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작곡가, 전위 예술가, 플럭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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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8- 03: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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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예술가, 비디오 아티스트, 작곡가, 전위 예술가, 플럭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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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이자 전위 예술가이다.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첨단 기술을 결합하여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같은 위성 아트를 통해 전 세계를 연결하고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다다익선 설치 등 수많은 기록을 남기며 현대 예술사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새겼다. 그의 작품과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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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탄생]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이 서울 서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며 음악적 재능을 키웠고, 이는 훗날 그의 예술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서울 수송국민학교와 경기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습니다. 이때 한국의 작곡가 김순남을 사사했습니다.

1949

[해외 유학의 시작]

한국 전쟁 발발 직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기 전,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하며 해외에서의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국제적인 활동의 첫 발판이 됩니다.

1952

[도쿄대 입학, 예술의 씨앗]

일본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하여 미술사학과 미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이 시기, 작곡과 음악사학을 깊이 공부하며 그의 예술적 토대를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으며,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였습니다.

1956

[유럽으로 향한 예술혼]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 및 쾰른 대학교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폭넓게 공부하며 예술적 지평을 넓혔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선보일 파격적인 예술세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

뮌헨 대학교 입학 1년 후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웠습니다.

1958

[존 케이지와의 운명적 만남]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서 혁신적인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깊은 영감을 받습니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는 그의 철학이 백남준의 파괴적인 예술혼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9

[파격적인 첫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영감을 받은 그는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콜라주와 함께 피아노를 부수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이는 그의 전위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후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 등 충격적인 행위를 이어갔습니다.

1960

[플럭서스 운동의 핵심 인물]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과 의기투합하여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은 전위예술 운동 '플럭서스'의 핵심 멤버로 활동합니다.

'목적이 없는 자유, 실험을 위한 실험'을 모토로 이벤트, 퍼포먼스, 전위음악에 주력하며 유럽과 아시아, 미국 등 전 세계로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1961

[전자공학과의 운명적 만남]

작곡가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 참여하여 '머리를 위한 선율' 등 독특한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같은 해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하며 '사이버네틱스' 개념 하에 전자공학을 공부, 비디오 아트의 기술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합니다.

레이다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실패를 거울 삼아 2년여 동안 홀로 TV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실험했습니다.

1963

[세계 최초 비디오 아트 전시]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고 13대의 실험적인 TV를 통해 훗날 비디오 아트라 불리게 될 초기 형태를 세계 최초로 선보였습니다.

이는 미술사에서 비디오 아트의 시작점으로 기록되며,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불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 전시에서는 백남준의 즉흥음악, 무음악 발상에 기초한 실제 퍼포먼스 흔적과 더불어 TV를 비롯한 미디어로 새로운 예술 형태를 시도하는 작업이 공존했습니다. '적분된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레코드 샤슐릭'과 같은 실험적 음악과 '잘린 소머리', '파괴된 누드 마네킹', '보이스의 피아노 파괴 퍼포먼스' 등 우상파괴적 설치 및 참여예술 퍼포먼스가 함께 펼쳐졌습니다.

1964

[로봇 K-456과 뉴욕 입성]

일본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로봇 K-456'을 제작하며 로봇 예술의 가능성을 탐구한 후, 세계 예술의 중심지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뉴욕 언더그라운드 필름 운동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영상 작업을 시작, 비디오 아트의 가능성을 더욱 확장하게 됩니다.

1965

[교황 촬영, 비디오 아트의 상징]

소니의 세계 최초 휴대용 비디오카메라 '포타팩'으로 뉴욕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 그 영상을 곧바로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습니다.

이 사건은 한동안 미술사에서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67

[예술의 자유를 위한 투쟁]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과 함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무어먼이 누드 연주를 시도하다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파장은 결국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뉴욕의 법 개정을 이끌어내며 예술의 자유를 획기적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샬럿 무어먼과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TV 침대' 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예술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74

[비디오 아트의 새 지평을 열다]

비디오 아트를 설치 미술로 확장하며 'TV 붓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등 수많은 대표작을 선보였습니다.

같은 해 뉴욕 에버슨 미술관 개인전을 개최하고, 예술과 기술의 교차점을 다룬 저작 '비데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를 출판하며 미디어 아트 이론의 이해를 도왔습니다.

이 작품들은 비디오 아트와 생명의 상징을 전자적으로 결합하여 테크놀로지로 물든 현대 사회의 새로운 합성적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특히 'TV 붓다'는 그의 초기 비디오 설치의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졌습니다.

1982

[뉴욕을 사로잡은 백남준]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대규모 '백남준 회고전'을 개최하며 그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미국 사회에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뉴욕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1984

[전 세계를 연결한 예술 혁명]

조지 오웰의 암울한 미래 예언에 반박하며,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세계 최초 실시간 위성 생중계 아트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선보였습니다.

이 혁신적인 행사는 전 세계 2천 5백만 명이 시청하며 백남준을 대중스타 반열에 올렸습니다.

로리 앤더슨, 피터 가브리엘, 오잉고 보잉고,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앨런 긴즈버그, 이브 몽탕 등 세계적인 예술가와 대중문화 스타가 참여했으며, 샌프란시스코와 서울까지 연결된 국제적인 규모의 위성 아트였습니다.

[보이스와의 예술적 교감]

일본 도쿄 소게쓰홀에서 요셉 보이스와 공동 퍼포먼스 '코요테 콘서트 II'를 펼쳤습니다.

몽골의 늑대 울음소리와 초원의 달빛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며 두 예술가의 깊은 공동 관심사를 보여주었으나, 요셉 보이스의 죽음으로 이후의 퍼포먼스 계획은 미완으로 남았습니다.

1986

[동서 화합을 꿈꾸다]

동서양이 소통할 수 없다는 키플링의 주장에 반박하며 위성 아트 3부작 중 하나인 '바이 바이 키플링'을 선보였습니다.

이는 위성을 통한 전 세계 네트워크가 새로운 사회를 형성할 수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 시도였습니다.

1988

['다다익선'과 평화의 메시지]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여 국립현대미술관에 1003개의 TV를 쌓아 만든 18.5미터 높이의 초대형 작품 '다다익선'을 설치했습니다.

같은 해 위성 아트 3부작의 마지막인 '손에 손잡고'를 통해 전 세계 평화와 연대를 강조했습니다.

'다다익선'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다익선'은 지름 7.5미터, 무게 16톤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1992

['비디오 때, 비디오 땅' 전시 성공]

독일과 스위스에서 큰 성공을 거둔 '비디오 때, 비디오 땅'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렸습니다.

이 전시는 총 20만 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며 당시 과천관의 첫 번째 기록적인 전시로 남았습니다.

주요 작품은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입니다.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는 농업, 환경, 경제, 자서전 등 13개의 연작으로 설치된 작품입니다.

1993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되어 '문명의 동서남북'이라는 주제로 '칭기스칸의 복권', '마르크폴로' 등 비디오 로봇 작품들을 선보였습니다.

이 공로로 세계 최고 권위의 국가전시관 부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그의 예술적 위상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습니다.

이 전시에서 그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전자적 소통을 시도하는 비디오 로봇 형태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훈족의 왕 아틸라', '스키타이의 왕 단군', '로봇 전사', '고대기마인물상' 등이 있습니다.

1995

[한국 미술 국제화의 선구자]

제1회 광주 비엔날레의 성공적인 개최와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설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한국 미술이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국내외 160만 명이 관람한 광주 비엔날레 'INFO Art'전에도 직접 참여했습니다.

같은 해 그의 예술적 정수가 담긴 '일렉트로닉 수퍼하이웨이'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2000

[구겐하임 대규모 회고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백남준의 세계' 회고전이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그의 예술 여정을 총망라하는 동시에,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 최첨단 레이저 아트 작품을 선보이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예술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2006

[영원한 예술가의 별세]

미국 마이애미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 안치되었으며,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이자 세계적인 전위 예술가로서 전 세계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그의 삶이 마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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