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시대

역사 시대, 북유럽 문명, 해상 활동, 정복 시대, 교역 시대, 탐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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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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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3년부터 1066년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스칸디나비아 노르드인들이 활동한 시기. 뛰어난 항해술로 바다와 강을 이용해 교역 약탈 식민지화 정복 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 세계 최초로 북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했으며 잉글랜드 등지에 강력한 해상 제국을 건설하기도 함. 잔혹한 약탈자 이미지와 함께 무역과 기술 발전을 통해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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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레리크 무역 취락 건설]

발트해 남부 연안의 스칸디나비아 무역 취락인 레리크가 건설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슬라브 부족들의 정착 및 통합과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인과 슬라브인 간의 교역이 활발했습니다.

레리크는 700년 무렵에 세워졌으나, 오보트리티족과 데인족 간의 전쟁 이후 상인들이 하이타부로 재정착하면서 사라졌습니다.

750

[쿠로니아인 침략 전투]

덴마크와 스웨덴의 전설적인 왕 시구르드 흐링그가 스웨덴 남부를 침입한 쿠로니아인과 크벤란드인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들은 호전적인 전사이자 뛰어난 선원으로, 스웨덴과 덴마크 바이킹들과 동맹을 맺기도 했습니다.

노르나-게스트 사가(Norna-Gests þáttr)에 따르면, 시구르드 흐링그는 쿠로니아인과 크벤란드인으로부터 그의 땅 스웨덴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알데이갸 스칸디나비아 정착]

스칸디나비아 정착자들이 알데이갸(라도가)에 정착하며 초기 루스인 민족 집단 형성에 기여하고 루스 카간국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동유럽의 무역로를 개척했습니다.

알데이갸에 정착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후에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역의 루스인 형성과 키예프 루스 건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789

[잉글랜드 최초 바이킹 침입]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잉글랜드 도싯의 포틀랜드섬에 데인족 집단이 방문했습니다.

이들은 왕실 관리들을 상인으로 오인했지만, 데인족은 교역세 지불 요청에 관리들을 살해했습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는 이 사건이 787년으로 잘못 기록되었으나 실제로는 789년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건은 브리튼 제도에서 바이킹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 중 하나입니다.

790

[프랑스 최초 바이킹 침략]

프랑스 서부 연안을 따라 바이킹들의 최초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겨울을 보낸 뒤 여름에 주로 침입이 이뤄졌습니다.

경건왕 루이 집권기에는 프랑키아에 의해 격퇴되기도 했습니다.

바이킹들은 왕가 간의 분쟁으로 약화된 프랑키아 남서부(가스코뉴)에 자신들의 첫 정착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향후 노르망디 공작령 형성의 기반이 됩니다.

793

[린디스판 수도원 약탈]

노섬벌랜드 해안가에 위치한 학문의 중심지 린디스판 수도원이 바이킹의 공격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으며, 교회의 보물들이 약탈당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바이킹 시대'의 시작으로 간주됩니다.

이 사건은 '주여, 저희를 노르드인들의 분노에서 구해주소서'라는 기도문이 생기게 할 만큼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전에 브리튼섬에서 이런 두려움이 나타난 적은 결코 없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794

[아이오나섬·아일랜드 약탈]

린디스판 교회 본청인 아이오나섬에 심각한 바이킹 공격이 발생했습니다.

이어서 795년에는 아일랜드섬 북부 해안에서도 약탈이 일어났습니다.

이 초기 공격들은 바이킹의 활동 범위가 브리튼 제도 전체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일랜드 해안을 따라 수도원 거점들이 약탈의 주요 대상이 되었습니다.

795

[아일랜드 수도원 약탈 시작]

게일 아일랜드 해안가를 따라 소규모 바이킹 무리들이 수도원 거점들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아일랜드에 대한 지속적인 침략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 시기 바이킹들은 아일랜드 해안가를 탐색하며 약탈을 위한 기지를 모색했습니다.

801

[유틀란트 중앙 정권 수립]

유틀란트에서 강력한 중앙 정권이 수립되었고, 데인인들은 무역, 약탈, 정착을 위한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바이킹 팽창의 내부적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덴마크 지역의 정치적 통합은 노르드인들의 외부 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면서 외부 활동에 필요한 자원과 조직력이 갖춰졌습니다.

802

[아이오나섬 수도원 재파괴]

아이오나섬이 바이킹의 재침입을 받아 켈리데 공동체 교우들이 대량 학살되고 수도원이 불태워지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아이오나섬은 794년에 이어 또 다시 바이킹의 표적이 되었으며, 이는 바이킹의 약탈이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었음을 보여줍니다.

821

[호스 지역 약탈과 여성 포획]

얼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바이킹들이 아일랜드 호스(핑걸주)를 약탈하고 수많은 여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이는 바이킹 약탈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바이킹들은 단순한 재물 약탈을 넘어 인력까지 노예로 확보하는 잔혹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839

[픽트 왕국 핵심부 침공]

대규모 바이킹 함대가 스코틀랜드 테이강과 언강을 통해 픽트 왕국의 심장부인 포르트리우에 침입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픽트족의 왕 오가넌 막 옹구사, 그의 형제 브란, 스코트족의 왕 아드 막 보안터 등 많은 픽트족 귀족 계층이 패배하고 전사했습니다.

픽트족 지도층의 붕괴는 100년 이상 안정적이었던 왕국 체제를 무너뜨렸으며, 키나드 1세 막 알핀의 즉위에 영향을 미쳐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840

[아일랜드 '롱포트' 건설 시작]

바이킹들이 아일랜드 해안가에 '롱포트'라 불리는 요새화된 야영지를 짓고 처음으로 겨울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바이킹들이 일시적인 약탈을 넘어 영구적인 거점 확보를 시도했음을 보여줍니다.

최초의 롱포트는 더블린과 린 두아샤일에 건설되었으며, 이를 통해 바이킹들은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아마, 클론먹노이즈, 글렌달로그 등 대규모 수도원 거점을 약탈했습니다.

[프랑스 루앙·쥐미에주 침입]

프랑스 루앙과 쥐미에주 지역이 바이킹 침입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바이킹들은 수도원에 보관된 재산을 노리고 수도사들의 취약한 방어 능력을 이용했습니다.

이 침입은 바이킹들이 프랑스 내륙의 강을 따라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당시 프랑키아는 왕가 간의 분쟁으로 약화되어 바이킹의 표적이 되기 쉬웠습니다.

842

[스페인 북부 바이킹 침입 시작]

바이킹들은 프랑스 루아르강 하구에 영구 거점을 확보한 뒤, 스페인 북부까지 원정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들은 카디스 등 스페인 주요 도시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바이킹들은 아스투리아스나 코르도바 군대에 격퇴당하기도 했지만, 알안달루스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유지하며 활동했습니다.

844

[리스본 바이킹 침공]

많은 수의 드라카르가 타구스강 하구에 나타나 리스본(당시 라슈부나)을 공격하고 정복했습니다.

알라 이븐 하즘과 도시 거주민들의 저항으로 13일 뒤에 떠났습니다.

이 침공은 바이킹들이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통치 지역까지 원정 공격을 감행했음을 보여줍니다. 966년에도 리스본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이 있었으나 실패했습니다.

845

[바이킹 파리 진출]

바이킹 원정대가 센강을 거슬러 올라 프랑스 파리에 도달하여 도시를 위협했습니다.

이는 바이킹의 내륙 침투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아일랜드에서 발견된 카롤링거 드니에르 주화는 이 시기 바이킹 침입에 의한 약탈을 시사합니다. 파리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바이킹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바이킹 족장 토르게스트 전사]

바이킹 족장 토르게스트가 아일랜드섬 중부 지역 전체를 침입했으나, 말 세크날 1세에게 전사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아일랜드 바이킹의 초기 활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토르게스트의 죽음은 아일랜드인들의 바이킹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850

[잉글랜드 최초 겨울 체류]

바이킹들이 잉글랜드 켄트주의 테닛섬에서 처음으로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는 일시적인 약탈을 넘어 장기적인 점령과 활동을 위한 기반 마련을 시도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주로 여름에만 활동하던 바이킹들이 잉글랜드에서 겨울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침략은 더욱 체계적이고 광범위해졌습니다. 이는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853

[더블린 왕국 최초 왕 즉위]

바이킹 지도자 아믈리브(올라프)가 최초의 더블린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형제인 이마르, 오슬러와 함께 더블린을 다스리며 아일랜드 내 바이킹 왕국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아믈리브의 즉위는 아일랜드에 바이킹의 영구적인 정치적 지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더블린은 이후 서유럽 최대의 노예 교역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854

[잉글랜드 셰피섬 겨울 체류]

바이킹 약탈 무리가 템스강 어귀의 셰피섬에서 잉글랜드에서의 두 번째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는 바이킹의 잉글랜드 체류가 일회성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바이킹의 장기 체류는 잉글랜드 방어 체계에 큰 부담을 주었으며, 이후 대규모 바이킹 군세의 침공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859

[류리크 노브고로드 지배 시작]

류리크가 동쪽으로 확장하여 노브고로드(홀름가르드) 주변에 정착하며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루스 카간국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키예프 루스 건국의 기반이 됩니다.

류리크의 등장은 동유럽에서 바랑기아인(스웨덴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후손들은 키예프를 수도로 하는 동슬라브족 국가인 키예프 루스를 세우게 됩니다.

860

[이탈리아 루니 항구 약탈]

뵤른 야른시다와 하스타인이 이끄는 바이킹 함대가 이탈리아 루니 항구 도시에 상륙하여 약탈을 감행했습니다.

이후 아르노강을 따라 피사, 피에솔레까지 약탈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의 바이킹 활동은 북유럽을 넘어 지중해 지역까지 이들의 해상 활동 범위가 확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당시 바이킹의 뛰어난 항해술을 입증하는 사례입니다.

862

[바랑기아인 재초청]

핀족 및 슬라브족 부족들이 루스인에 반기를 들어 스칸디나비아로 몰아냈으나, 곧 내분에 휩싸여 평화를 위해 류리크가 이끄는 바랑기아인들을 다시 초청했습니다.

이 사건은 동유럽 지역에서 바랑기아인들이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류리크와 그의 형제들은 노브고로드 주변에 정착하며 통치를 시작했습니다.

864

[테닛섬 바이킹 겨울 체류]

바이킹들이 잉글랜드 테닛섬에서 다시 겨울을 보냈습니다.

이는 잉글랜드 해안 지역에 대한 바이킹의 반복적인 장기 체류를 의미합니다.

잦은 겨울 체류는 바이킹이 잉글랜드 영토 내에서 약탈을 지속하고, 거점들을 강화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866

[아드 핀들리어흐의 롱포트 소각]

아일랜드 아드 핀들리어흐가 아일랜드 북부에 있던 모든 바이킹의 롱포트(요새화된 야영지)를 불태웠습니다.

이는 바이킹이 이 지역에 영구적인 거점을 확보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 사건은 아일랜드인들의 바이킹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함께, 바이킹의 아일랜드 정착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867

[이교도 대군세의 잉글랜드 침공]

이교도 대군세가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 도착하여 노섬브리아를 침공하고 요크를 점령했습니다.

이들은 요르비크에 바이킹 공동체를 건설하고 일부는 농부와 수공업자로 정착했습니다.

잉글랜드 왕국 대부분은 이에 맞설 수 없었습니다.

노섬브리아는 라그나르손 형제들에게 정복되어 데인로의 북부 왕국이 되었으며, 이는 바이킹의 잉글랜드 내륙 점령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요크는 바이킹 문화의 중심지가 됩니다.

870

[알트클리트 요새 함락]

클라이드만 인근 브리튼족들이 바이킹 공격을 받았습니다.

알트클리트(덤바튼 요새)가 바이킹 왕 아믈리브와 이마르에게 포위되어 함락당했으며, 많은 수의 브리튼족, 픽트족, 잉글랜드인 포로들이 아일랜드로 수송되었습니다.

알트클리트 함락은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이후 재건된 왕국의 수도는 클라이드강을 따라 거번 및 퍼틱 지역으로 옮겨져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으로 존속하게 됩니다.

871

[애시다운 전투 발생]

잉글랜드 웨식스 왕국을 침공한 바이킹 연합군과 앨프레드 대왕이 이끄는 웨식스군 사이에 애시다운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바이킹 지도자 바그세크가 전사했습니다.

바그세크의 전사는 바이킹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웨식스의 앨프레드 대왕은 그의 왕국에서 바이킹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875

[미발왕 하랄의 스코틀랜드 군도 정복]

미발왕 하랄이 노르웨이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에 반대하던 이들이 달아난 스코틀랜드 군도를 침공했습니다.

그는 반란군들을 제압하고 독립적이던 야를들을 그의 지배하에 두었습니다.

하랄은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군도 지역 및 본토 영토 일부와 맨섬까지 세력하에 두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반란군들이 아이슬란드로 도망쳤습니다.

876

[케틸 뵤른손의 군도 지배]

맨섬과 헤브리디스섬의 노르드게일인들이 미발왕 하랄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케틸 뵤른손이 이끄는 함대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케틸은 하랄의 봉신으로서 수드레위야르를 다스리게 됩니다.

이후 케틸의 손자인 적발의 토르스테인과 오크니 백작 전능한 시구르드는 스코틀랜드를 침입하여 거의 절반에 달하는 지역에서 공물을 받아냈습니다.

884

[노르디티 전투 바이킹 패배]

독일 북해 해안에서 덴마크 바이킹 병력이 브레멘 함부르크 대주교 림버트가 이끄는 프리슬란트인 군대에 패배했습니다.

이 패배로 인해 바이킹들은 동프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됩니다.

이 전투는 동프리시아에서 바이킹의 영향력을 영구적으로 종식시킨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는 바이킹이 모든 전선에서 성공적이지는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885

[파리 공방전 바이킹 격퇴]

파리의 외드(Eudes de Paris)가 886년까지 지속된 바이킹의 파리 공방전에서 성공적으로 도시를 방어했습니다.

그의 군사적 성공은 카롤링거 왕조를 대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리 공방전은 바이킹의 강력한 침략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효과적으로 방어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기록됩니다. 외드의 영웅적인 방어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893

[버팅턴 전투 바이킹 격퇴]

웨일스 포이스에서 머시아의 애설레드가 이끄는 웨일스-머시아 연합군이 데인족 부대를 버팅턴 전투에서 완전히 격퇴했습니다.

이는 웨일스에 대한 바이킹 침입이 좌절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웨일스는 잉글랜드 동부만큼 바이킹에 의해 심하게 식민화되지는 않았지만, 해버퍼드웨스트 등 남부 지역에는 노르드인들의 정착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902

[더블린 바이킹 축출]

더블린에 정착해 있던 바이킹들이 아일랜드인에 의해 축출되었습니다.

이는 더블린 바이킹 왕국이 일시적으로 붕괴했음을 의미합니다.

바이킹들은 914년에 이바르 가문의 주도로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와 더블린 지배권을 회복하고 워터포드, 웩스포드 등 주요 도시들을 건설하게 됩니다.

911

[노르망디 공작령 설립]

바이킹 무리가 샤르트르를 점령하려 했으나 프랑스의 로베르 1세에게 패배했습니다.

이후 롤로는 단순왕 샤를과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맺어 루앙과 오트노르망디 지역을 받고 노르망디 공작령을 세웠습니다.

롤로는 샤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며 다른 바이킹 집단의 침입으로부터 북부 프랑스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는 바이킹 정착자들이 프랑스 문화에 동화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914

[바이킹 아일랜드 귀환]

902년에 축출되었던 바이킹들이 이바르 가문의 주도로 아일랜드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후 바이킹들은 아일랜드인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더블린 지배권을 회복했습니다.

이들은 워터포드, 웩스포드, 코크, 리머릭 등 아일랜드 최초의 대도시들을 세웠습니다. 특히 바이킹 지배하의 더블린은 서유럽 최대의 노예 교역항이었습니다.

947

[피도끼 에리크 요크 점령]

피도끼 에리크가 이끄는 새로운 바이킹 세력이 잉글랜드에 나타나 요크를 점령했습니다.

이는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요크는 이미 바이킹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새로운 바이킹 세력의 등장은 잉글랜드 왕국의 통일 노력에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966

[리스본 바이킹 재공격 실패]

리스본에 대한 바이킹의 또 다른 공격이 있었으나 이번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바이킹 세력의 침투가 쉽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리스본은 844년에 바이킹에 의해 정복된 경험이 있었으나, 이후 도시의 방어 체계가 강화되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980

[타라 전투 더블린 바이킹 패배]

말 세크날 막 돔날이 타라 전투에서 더블린의 바이킹들을 패배시키고 굴복시켰습니다.

이는 아일랜드 바이킹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후 30년간 브리안 보루마는 바이킹 영역들을 제압하고 아일랜드의 지고왕에 올랐습니다. 이는 아일랜드에서 바이킹 세력의 약화를 가속화했습니다.

986

[바이킹 북아메리카 대륙 최초 도달]

뱌르니 헤룔프손, 레이프 에이릭손, 토르핀 카를세프니 등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500년 앞서 북아메리카 본토에 도달했습니다.

이들은 빈란드라 불리는 곳에 정착하려 했으나 원주민과의 분쟁과 지원 부족으로 몇 년 만에 실패했습니다.

오늘날 뉴펀들랜드섬에 있는 랑스 오 메도즈 유적지는 이들의 정착 흔적을 보여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탐험 기록입니다.

995

[스웨덴 바이킹 시대 전환 시작]

스웨덴의 올로프 솃코눙 왕의 재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기독교도 스웨덴인 왕이었으며, 오늘날 스웨덴 남부와 중부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커져 바이킹 시대에서 중세 시대로의 전환기를 이끌었습니다.

올로프 솃코눙의 통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기독교 수용과 왕권 강화로 바이킹 시대가 종결되는 흐름의 일환이었습니다. 노르드인들의 전통 신앙은 12세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996

[노르망디 바이킹의 프랑스화]

노르망디의 용담공 리샤르 1세 재위가 끝날 무렵, 노르망디에 거주하던 모든 바이킹 후손들이 기독교화되고 근본적으로 프랑스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바이킹 문화의 현지 동화를 보여줍니다.

노르만인들은 중세 동안 서유럽의 강력한 봉건 국가 중 하나를 세웠으며, 11세기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고 십자군 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999

[글렌마마 전투 바이킹 패배]

더블린 바이킹들은 렌스터 왕국과 함께 브리안 보루마에 맞서 두 차례 봉기했으나, 글렌마마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이는 아일랜드 내 바이킹 세력의 약화를 가속화했습니다.

더블린 바이킹들은 이후 클론타프 전투(1014)에서도 패배하며, 아일랜드 강력한 왕들의 세력에 더 이상 단독으로 위협을 줄 수 없게 됩니다.

1003

[스웨인 포크비어드 잉글랜드 침입]

덴마크의 스웨인 포크비어드 왕이 잉글랜드에 대한 수 차례의 침입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스웨인의 침입은 1013년에 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일부의 왕이기도 했습니다.

1013

[스웨인 포크비어드 잉글랜드 왕 즉위]

덴마크 왕 스웨인 포크비어드가 대규모 침입 끝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최초의 덴마크인이었습니다.

스웨인의 죽음 이후 잉글랜드 왕위는 웨식스의 철벽의 에드먼드에게 넘어갔으나, 스웨인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다시 잉글랜드를 정복하게 됩니다.

1014

[클론타프 전투 바이킹 패배]

브리안 보루마가 더블린 바이킹-렌스터 연합군을 클론타프 전투에서 물리쳤습니다.

이 전투 이후 더블린 바이킹은 아일랜드 왕국의 강력한 세력에 단독으로 위협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클론타프 전투는 아일랜드 내 바이킹 세력의 결정적인 약화를 가져왔으며, 브리안 보루마의 지고왕으로서의 권위를 강화했습니다. 이 전투 이야기는 '아일랜드인들과 외부인들의 전쟁'에 기록되었습니다.

1015

[스페인 투이 도시 약탈]

바이킹 함대가 미뇨강으로 진입하여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주교 관리 도시 투이를 약탈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1070년까지 투이에 새로운 주교가 임명되지 못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바이킹의 영향력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바이킹은 해안 도시와 강을 따라 내륙으로 침투하며 약탈 활동을 벌였습니다.

1016

[크누트 대왕의 북해 제국 건설]

스웨인 포크비어드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며 대정복을 이뤘습니다.

그는 덴마크, 잉글랜드, 노르웨이, 그리고 스웨덴 일부를 아우르는 강력한 북해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크누트 대왕은 바이킹 시대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그의 제국은 북유럽과 잉글랜드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그의 사망 이후 제국은 분열되었습니다.

1030

[스티클레스타드 전투와 노르웨이 바이킹 시대 종결]

노르웨이의 바이킹 시대가 스티클레스타드 전투로 확정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올라프르 하랄드손(성왕 올라프)의 군대가 패배했음에도, 그의 죽음 후 퍼진 초자연적인 소문들은 기독교 전파를 가속화했습니다.

이 전투 이후 노르웨이인들은 더 이상 바이킹으로 불리지 않게 되었으며, 기독교가 노르웨이의 지배 종교로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왕권 강화와 기독교 수용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1035

[크누트 대왕 사망]

북해 제국의 건설자 크누트 대왕이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덴마크, 잉글랜드, 노르웨이, 스웨덴 일부를 아우르던 그의 제국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됩니다.

크누트 대왕 사망 후 토끼발 해럴드가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바이킹의 잉글랜드 직접 지배가 종료되었습니다.

1038

[기욤 1세의 시칠리아 정복]

오트빌의 기욤 1세가 1038년과 1040년 사이에 시칠리아 일부를 정복했습니다.

이는 노르만인들이 이탈리아 남부로 확장하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많은 잉글랜드, 덴마크, 바랑기아 용병들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활동했으며, 하랄드 하르드라디 등 유명한 바이킹 전사들도 이 지역의 분쟁에 참여했습니다.

1066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와 잉글랜드 바이킹 시대 종결]

노르웨이의 하랄 3세(하랄 하르드라다) 왕이 잉글랜드 침입을 시도했으나,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색슨족 왕 해럴드 고드윈슨에게 패배하고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에서의 바이킹 시대 종결을 상징합니다.

하랄 하르드라다의 전사는 크누트의 북해 제국 부활이라는 희망을 완전히 없앴으며, 노르만 정복보다 1066년을 바이킹 시대의 종료로 간주하는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19일 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이끄는 대규모 노르만 병력이 잉글랜드를 침입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약해진 잉글랜드 군대를 패배시켰습니다.

이는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이어졌습니다.

노르만군은 노르드인들의 부계쪽 후손들로 이뤄졌으며, 잉글랜드의 지배 귀족 계층이 되었습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095

[고드레드 크로반 전사 및 영토 분할]

맨섬과 군도의 왕 고드레드 크로반이 노르웨이 왕 맨발의 망누스에게 전사했습니다.

망누스와 스코틀랜드 왕 에드거는 강화 조약을 맺어 군도는 노르웨이 지배하에, 스코틀랜드 본토 영토는 스코틀랜드에 넘겨졌습니다.

이 조약으로 노르웨이 왕은 명목상 군도와 맨섬의 왕으로 남게 되었으나, 1156년에 왕국이 둘로 쪼개지는 등 점차 노르드인 세력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습니다.

1152

[외위스테인 2세의 잉글랜드 약탈]

노르웨이의 외위스테인 2세가 잉글랜드 동부 해안에 대한 약탈 공격을 실시했습니다.

이는 바이킹 시대가 공식적으로 종결된 후에도 일부 노르웨이 세력이 약탈 활동을 계속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대규모 침략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은 바이킹의 유산이 상당 기간 동안 유럽 해안 지역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1156

[군도 왕국 분열]

군도 왕국이 둘로 쪼개지면서, 서쪽 지역 군도와 맨섬은 '맨섬과 군도 왕국'으로 불리고 이너헤브리디스 제도는 게일인 소머레드의 영향력 아래 '헤브리디스의 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분열은 스칸디나비아 세력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현지 게일인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소머레드의 왕국은 후에 군도 영주령으로 발전합니다.

1187

[에스토니아 바이킹의 시그투나 약탈]

에스토니아 바이킹들이 스웨덴의 주요 도시인 시그투나를 약탈했습니다.

이 사건은 에스토니아 지역 바이킹 활동의 중요한 마무리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에스토니아 바이킹 시대는 이 사건 직후인 1200년경에 끝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발트해 지역에서도 바이킹의 영향력이 광범위했음을 보여줍니다.

1196

[오크니 백작의 스코틀랜드 충성 맹세]

오크니 백작 하랄드 마다드손이 스코틀랜드 본토에 있는 영토 문제로 스코트인의 왕 사자왕 윌리엄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이는 오크니의 백작들이 스코틀랜드 왕권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오크니 백작령은 9세기 중반부터 노르드인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1196년의 이 사건은 스코틀랜드 내 노르드인 세력의 종결을 향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263

[라그스 전투 발생과 스코틀랜드 바이킹 세력 종결]

노르웨이의 하콘 4세 왕이 스카이섬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원정에 보복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서부 해안에 나타났습니다.

라그스 전투에서 스코트군과 맞닥뜨렸으나 명백한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노르드인들은 더 이상의 공격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콘은 오크니에서 겨울을 쇠다가 사망했으며, 이는 스코틀랜드 해역과 섬들에서 노르드인 세력의 마지막 흔적을 청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바이킹 시대는 일반적으로 1266년으로 종결됩니다.

1266

[퍼스 조약으로 노르드인 지배 종결]

노르웨이의 망누스 6세 왕이 퍼스 조약을 통해 스코틀랜드 본토 모든 영토와 함께 맨섬과 군도 왕국을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에게 넘겼습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에서 노르드인 지배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오크니와 셰틀랜드는 1468년까지 노르웨이 지배하 자치 백작령으로 남았지만, 1469년에 혼수 보증으로 스코틀랜드에 넘겨지면서 스코틀랜드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1408

[그린란드 노르드인 마지막 기록]

그린란드의 흐발시 교회에서 열린 결혼식이 노르드인에 관한 마지막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는 그린란드 내 노르드인 정착지 사회의 종말을 시사합니다.

가혹한 기후 악화(소빙하기)와 아이슬란드, 노르웨이로부터의 지원 부족은 그린란드 노르드인 사회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469

[오크니·셰틀랜드 스코틀랜드 할양]

노르웨이 왕 크리스티안 1세가 자신의 딸과 스코틀랜드 제임스 3세의 약혼 혼수 보증으로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를 내걸었습니다.

이로써 이 두 섬은 스코틀랜드 영토가 되었습니다.

오크니와 셰틀랜드는 1468년까지 노르웨이 지배하에 있었지만, 이 할양으로 스칸디나비아의 마지막 남은 서부 유럽 영토가 스코틀랜드로 넘어갔습니다. 노르웨이의 섬 되찾기 시도는 실패했고, 1669년 왕령지로 승인되어 현재까지 영국 영토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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