아즈가 함락되며 파리가 직접적인 위협에 놓였습니다.
이에 용맹공 장은 왕태자 및 아르마냐크파와의 화해를 모색하게 됩니다.
[용맹공 장 암살]
프랑스 왕태자 샤를과의 회담 자리에서 용맹공 장이 왕세자의 측근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와 부르고뉴 관계에 극심한 대립을 초래했습니다.
[앵글로-부르기뇽 동맹 체결]
용맹공 장의 뒤를 이은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잉글랜드와 '앵글로-부르기뇽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는 여동생 안과 베드퍼드 공작 존의 결혼을 포함한 강력한 동맹이었습니다.
1420
[트루아 조약 체결]
부르고뉴파의 주도로 프랑스 왕 샤를 6세와 잉글랜드 헨리 5세 간의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헨리 5세와 샤를 6세의 공주 캐서린이 혼인하고 샤를 왕태자가 폐적되었습니다.
이로써 잉글랜드-프랑스 이중 왕국이 수립될 것이었으나, 샤를 왕태자가 조약을 부정하면서 큰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1422
[샤를 6세 승하 및 헨리 6세 즉위]
프랑스 왕 샤를 6세가 승하했습니다.
이에 따라 생후 9개월의 헨리 6세가 잉글랜드-프랑스 이중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고, 샤를 왕태자는 트루아 조약을 부정했습니다.
1424
[네덜란드 승계 전쟁 시작]
선량공 필리프 3세는 프랑스 왕국 내 싸움보다 네덜란드 승계 문제에 중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국의 후계자인 자클린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1428
[델프트 화약 체결, 지배권 획득]
'델프트 화약'이 체결되어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국의 지배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의 북부 영토 확장에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오를레앙 포위전]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아르마냐크파의 주요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했습니다.
이는 백년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대규모 군사 작전이었습니다.
1430
[황금양모 기사단 창설]
선량공 필리프와 포르투갈 공주 이자벨의 혼례를 계기로 '황금양모 기사단'이 창설되었습니다.
이 기사단은 부르고뉴 귀족의 신분과 정체성을 상징하며 십자군 정신을 계승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잔 다르크 체포]
콩피에뉴 포위전에서 부르고뉴군이 잔 다르크를 사로잡아 동맹군인 잉글랜드에 넘겼습니다.
이는 프랑스군의 사기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잔 다르크의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1431
[잔 다르크 화형]
잉글랜드에 넘겨진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는 프랑스 민족주의와 국민 국가 열망이 고조되는 19세기 이후 재평가되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432
[네덜란드 영지 귀속]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등 세 백국의 모든 영지가 선량공 필리프에게 완전히 귀속되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의 영토를 더욱 확장하고 안정화시키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435
[아라스 조약 체결]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어 부르고뉴와 프랑스 왕가 간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조약은 용맹공 장 암살에 대한 사과와 부르고뉴 측에 유리한 양보 내용이 담겨있어, 프랑코-부르기뇽 동맹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467
[샤를 1세, 공위 계승]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야심가인 용담공 샤를 1세가 부르고뉴 공위를 계승했습니다.
샤를 1세는 세력 확대를 꾀하며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1474
[부르고뉴 전쟁 발발]
용담공 샤를 1세가 로트링겐 지방과 스위스 북서부로의 확장을 노리며 '부르고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그의 왕국 승격 야심을 보여주는 행보였습니다.
1476
[막시밀리안-마리 약혼]
용담공 샤를 1세가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적자 막시밀리안과 자신의 외동딸 마리를 약혼시켰습니다.
이는 부르고뉴의 왕국 승격과 황제위 야심을 위한 외교적 포석이었습니다.
1477
[루이 11세, 부르고뉴 영토 점거]
프랑스 왕 루이 11세가 용담공 샤를의 사망을 틈타 부르고뉴 공령(프랑슈콩테), 에노, 피카르디, 아르투아 등 주요 영토를 점거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분할의 시작이었습니다.
1477년 1월부터 6월 사이에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입니다.
[용담공 샤를 1세 전사]
용담공 샤를 1세가 낭시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그의 사망은 부르고뉴의 급작스러운 몰락과 프랑스, 합스부르크 가문의 개입을 불러왔습니다.
[마리 여공, 대특허장 용인]
용담공 샤를의 유일한 상속녀 마리 여공이 각 도시의 반발에 직면하여 '대특허장'을 용인했습니다.
이는 도시들의 특권을 인정하고 지지를 얻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마리 여공, 막시밀리안과 결혼]
마리 여공이 약혼자 막시밀리안과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부르고뉴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동맹을 통해 프랑스의 위협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후원자를 얻었습니다.
1479
[긴가트 전투에서 프랑스군 격퇴]
막시밀리안이 '긴가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며 부르고뉴의 통치를 안정화하려는 노력을 보였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침탈을 저지하는 중요한 승리였습니다.
1482
[마리 여공 급사]
마리 여공이 낙마 사고로 급사했습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부르고뉴 계승 전쟁을 재점화하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간의 새로운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아라스 조약 체결]
마리 여공의 급사 후,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어 막시밀리안은 프랑스 측에 영토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영토의 상당 부분을 프랑스에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483
[막시밀리안, 반격 개시]
막시밀리안이 프랑스군과 반란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며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내에서 그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485
[막시밀리안, 헨트 입성]
막시밀리안이 헨트에 입성하여 프랑스군과 반란군을 추방하고 '대특허장'에 의한 특권을 박탈했습니다.
이는 플랑드르 시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였습니다.
1491
[샤를 8세,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브르타뉴의 유일한 상속녀 안과 결혼하며 막시밀리안의 딸 마르가레트와의 약혼을 파혼했습니다.
이는 프랑스-합스부르크 관계에 새로운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1493
[상리스 조약 체결]
샤를 8세가 막시밀리안 1세와 '상리스 조약'을 맺고 프랑슈콩테를 오스트리아에 돌려주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계승 전쟁의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는 결과였습니다.
1678
[프랑스의 부르고뉴 합병]
프랑스가 부르고뉴를 최종적으로 합병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의 역사가 종언을 고했습니다.
이로써 오랫동안 이어져 온 부르고뉴의 독립적인 지위는 막을 내렸습니다.
1789
[프랑스 혁명, 부르고뉴 지방 재편]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면서 부르고뉴 지방은 코트도르, 손에루아르, 욘 등 3개 주로 재편성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는 유럽의 근대 국가 형성 과정의 일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