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 소설가, 번역가, 문학평론가, 반체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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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3: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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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 소설가, 번역가, 문학평론가, 반체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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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감성으로 대중을 사로잡은 천재 시인. 일제강점기와 북한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 평안도 방언과 토속적인 정서 이국적인 상상력이 어우러진 시풍으로 한국 모더니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음. 대표작 시집 《사슴》과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손꼽히며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을 선사하고 있음. 남한에서 오랫동안 잊혔으나 해금 조치 이후 그의 문학적 가치가 재조명되며 대중적 사랑을 다시 받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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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

일제 시대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난 백석.

사진작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오산고보 설립 기금 마련에 참여할 정도로 교육에 대한 열의가 깊었고, 서른여덟에 얻은 백석을 귀하게 여겼다.

백석의 아버지는 백시박에서 백영삼, 백영옥으로 개명했으며, 어머니 이봉우는 기생 출신 첩의 딸로 나이 차 많은 남성과 결혼하는 당시 평안도 풍조를 따랐다. 어머니의 뛰어난 음식 솜씨 덕에 오산학교 교장 조만식이 백석의 집에서 하숙하기도 했다.

1916

[본명 '백기행'으로 첫 개명]

다섯 살 되던 해, 그의 본명 '백기연'은 '백기행'으로 첫 개명되었다.

1934

[일본 아오야마 학원 졸업]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도쿄 아오야마 가쿠인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하며 유학 생활을 마쳤다.

[산문 발표, 작가 데뷔]

《조선일보》에 산문 〈이설(耳說) 귀고리〉를 발표하며 시대를 대표할 위대한 시인의 공식적인 작가 및 번역가 활동이 시작되었다.

1935

[첫 결혼, 이송저와 혼인]

우봉 이씨 이송저와 첫 결혼을 올렸으나, 이 결혼은 2년 만에 사별로 막을 내렸다.

1936

[첫 시집 《사슴》 출간 (한정판)]

그간 《조선일보》와 《조광》에 발표했던 시들과 새로 선보이는 시들을 모아 자비로 100권 한정판 시집 《사슴》을 출간했다.

시인 자신은 이 시집 외에 더 이상 시집을 출간하지 않아, 이 시집은 그의 유일무이한 공식 시집으로 남았다.

시집 《사슴》은 총 33편의 시를 4부('얼럭소새끼의 영각', '돌덜구의 물', '노루', '국수당 너머')로 나누어 수록했다. 판권지에는 '詩集 사슴 百部 限定版 定價 二圓'과 '著作兼 發行者 白石'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시집의 구조가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모방했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도 있다.

1937

[첫 아내 이송저와 사별]

결혼 2년 만에 첫 아내 우봉 이씨 이송저와 사별하며 짧은 첫 결혼 생활을 마쳤다.

1938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발표]

현실을 초월한 이상과 사랑에 대한 강렬한 의지, 그리고 소망을 노래한 아름다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발표했다.

이 시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대표작이다.

[두 번째 결혼, 장정옥과 혼인]

결성 장씨 장정옥과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그녀 또한 3년 후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1939

[연시 〈서행시초〉 발표]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를 여행하며 느낀 감회를 담은 연시 〈서행시초〉를 《조선일보》에 4회에 걸쳐 발표했다.

이 연시의 세 번째 시인 〈팔원〉에서는 어린 계집아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한국 민족의 비극적 삶을 형상화했다.

[연시 〈남행시초〉 발표]

경상남도 통영, 고성, 창원, 사천 등을 여행하며 느낀 감회를 담은 연시 〈남행시초〉를 《조선일보》에 4회에 걸쳐 발표했다.

이 시는 백석이 연정을 품었던 '란'이라는 여인과 함께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를 노래하고 있다.

〈통영〉에 등장하는 '란'을 두고 백석의 직장 동료 신현중과 혼사를 치르게 될 박경련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시인 안도현은 백석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란'이라고 부르겠다며 박경련을 떠올렸으나, 실제로 통영에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했다. 문학평론가 김재용은 '란'을 박경련으로 국한하는 것이 백석의 통영 관련 시를 연애 감정으로만 축소시킨다고 비판하며, 통영의 풍광과 역사를 알려준 박경련의 외사촌 오빠 서병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달진은 '란'이 20세기 바흐 재발견에 기여한 반다 란도프스카를 지칭하며, 그녀가 1933년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세계 최초로 녹음한 사실과 연결해 백석 시의 '란'을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1

[두 번째 아내 장정옥과 사별]

두 번째 아내 결성 장씨 장정옥과 결혼 3년 만에 사별하는 아픔을 겪으며, 그의 삶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942

[세 번째 결혼, 문경옥과 혼인]

남평 문씨 문경옥과 세 번째 결혼을 했으나, 이 관계는 5년 후 이혼으로 마무리되었다.

1946

[필명 '백석'으로 최종 개명]

광복 이듬해인 1946년부터 그는 '백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의 이름을 확정 지었다.

그의 이름 '석(石)'은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좋아해 따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본명은 백기연이었고, 1916년 '백기행'으로 한 차례 개명한 바 있다.

1947

[세 번째 아내 문경옥과 이혼]

세 번째 아내 남평 문씨 문경옥과 결혼 5년 만에 이혼하며, 연이은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겪었다.

1948

[북한서 반체제자로 낙인]

북한 정권 수립 이후, 과거 일제 시대 집필했던 시 〈고방〉, 〈노루〉 등의 문학적 내용으로 인해 반체제자로 낙인찍히며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이로 인해 그는 많은 문학적 활동을 하지 못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발표]

월간 《학풍》 창간호에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발표했다.

이 시는 백석의 후기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며, 북한 체제 아래서도 그의 문학적 세계를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백석은 이 시를 끝으로 《사슴》 외에는 더 이상 시집을 출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7

[리윤희와 마지막 결혼]

수안 이씨 리윤희와 네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을 했다.

리윤희에게는 이것이 첫 결혼이었으며, 이 결혼을 통해 백석은 3남 2녀의 자녀를 두며 비로소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자녀로는 장남 백화제, 장녀 백지제, 차남 백중축, 차녀 백가제, 삼남 백구가 있다.

1987

[남한 내 작품 해금 및 재조명]

남한에서는 그가 북한 시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작품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1987년 월북 및 재북 작가 해금 조치 이후 그의 많은 작품들이 활발히 소개되며 한국 문단에서 비로소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백석의 시는 평북 방언과 옛말을 사용하며 특유의 향토주의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자기 관조를 통해 한국 모더니즘의 또 다른 측면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96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

1964년경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한때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 결과 1996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 정권 아래서 반체제자로 낙인찍혀 쓸쓸하고 씁쓸한 말년의 후반기를 보냈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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